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쓰고 있는 원소와 화합물 이름을 대한화학회에서 영어식을 기반으로 바꾸고 앞으로 교과서 등에 반영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이름들이 독일식이라 국제적 표준인 영어로 맞춘다고들 하는데 이는 뭔가 좀 틀린 생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물론 자연과학계는 세계적으로 논문도 거의 영어로 발표하고 학술 교류도 영어로 이루어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나라가 원래 써왔던 화학 용어를 영어식으로 바꾸는 일은 없다. 자국어로 논문을 쓰거나 기술자 또는 일반인과 의사소통을 할 때는 당연히 자기식의 용어를 쓴다.
화학 교수 몇 명과 얘기를 나눠 보니 이런 식으로 바꾸면 물론 혼란이 있겠고 학계 안에서도 다른 의견이 있기는 하나 대학 등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영어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 결국은 영어식으로 함이 혼란을 덜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화학 용어 정리 작업을 하면서 순우리말이나 쉬운 말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중에 이런 식으로 외래어로만 쓸 수 밖에 없는 원소나 화합물 이름은 영어식으로 바꾸는 작업은 일부에 해당하니 좋게 봐달라는 말도 했다. 물론 그런 용어 정리 작업은 환영하고 영어식으로 바꾸는 게 낫다는 이들의 말을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며 나름대로 일리도 있지만 영어식 개정은 편의주의적 발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원소나 화합물 이름은 대개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어근을 기반으로 독일 등지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어찌보면 독일어식 발음을 하는 게 원어에는 가깝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몇 가지 예외가 있겠지만 대개 이런 용어는 독일어식 발음을 딴 일본어를 거쳐 들어왔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이 방식대로 쓰고 있는데 단순히 영어식 발음과 다르다고 무조건 고치자는 제안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언어에 담긴 역사를 배제해서는 안 되고 현재의 쓰임이 어떤지도 생각을 해 봐야 한다.
가령 우라늄과 칼륨은 독일어로는 Uran(우란)과 Kalium인데 이 방식은 영어를 제외한 대부분의 게르만어 그리고 대부분의 슬라브어(우란은 거의 같지만 칼륨은 어미가 조금 달라져 칼리로 부르는 언어와 칼륨으로 부르는 언어가 있음)와 일본어에서 쓰인다. 로망스어의 경우 스페인어와 이태리어는 -ium으로 끝나는 이름을 그 쪽 언어식으로 -io로 바꾸기 때문에 uranio(우라니오)로 쓰고 불어는 그냥 라틴어식으로 uranium으로 쓰며 (발음은 위라니옴), 칼륨은 영어와 같은 어원인 potasio(스페인어), potassio(이태리어) potassium(불어) 등으로 쓴다. 우리말은 독일어에서 온 일본어식으로 우란이라고도 했지만 지금은 학술라틴어식으로 우라늄으로 하고 칼륨은 독일식 그대로 부른다. 개정판에서는 우라늄을 영어식인 유레이니엄으로 바꾸자는 말은 없지만 칼륨은 포타슘과 함께 쓰다가 후자로 바꿔나갈 예정으로 나와 있다.
사실, 영어식 표기의 어색한 점은 영어의 발음이 워낙 심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aeiou가 아에이오우가 안 되고 '에이,이,아이,오우,유'가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표적으로 우라늄과 유레이니엄의 비교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니 부탄은 뷰테인이 되고 프로판은 프로페인, 헥산은 헥세인이 된다. 물론 영어권 사람들한테 부탄이나 우라늄으로 발음하면 못 알아들을 수도 있으나, 다른 지역의 사람들한테는 현재 우리식 발음이 훨씬 더 알아듣기 쉬울 것이다. 칼륨이나 나트륨 (게르만어와 슬라브어, 일본어는 나트륨, 영어와 로망스어권은 sodium) 같이 언어권마다 좀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으나 결국은 다 자기 식의 표현을 버리지는 않는다. 아무리 학술용어로 영어가 많이 쓰인다 해도 원래의 어원에서 영어처럼 발음이 크게 벗어나는 것을 따라 표기하면 오히려 더 어색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실무자나 일반인이 비닐이나 부탄 대신 바이닐이나 뷰테인으로 쓰라는 요구에 쉽게 적응할지도 의문이다. 화학자들이 영어를 주로 접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 종류의 국제공통어휘(internationalism)를 무조건 영어식으로만 쓰자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라디오, 피아노, 바나나가 아니라 레이디오, 피애노, 버내너가 맞다는 것이다. 라디오는 라틴어 어근으로 만들어진 말이고, 피아노는 이태리어, 바나나는 서아프리카 언어에서 유래해 스페인어를 거쳐 세계에 퍼진 말이다. 대개의 언어에서 이 낱말들은 지금 우리말에서 쓰는 표기와 비슷한 발음을 한다. 영어식의 '에이'나 '애' 발음을 하는 언어는 거의 없다. 알레르기나 게놈은 그리스어 어근을 조합해 독일어에서 만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별 문제 없이 잘 써왔는데도 영어신봉자들은 영어발음타령을 한다. g의 경우 전설모음 e나 i앞에서는 언어별로 ㄱ발음을 안 하는 언어도 꽤 되기 때문에 좀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영어식의 앨러지나 지놈으로 해야 맞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마치 세상에는 영어만 있는 듯이 영어만 따르자는 주장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태국어의 경우는 원소나 화합물을 거의 전부 다 영어식으로 부른다. 그래서 우라늄은 유레니아모, 칼륨은 포테소시아모 등으로 영어 발음을 태국어식으로 옮긴 표기를 한다. 게다가 흔히 일반적으로 쓰는 원소명인 산소, 수소, 질소 등도 가령 인도네시아어처럼 히드로겐도 아니고 하이도로제노 등과 같이 영어 발음을 그대로 쓴다. 산소, 수소, 질소 등의 낱말은 일본어의 서양어 번역차용어(보기:그리스어를 조합한 hydrogen은 수소로 번역, 독어 Stickstoff는 질소로 번역)를 다시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고 중국어는 다르게 쓴다. 태국은 자체적으로 화학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술라틴어 발음과는 상관 없이 그냥 영어를 따라 쓰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이미 과학과 공업이 발전되었기 때문에 독일식, 일본식이긴 하지만 결국 한국식인 우리 나름의 이름이 있는데도 굳이 영어식으로 바꾸려 한다면 과연 옳을 일일까 생각을 해 봐야 한다. 비록 자연과학 대부분의 논문이 영어로 쓰이기는 하지만 공업이 발달한 독일이나 일본, 러시아도 실제 기술 업무에서는 아직도 자국어를 많이 쓰고 있고 그런 나라와의 교류 협력도 필요한데 국제적 의사소통을 너무 영어에만 맞추는 것이 아닌가 다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한다. 영어가 통용어(lingua franca)로 널리 쓰이기는 하더라도 절대로 세계의 공용어(official language)는 아니며 모든 언어 위에 존재하는 표준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