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캐드월러더 빈턴 미국 선교사
1856년-1936년 6월
찰스 캐드월러더 빈턴(영어 : Charles Cadwallader Vinton, 한국어 :빈돈(賓頓),
1856년-1936년 6월)은 미국의 선교사이자 의사이다.
제중원의 제3대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글 성서의 출판과 보급을 위한 성서공회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생애
빈턴은 1891년 4월 3일에 미국 북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하여 이질로 사망한 존 헤론의 뒤를 이어 제중원의 원장이 되었다.
5월 11일에 빈턴은 제중원의 운영비 사용 권한을 요구하며 진료를 거부하였다.
미국 공사 허드(Augustine Heard)가 빈턴과 조선 정부를 중재하여 문제는 진정되었다.
의료 사업보다는 직접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빈턴은
제중원에서는 선교가 불가능하였지만 제중원 구내에 교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빈턴은 조선정부에 의하여 교회 설립이 좌절되자 태업을 시작하였고
1891년 9월부터는 별도의 개인 진료소를 차렸으며
1893년 11월에 제중원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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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한국) 초기 선교에 공헌한 선교사들은 적지 않다. 그들 중 자신의 생명을 잃은 이들, 부인을 ,혹은 자녀들을 잃은 이들이 적지 않다.
빈튼(C. C. Vinton, M.D) 선교사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의료 선교사로 내한한 빈튼 선교사는 제중원에서 진료하였고,
자주 지방 순회진료를 하면서 복음 선교에 헌신했다.
한 주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회 서기로 다년간
봉사하면서 1891년부터 1898년까지 있었던 회의록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겨
그 기간 동안 북장로교회가 행했던 사역들을 들여 다 볼 수 있게 해준 선교사이다.
그는 1891년 내한하여 1908년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귀국할 때까지 의료사역을 하면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했다.
그것은 아들 Walter(1살)와 Cadwilard(4살),
그리고 딸 Mary(6개월) 세 자녀를 조선 땅 양화진에 묻은 일이다.
1903년에는 부인 Lefitia마저 생명을 잃어 자녀들이 묻혀 있는 양화진에 같이 묻혔다.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와 그 가족들을
보면 선교 당시 풍토병과 전염병으로 희생된 선교사들이 많았다.
선교지였던 조선 (한국)에서 갓 태어난 아이들의 희생도
매우 많았다.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 아이들은 제때 치료와 간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교사 자녀들이 고향에 있었으면
얼마든지 살아 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부모가 선교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태어나자 마자 혹은 채 2~3살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 죽어 나갔다.
특히 빈튼 선교사는 조선(한국)에서 세 아이를 낳자마자 잃어야 했고,
아내마저 아이를 낳다가 죽었지만, 그는 정년을 맞을 때까지 조선(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이것이야 말로 헌신된 사역자의 모습이다. 당시의 상황을
언더우드 부인 릴리어스(Lillias)는 이렇게 기 록했다.
“전쟁 동안에는(청일전쟁을 일컬음) 모두 서울에 남아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몹시도 무더운 날 서울 안에만 갇혀 지내던 선교사들이 병에 걸렸다.
전킨(Junkin) 목사 부부도 우리 집에서 여름을 보냈지만 아이 한명이 죽고 말았다.
이는 몇 주 동안의 더위로 희생된 사례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우리 아들도
여름 내내 앓았다. 에비슨 가(家)의 두 세명, 알렌 가의 두 명, 아펜젤러 가의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스크랜톤 가의 아이들은
열 때문에 쇠약해 졌다. 홀 의사는 열병에 걸려 죽었다.
빈턴 선교사 부부의 아기도 그해 여름에 죽었다.”
비록 그가 괄목할만한 업적은 못 남겼다 해도 가족 네 명의 생명을 잃으면서까지
조선(한국)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를 조선 (한국) 교회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는 한때 제중원 원장으로 사역했고
조선성서공회 창설에 공헌했으며, 기독교신문 The Christian
News 편집주간으로 사역했다.
또한 선교잡지 The Korea Field, The Korea Mission Field 편집에 수고했다. 그는
선교사들간의 선교협력과 교단 화합에도 노력했으며 이를 통해 감리교와 장로교 간의
찬송가 통일을 추진해 결실을 맺기도 했다.
또한 찬송가에 이어 신문 통합, 중 등학교 통합도 이루어지면서
연합선교정책의 급전진을 이뤄냈 다.
그리고 조선 나병환자 실태 조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부 산 나병원 설립에도 공헌했다.
그는 190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여
1936년 뉴욕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조선(한국)에 도착한 직후인 1891년 4월 10일자 편지를 보 면 “…
배설물과 비위생적인 물질에서 나오는 병균과 그리고
끊임없이 암반 위 토양층 아래로 스며드는 쓰레기들에서 나오 는 병균과 세균들이 득실거립니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
당시 조선(한국)의 의료상황은 아주 형편없었다. 하지만 같은 편지 내용 중 “… 조선(한국)인들은 제가 확신하건데 아주
쉽 게 복음을 받아 들일 뿐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라며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흥을 암시하기도 했다.
조선(한국) 선교를 위해 가족 넷을 잃은 선교사는 빈튼 선교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는 한국 선교 역사의 숨은 보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