#20211024
#신명기 #Deuteronomy 34:10-12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이스라엘의 여러 선지자들이 환상 중에 여호와를 대면하기도 했지만 모세처럼 40일 동안 두 번씩이나 산에서 홀로 여호와와 독대했던 선지자는 없었다. 여러 선지자들이 환상 중에 여호와의 영광을 보기도 하였으나 모세처럼 여호와께서 손수 그를 덮으시고 당신의 모든 영광으로 지나가시며 등을 보여주신 선지자는 없었다. 기드온조차도 수십만의 미디안 대군을 무찌르는데 3백명이 필요했으나 모세는 오직 아론만 데리고서 거의 홀로 이집트를 상대로 여호와의 재앙을 내려 무너뜨렸다. 모세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여호와의 율법을 반포한 최초이자 유일한 선지자였다. 다윗처럼 왕직을 겸한 선지자도 있었고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처럼 제사장직을 겸한 선지자도 있었으나 모세처럼 제사장직과 왕직을 함께 겸한 선지자는 없었다. 엘리야조차도 승천할 때 엘리사가 바라보았으나 모세의 죽음과 시체는 하늘의 천사장들에게도 비밀로 부쳐졌다. 모든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았어도 모세처럼 40년 동안 끊임없이 전방위적으로 백성에게 괴롭힘을 받은 선지자는 없었다.
그런 전무후무한 선지자였던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했다. 사도 바울은 동족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모세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섬겼고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셨다고 하였다. 모세가 행했던 모든 이적과 기사들은 다름아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었다. 모세는 이 땅에서 잠시 동안 여호와와 대면할 수 있었지만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전부터 성자 하나님과 연합되어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셨으며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영에 완벽히 충만히 거하셨다. 모세가 여호와의 능력으로 애굽을 초토화 시켰어도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사탄을 비롯한 모든 마귀와 악인들을 영원한 불못에 던져 넣으신다.
#20201024
#레위기 #Leviticus 27:30-34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
30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31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32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33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34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
아브라함이나 야곱 같은 족장들은 정기적으로 십일조를 드리지는 않았던 것 같고 아마도 무언가 여호와의 특별한 섭리를 경험했거나 간구할 경우에만 드렸던 것 같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소돔을 공격한 이방 족속 다섯 연합군에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고작 자기 가신 318명으로 큰 군대인 연합군을 물리친 후에 탈취물의 1할을 그리스도이신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온전히 드렸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홀로 도망쳐 나와 들판에서 잠을 자다가 하늘로부터 이어진 사다리를 보고 난 후에 자기의 핍절함을 기도드리며 평안히 돌아올 수 있게 하신다먼 소유의 1할을 드리겠다고 서원한다.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족장들을 통해서 십일조의 개념을 은근히 보여주신다. 그리고 애굽에서 신앙 자체가 초기화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후에는 아예 십일조를 율법과 규례로 확정하신다. 이를 두고 적지 않은 자들이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에 불과하여 지금은 폐지되었다는 어리석은 말을 지껄이기도 하지만 이는 그저 십일조를 하기 싫다는 변명일 뿐이다.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명확한 율법과 규례로 십일조를 지정하신 것은 무언가 부족하셔서가 아니다. 이는 백성들이 여호와를 만유의 주로 믿고 그 여호와께 구원을 받은만큼 자기의 소유로 감사를 표할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들의 신앙은 애굽에서 완전히 사라져 애굽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마치 부모가 어린 자너를 훈육하듯이 그들을 율법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백성들이 가축의 십일조를 드릴 때는 좋은 것이건 안좋은 것이건 자기가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라, 목자의 지팡이를 세우고 그 아래를 지나가게 한 다음에 열번째 마다 취하는 무작위 방식으로 드려야 했다. 이는 사람의 의도에 상관없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여호와의 뜻대로 선태하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백성은 설령 더 좋은 것을 드리려는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도 이를 어겨서는 안되었다. 자기 욕심을 위해 나쁜 것을 고르려는 의도도 차단되는 것은 물론이다.
십일조는 단지 그 드리는 예물과 행위 자체만으로는 여호와께 아무런 공로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도 철저히 드리는 것을 자기 공로와 의로 삼고 하나님 앞에 자랑했으나 정작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긍휼은 외면했기 때문에 예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도 드려야 하고 공의와 긍휼도 행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십일조를 등한시 하려는 의도를 차단하신다.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이루신 오늘날에도 이 십일조는 변함없이 유효하다. 다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셔서 누가 강제하지 않고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게 하셨다. 원론적이고 이상적으로는 이런 십일조라는 규례를 초월해서 우리가 언제든지 원하는대로 하면 좋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악 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고 우리 자신도 여전히 죄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항상 그렇게 선하게 예물을 드리지 못한다. 따라서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과의 교제와 연합을 통해서 십일조로서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는 이 십일조부터 잘 드리게 되어야만 다른 것에 대해서도 자원하는 심령으로 드릴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교인이나 신앙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은 연약한 신자들에게 그들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천편일률적으로나 율법적으로 십일조를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십일조를 강요하는 교회나 목사들은 엘리야를 먼저 섬긴 사렙다의 과부나, 두 렙돈을 헌금한 가난한 여인의 예를 들기도 하는데, 전자는 여호와의 특별 섭리가 작용한 경우이고 후자는 자원하는 심령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경우가 같지 않다. 도리어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에 처한 교인이 있다면 교회가 그로부터 십일조를 받을 것이 아니라 그 교인을 경제적으로 도와야 한다. 아울러 초신자들에게는 처음부터 문자적인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하기보다는 자기 신앙의 수준에 맞춰서 적은 금액이라도 자발적으로 드릴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현명하다.
어떤 이는 특별히 신앙으로 인해 감정이 고조되면 십일조의 두 세 배를 드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십일조에서 더 드리는 것은 좀 더 깊숙히 들여다보면 자기 의와 신앙의 수준이 이만큼 되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모든 교회와 목사들은 덜 내는 것은 지적해도 더 드리는 것에는 칭찬하고 격려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처음 한 번은 주목을 받고 교회에서 높임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다음 번에는 그저 당연하게 여기게 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묘한 인간의 교만한 본성을 보시고 단지 소득의 1할인 십일조만 의무로 규정하신 것이다. 여기서 더 드린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리 더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이로 인해 자칫하먼 교만해질 위험성을 자각하고 십일조로 절제하여 드리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도 여전히 십일조 외에 더 드리고 싶은 마음이 유지된다면 형편이 어려운 다른 교회를 후원하거나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교회 이름으로 기부하는 것이 낫다.
십일조에 대해서 여전히 나에게 고민이 되는 것은 만약에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투명하지 않고 부조리하게 쓰인다고 판단이 될 때 과연 교회에 십일조를 해야만 하느냐는 점이다. 그러면서 같이 드는 생각은 내 교회에 십일조를 하느니 차라리 다른 어려운 개척교회 등에 후원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엘리의 두 아들이 백성들이 가져온 예물들을 횡령했어도 엘가나와 한나는 때를 따라 예물을 드렸고, 예수님 시대 회당이 장사꾼들과 강도의 소굴이 되었어도 부자나 과부나 여전히 헌금을 드렸던 것을 보면 아무리 교회가 재정을 부당하게 써도 십일조는 드리는 것이 맞을 것 간기는 한데, 마음으로는 여전히 이성의 판단을 거부한다. 부디 주님께서 내 심령을 새롭게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