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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크리스천 영성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고집사)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사람들에게 예쁘고 멋있게 보이려고 엄청난 돈과 노력을 투자한다. 그래서 화장품은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공산품이고 성형외과는 다른 분야보다 월등하게 돈을 잘 버는 전문직종이다. 또한 오랜 불황으로 지갑을 꼭꼭 닫았어도,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의 명품가방과 신발, 외제 고급승용차가 인기리에 팔리는 이유이다. 외모를 예쁘게 치장하여 아름답게 보이려는 욕망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그라질 줄 모르는 현상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신앙에도 이러한 현상이 있다면 참 아이러니한 일일게다. 그렇지만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은 우리 주변에 비일비재하다. 눈에 보이지 않은 영적인 능력이나 신앙의 정도는 증명하기 어려우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행위에 몰두한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인 목사라면 한시바삐 그곳을 떠나야 할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훈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 최고의 종교 엘리트였다.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서 고단한 삶을 영위해야만 했던 적지 않은 민중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별 관심이 없던 반면에 이들은 자신들의 드높은 종교심을 드러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360여가지에 이르는 율법들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 예로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해가 지면 일하던 현장에서 연장을 그 자리에 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는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음에 틀림없다. 암하레츠라 불리며 신앙에 별 관심이 없던 하층민들은 십일조도 드리지 않았던 반면에, 그들은 내다 팔려는 목적이 아닌 가족들이 먹으려고 텃밭에 기르던 약용식물이나 채소조차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다.(마23:23) 또한 일주일에 두 번 금식기도를 그리고 하루에 3번 정해진 기도시간을 철저하게 지켰다. 우리네 교회에도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를 철저하게 지키는 교인이 있다면 대단한 신앙심으로 주변의 칭송이 자자할 것이다. 그렇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행한 희생적인 종교행위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형편없기 그지없다. 형식적이고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일컫는 그들의 의를 넘어서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혹독한 평가가 내려졌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희생적인 신앙의 행위들은 모두 무시하며 폄하하셨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견고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들어있기에 말이나 행위를 통해서 존재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신랄하게 밝힌 이유이기도 하다.(약2:26)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행위를 통해 존재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희생적인 신앙행위들에 혹독한 평가를 내린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드높은 종교심을 드러내 보이려는 자랑으로 삼아서이다. 구체적인 예로, 그들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기를 즐겼으며(마6:5)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게 하려는 미사여구로 기도내용을 꾸미기에 바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며 금식할 때도 힘든 표시를 내지 말라고 하신 이유이다. 또한 불우한 이웃을 위해 구제할 때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행위를 알리려고 나팔을 불어댔다.(마6:2)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 않은 그 어떤 행위도 가식적인 것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네 교회에는 믿음의 유무에 관계없이 희생적인 신앙행위만을 칭찬해주며 박수쳐주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목사나 교인들의 눈도장을 받기위해 주일예배나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예배 중간에 십일조를 드린 명단을 발표하지 않는다면 적지 않은 교인들이 십일조를 드리기를 중단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행위를 반복하는 교인들의 잘못이라기보다 먼저, 그러한 외식적인 행위들을 방치하거나 이를 보고도 올바르게 고치려 하지 않는 목사가 나쁜 것이다.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가식적인 신앙행위들을 반복하다가 죽어 천국 문앞에서 예수님에게 내어쫓긴다면 이보다 황망하고 억울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성경적인 신앙행위를 따르라.
기도
기도는 모든 크리스천에게 의무적으로 요구되는 영적 행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주요한 통로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언제나 강조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목사들이 요구하는 행위는 교회에 와서 기도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아니면 교회에서 간단한 예배 후에 기도회를 갖는 심야기도회나 매일 저녁 열리는 저녁기도회, 혹은 뜻에 맞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이는 각종 기도회가 있다. 그렇지만 직장생활이나 가정에서 해야 할 일들이 빼곡한 이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교회에서, 그것도 일정한 시간을 정해 열리는 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벽한시 이후에 잠드는 직장인들이라면 오전 5시에 열리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려면 잠자는 시간은 겨우 4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적어도 6시간은 자두어야 건강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데, 무리하게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면 기도생활과 삶 모두 엉망이 되기 일쑤이다. 저녁 8시에 열리는 각종 교회의 기도회도 마찬가지이다. 공무원처럼 6시 정각에 퇴근하는 직장인이나 전업주부라면 모를 까, 퇴근해서 식사하고 저녁 8시의 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그림의 떡이다. 그렇지만 현실의 어려운 상황은 도외시한 채, 막무가내로 교회에서 요구하는 기도는 이처럼 정해진 시간에 참석하는 기도회일 뿐이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성실하게 참석하는 것은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사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새벽기도를 마치고 잠시나마 눈을 붙일 수 있지만 직장인이라면 씻고 출근하기조차 바쁘다. 그래서 교회에서 정한 기도회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사람들은 직장이 없는 전업주부이거나 은퇴한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도방법은 무엇일까?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의외로 성경에서 기도하는 방식은 교회에서 요구하는 방법과 차이가 컸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의 원칙은 특정한 장소나 시간의 기도행위가 아니라 주어진 일상의 삶에서 쉬지 않고 행하는 기도를 말하고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의 기도방식은 바울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기도습관을 들여 항상 기도하라고 요청하셨으며(눅18:1), 이방인 최초의 성령세례자인 고넬료도 항상 기도하였고(행10:2),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게 해달라고 했음이다.(삼상12:23) 그렇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교회에서 쉼 없는 기도의 훈련을 받기보다 교회에서 정한 기도회에 참여하는 것을 요청받을 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의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하지 못하는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새벽기도를 성실하게 참석하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넉넉하게 누리며 기도하는 항목마다 신속하게 응답을 받고 있는가? 그건 아니다. 사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30분도 하지 못하는 기도행위는 성경에서 요구하는 쉼 없는 기도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그냥 기도회에 참석해서 자신이 요구하는 소원만을 외치고 돌아갈 뿐이다. 기도란 영적인 행위이다. 기도회에 나와 목사나 교인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스스로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하는 행위가 아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지 못한다면 기도는 무용지물이다. 형식적인 기도행위를 가르치고 요구하는 목회자들은 한마디로 성령이 내주하시는 기도를 체험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자신도 그동안의 신앙생활을 통해 교육받은 기도방식을 거르지 않고 교인들에게 요구할 뿐이다. 어떤 기도가 효과적이고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지에 대한 통찰력이 없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영적인 행위인 기도를 통해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잘못된 기도습관인 탓이 크다. 교회에서 정한 기도회에 참석하든지 일상의 삶에서 기도하든지 쉬지 않고 성령님과 교제하는 영적 습관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장소나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갈급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하루에 3번 기도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금식하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책망 받은 사실을 생각해보라. 그럼에도 새벽기도에 참석하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 교회의 분위기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 그 원인은 영적인 능력이 없는, 희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행위만을 요구하고 가르치고 목회자들의 잘못이 적지 않다.
예배
정상적인 신앙을 지닌 크리스천이라면 주일성수로 대표되는 주일예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주일 저녁예배나 수요예배 그리고 금요예배까지 참석한다면 믿음이 돈독한 신앙인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과의 신앙을 유지하는 시금석이다. 예배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어진 삶을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시간으로 삼기도 한다. 교회에서의 예배행위는 신앙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교회예배에 얼마나 성실하게 참여하는지가 견고한 신앙의 유무를 재는 잣대로 사용된다. 또한 예배행위를 통해 더 높은 단계의 신앙으로 자라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의 예배행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부는 아니다.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을 잡아 번제로 드리는 제사법이 있었지만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폐지되었으며,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예수님의 부활한 날을 기념하여 주일로 대체되었다. 제사법도 바뀌어 성찬식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법(가톨릭교회에서는 여전히 성찬의식이 예배중심에 있지만)이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설교가 중요하게 부각되어 지금의 예배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소나 양으로 드리던 희생제물도 현금으로 드리는 헌금으로 대치되었고 제사장에게 맡기던 제사행위도 교인이 직접 참여하여 찬양과 헌금 등을 직접 드리게 되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구약시대의 제사법이나 신약시대의 예배나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정신이다. 주일성수의 희생적인 예배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면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지만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그들의 신앙행위에는 더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의로움이 빠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주일성수로 대표되는 공적예배에의 참석을 대단한 믿음의 행위로 여기지만 더욱 중요한 믿음과 의로움을 간과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 함축되는 마음가짐이 없이 의무적으로 혹은 형식적으로 참석하고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의식적인 예배형식보다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더 원하고 계신다. 물론 교회의 예배시간에 성실하며 정성껏 참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태도가 없다면 형식적인 예배행위는 헛수고일 것임에 틀림없다. 더군다나 교회에서 정한 여러 공적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느라 가정과 직장, 사업을 내팽개친다면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은 먼저 일상의 삶에서 자신의 일과 역할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통해 살아있는 제물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 후에 교회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더해진다면 더욱 기뻐하실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의 예배행위가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정기적인 예배는 신앙을 유지시켜주며 성숙시키는데 필수적이다. 다만 예배행위가 의무적이거나 형식적으로 변질되지 않아야 할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의로움이 지속적으로 포함되어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도와 봉사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부탁한 말씀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주며 제자를 삼으라는 내용이었고, 봉사는 숭고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귀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면 최선을 다해 전도와 봉사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크리스천은 정기적인 교회출석만을 반복할 뿐 예수님의 명령이나 사랑의 실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전도와 봉사에 열심인 이들에게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정과 직장을 내팽개치다시피 하며 매달리는 것도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일상생활 속에서 평안하고 균형 잡힌 전도와 봉사행위가 아니라면 신앙은 삶에 또 다른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아마 전도는 우리나라 교회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이는 행위가 아닌가? 목회자라면 누구나 교인들이 전도에 열성을 가지고 주일예배 때마다 새로운 신자들을 데려와 교회를 빼곡히 채워줄 것을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래서 교회마다 전도프로그램을 수없이 돌리며 교인들을 조를 짜서 묶어주고 틈만 나면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전도지를 뿌리거나 아파트단지를 배회하며 교회주소가 박힌 화장지를 나눠주며 전도하기를 독려한다. 이는 아름다운 행위이고 세상 끝날 때까지 교회가 최선을 다해 해야 할 의무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전도행위가 별 효과가 없다는 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어깨띠를 두르고 확성기를 손에 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전철이나 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전도행위는 크리스천조차 부정적이며 안티 기독교인을 양산하는 어리석고 무지한 행위에 불과하다. 지금은 양상이 조금 바뀌었지만 아파트 단지에는 전도훈련을 마친 이들이 파라솔을 펼쳐놓고 대형포트에 물을 끓여 놓고 차나 커피를 권하면서 전도지를 나눠주기도 하지만 이 같은 전도방식 역시 시간과 정력만을 낭비할 뿐이다. 사실 이사 오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정하지 않은 사람에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는 진정한 전도의 모습은 아니다. 이미 기독교를 믿는 이들을 자신의 교회로 오게 하는 수평전도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들은, 전도의 목적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형교회로 키우고 싶은 목회자의 속내를 드러낼 뿐이다. 목회자의 권유에 못 이겨 가정과 생업을 내팽개치다시피 하며 열매 없는 전도에 매달리는 것이 견고한 믿음을 드러내는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기독교의 복음에 대해 듣지 못해 교회에 오지 않은 사람은 없다. 기독교에 대해 관심이 없고 기독교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기에 전도를 위해 다가가면 손사래를 치며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것이다.
전도를 하라고 막무가내로 등을 떠미는 적지 않은 교회들은 전도에만 관심을 가질 뿐 들어온 사람을 양육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목회자는 가르침에 전문성과 준비가 부족하며 비성경적인 기복적인 신앙과 신비적인 행위에 목을 매고 있다. 또한 교인들은 사랑이 식어있어 새 신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며 사생활에 끼어들고 귀찮게 해서 아예 질려서 도망치도록 만드는 교회도 있다. 통계에 의하면 교회에 왔지만 다시 나간 사람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다시 나간 이들이 다시 돌아올 확률은 아주 낮다. 이들이 처음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에 왔을 때 잘 가르치고 양육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해주었더라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직 새로운 사람들로 교회의 좌석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제자를 만들기 위한 준비도 능력도 없는 교회가 너무 많다. 또한 어깨띠를 두르고 전도지를 나눠주는 비효율적인 전도행위가 전도의 전부로 아는 교인들도 문제이다. 전도대상인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무례하게 구는 전도방식을 버리고 따뜻한 성품을 갖추고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밴 열매 맺는 삶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낸다면 예수님과 교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몰려올 것이다.
불우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대신해서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나눠주는 봉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주일이면 예배만 드리고 가는 이들보다 교사나, 교통정리, 식당의 도우미 등으로 교회를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드리는 자원봉사자들을 보게 되면 마음이 따뜻해온다. 또한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이들이 있어 세상을 밝고 환하게 해주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모든 크리스천이라면 여기에 동참해야 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일에도 속내가 동기가 아름답지 못하다면 허접스러울 것이다. 예수님 시절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종교적인 의로움을 드러내는 교만 때문이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정치가들이나 관료들이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때에 선물을 가지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찾아와서 나누어주고 사진 찍는 행위를 보고 사랑이 넘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받아주고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우한 이웃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리 나쁘지 않는 일이다. 불우한 이들은 선물을 받아서 좋고 정치가들은 이름을 알려 좋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그렇지만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제자의 명령을 좆아 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속내라면 사람들에게 감사받기에 족할 런지 몰라도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굳이 하나님을 앞세울 필요도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을 보이려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일일게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에는 교회재정의 3%에도 못 미치지만 막대한 빚을 들여가면 대형교회를 짓는 일에는 앞장이다. 또한 탐욕을 채우거나 쾌락을 좆는 일에는 돈을 펑펑 쓰면서 불우한 이웃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교인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까? 이처럼 마음의 동기나 속내가 성경적이지 못하면 교회나 개인이나 하나님의 손길이 임할 리가 없다.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전도와 봉사를 하느라 사업이나 가정을 돌보지 않는 이들을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교회에서는 자신의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을 일을 앞세우는 이들의 견고한 믿음이 칭찬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를 앞세워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행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남편이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출근하며 아이들은 학원에 간답시고 PC방에서 보내며 집안에 빨래는 쌓여있고 설거지는 안 된 그릇들이 주방에 넘쳐나지만 옷만 번드르르 차려입고 전도와 봉사행위에 나선다면 남편과의 부부싸움으로 인한 가정불화에 자녀들을 문제청소년으로 전락할 것이다. 전도와 봉사가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지만 가정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하는 것이 우선이다.
잠 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어느 사업가가 자신의 사업체를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 일에 충성하였더니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개인적인 체험임으로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지는 이는 하나님의 원칙이 아닌 것이 틀림없다. 크리스천 중에서 자신의 사업체를 돌보지 않고 교회 일에 매달린 결과 사업이 곤두박질친 사람을 찾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할일까지 대신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사업체에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서 봉사와 전도를 병행해야 할 일이다. 더더욱 사업의 성공을 목적으로 봉사나 전도를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턱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전도와 봉사의 목적이나 동기가 아니라면 아무런 효험이 없을 것이다.
헌금
신앙생활에 헌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예수님도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셨듯이 믿음의 속내를 드러내는 일은 헌금행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문제는 십일조를 포함한 각종 헌금이 수입의 10~20%에 이르는 큰돈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선교헌금이나 건축헌금까지 드리게 된다면 엄청난 액수가 될 것이다. 물론 믿음으로 드리는 자의 형편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 없이 채워주시겠지만 희생적인 헌금에도 불구하고 삶이 궁핍한 이들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성경적으로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평안하고 형통한 삶으로 인도하시겠지만 기복적인 신앙관이나 맹목적인 믿음을 앞세운다면 가정불화의 씨앗이 되고 불행한 삶으로 곤두박질치는 원인을 제공할 것이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헌금을 드리는 원칙은 자원함으로 드리는 것이다. 억지로 드리거나 남의 눈치를 보고 드리는 행위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목회자들은 ‘심고 거둠의 법칙’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앞세워서 많이 드리면 많이 축복(?)해 주신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에서 헌금을 가장 많이 드린 사람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이들은 수입의 십일조는 물론이고 텃밭에서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려는 식물까지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다.(마23:2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 심한 책망을 들었다. 그 이유는 십일조를 드리는 그 속내나 동기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드러내고 싶은 교만한 마음 때문이었다. 삯꾼목사들이 주장하는 내용에는 희생적인 헌금의 액수만 있지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과 믿음이 없다. 특히 건축을 시작하는 교회에서는 부흥사를 초빙해서 연일 집회를 열고 분위기를 띄우며 부담을 가중시킨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이 헌금 작정을 하면 빠질 수가 없게 만든다. 심지어는 빚을 내고 신용카드를 긁어가며 드리는 이도 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십일조나 건축헌금 같은 큰 액수의 헌금을 작정하여 드리고자한다면 재정계획을 세워 재원을 마련해야한다. 십일조는 수입의 10%나 되므로 이를 드리고자한다면 절제와 자족의 성품을 배우며 지출을 통제하고 과소비와 충동구매를 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를 무시한 채 무턱대고 드리다가 빚이 쌓이고 재정이 악화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자신의 수입이 하나님이 공급하신 것으로 믿는다면 잘 관리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재정목표를 세우고 지출계획을 짜고 가계부를 쓰면서 통제하는 것은 기본적인 행위이다. 만약 건축헌금을 작정한다면 그동안의 저축으로 재원을 마련해야하겠고 그렇지 않다면 새롭게 시간을 가지고 저축과 투자로서 재원을 준비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보다 헌금으로 드리는 지출목록이 더 있으므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저축하고 소비를 억제하며 살아야 미래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며 넉넉한 재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 투자하는 태도로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을 고수익의 거래대상으로 여기는 가증한 행위가 될 뿐이다.
마 19: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부부가 한 몸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까지도 합해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음이 가장 많이 가있는 돈을 두고 부부가 서로 감추고 비밀로 하며 재정 관리에 투명하지 않다면 한 몸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특히 부부의 어느 한쪽이 믿음이 연약하거나 아예 비신자라면 헌금내용에 대해 밝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십일조를 드려도 비밀로 하거나 아예 거짓말로 둘러대기 일쑤이다. 이 같은 행위를 두둔하는 목회자도 적지 않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시행해야한다며 이 같은 행위가 견고한 믿음이라는 논조이다. 이는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은혜에 감사해서 기꺼이 드리는 헌금을 기뻐하시며 배우자에게 감추거나 거짓말을 해서라도 드려야 한다고 하신 적이 없다. 그렇다면 정직하고 깨끗한 성품을 강조한 수많은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비밀로 드리던 헌금이 나중에 드러나면 이혼으로 가는 빌미를 제공할 지도 모르며 부부간에 심각한 불화와 균열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믿지 않거나 믿음이 연약한 배우자가 반대한다면 참고 기도하면서 마음이 돌이킬 수 있도록 배우자를 감동시켜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나님은 헌금을 드리는 행위보다 그 마음이나 속내를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설령 드리지 못하는 처지에 있더라도 이해하시며 가까운 미래에 드릴 수 있는 환경을 열어주실 것이다.
거푸집 신앙을 벗어나라.
거푸집은 콘크리트를 양생할 때 나무판으로 형틀을 짜서 만들어 곤죽상태의 콘크리트를 넣어 굳히는 도구이다. 양생기간이 지나 콘크리트가 다 굳으면 거푸집을 떼어 낸다. 그러면 원하는 형태의 건축물이 드러나게 된다. 콘크리트가 다 굳었는데도 거푸집을 떼어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거푸집은 콘크리트가 굳을 때까지만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예수님이 오시기전까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며 믿음의 틀로서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복종했다. 그렇지만 율법이 신앙행위를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시면서 율법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바울의 편지에서 수도 없이 보게 된다. 즉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믿음의 거푸집으로 사용하셨기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자동적으로 폐지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폐지된 것이라기보다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승화된 것이다.
그런데 요즘 크리스천들의 신앙은 거푸집을 마치 본질처럼 생각하는 이가 너무 많다. 믿음의 거푸집은 희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행위이다. 초신자가 교회에 처음 오면 주일예배나 구역예배의 참석을 종용하고 설교를 통해 말씀을 배운다. 그런 다음 새벽기도, 십일조 등으로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한다. 이러한 신앙행위들은 신앙을 지탱해주며 성숙시켜주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성실하게 이행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깊어지며 신앙이 점점 성장하게 된다. 문제는 이미 자랄 대로 다 자란 이들조차 신앙행위를 믿음의 유일한 척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있다. 즉 주일예배나 주일저녁예배, 구역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하면 믿음이 좋은 평가를 받고, 새벽기도 십일조를 성실하게 드린다면 훌륭한 믿음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그 이상은 없다. 계속 이러한 신앙행위를 반복적으로 지속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미 콘크리트가 굳어 거푸집 신앙을 떼어버려야 하는데 거푸집신앙이 마치 성숙한 신앙으로 여기고 고수하는 것과 같다.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앙행위들은 믿음이 자라고 성숙시키는 틀로 아주 중요하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서 믿음이 충분이 자랐다면 외면적인 신앙행위보다 내면의 신앙을 키워야한다. 즉 새벽기도나 철야기도에 참석하는 행위보다는 일상의 삶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찾으며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십일조나 각종 헌금을 얼마나 많이 자주 드렸는가보다, 드리는 헌금의 액수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드렸는가 하는 내면의 동기가 더 중요하다. 또한 돈의 성격도 중요하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과 불의한 방법으로 가져온 돈은 액수가 크더라도 하나님이 싫어하시기에, 적은 돈이라도 정직하게 땀 흘린 노동의 대가로 얻은 것이라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큰돈이라도 아낌없이 드리는 믿음의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를 잘 가르치는 교회는 드물다. 단지 많은 돈만을 가져오는 손을 칭찬해주고 격려해주지만, 목사의 칭찬보다는 하나님의 칭찬이 더 중요할 것이다. 또한 주일예배를 비롯한 각종 예배에 대한 태도이다. 여러 이유를 대며 주일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다면 어린 신앙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주일예배를 비롯한 공적예배에 빠지지 않고 드리고 있다고 해서 전부 성숙한 신앙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제물이 되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 형식적인 예배도 기뻐하시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현장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모르는 크리스천도 별로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일예배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찾고 삶에 적용하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그냥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눈도장이나 찍고 적당히 헌금이나 드리면 의무적인 신앙행위는 했다고 생각하고 자위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밝힌 하나님의뜻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거푸집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성령이 마음에 오래 거주하시면 자연스레 죄를 멀리하고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성령의 열매란 대부분 깨끗하고 사랑이 풍성한 성품이 바탕이 된다.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와 같은 성품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렇다면 자신을 돌아보아 이러한 성품을 얼마나 지녔고, 이러한 성품을 얻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가를 돌이켜 보아야한다. 주일예배에 참석하거나 헌금을 성실하게 드리는 것보다, 부족한 성품을 고치려고 고민하며 노력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거푸집을 떼어내지 않고, 그 위에 아름다운 색깔의 페인트를 칠하거나 빛나는 광택을 내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물론 견고한 신앙을 지탱해 주는 신앙의 행위들이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시간이 지나 신앙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행위뿐인 거푸집신앙을 떼어내고 견고한 믿음과 빛나는 내면의 세계를 가꾸어야 한다. 그렇지만 단지 교회 다닌 햇수가 오래되어 무거운 직분을 성 뒤에 붙여 부르고 있지만 내면의 믿음이 더디 자라거나 기형적으로 자란 이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이는 그릇 가르친 목회자의 잘못이 적지 않다. 눈에 보이는 예배행위나 기도행위, 전도에는 열을 올리면서, 더 중요한 성품이나 하나님의 뜻을 잘 가르치는 데는 무지한 교회가 너무 많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선택의 몫은 자기 자신이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