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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 과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I. 들어가기 <남한산성의 줄거리와 문제 인식>
100쇄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던 작가'김훈'의 남한산성은 출간되었던 2007년을 지나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이 암담한 길을 걷고 있던 2017년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주연의 영화로 재탄생되었다. 짧은 식견으로 판단하자면 꼭 특정 시점만은 아니겠으나 우리 정치에 있어서 각기 다른 대립적인 의견을 가지고 건설적인 토론을 하기보다. 매우 저급한 정치 행태에 대한 혐오가 작중 인물 예조 판서 김상헌과 이조 판서 최명길이 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상적인 정치가의 모습 (국가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을 수많은 독자와 관객들로 하여금 갈망하게 한 것이 아닐까 들어가기에 앞서 생각해본다.
1. 영화의 역사적 배경
이 영화의 배경은 정묘호란의 조선이다. 조선역사상 두 차례의 호란을 이해하려면 그 이전의 조선의 정국과 국제 정세의 흐름을 간략하게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기록으로 남은 역사에 의하면 왜란 이후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이끈 사대부들은 광해군과 그의 추종 세력의 흔적을 모두 지워야 했을 것이다. 잘한 것은 뭉개고 못한 것은 드러내야 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호란, 그 사건의 발단은 그로부터 시작됐다. 그중에 하나는 광해군의 국제 정세에 따른 외교정책의 노선이었다. 조선은 건국할 때부터 당시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초기의 형태는 국가대 국가로 하는 외교 형태로 명을 섬기고 조공을 바치는 것이 되었다면 조선 중기로 넘어가는'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기점으로 이는 '명에 대한 복종'으로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조가 최초 방계 출신의 왕이었기에 정통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권력을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방편으로 명을 확실히 등에 업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후에 명에 대한 맹목적 집착으로 바뀐다.) 어쨌든 이러한 복합적인 결과로 전쟁 상황이 끝난 시점에 조선에 대한 명의 기세가 등등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의 뒤를 힘겹게 이은 광해군은 그의 아비보다 국제정세를 잘 간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명이 국가로써의 운명을 다해가고 후금이 세운'청'이라는 세력이 급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과 그의 근간이 되는 사대부는 이미 그들의 신조가 되는 성리학에 따라 명에 대한 맹목적 충성에 깊숙하게 젖어있는 상태여서 대놓고 청에 대한 우호관계를 드러내기가 여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중 외교 (중립 외교)를 실시해 나갔다. 그것을 명을 하늘과 같이 생각하던 사대부들이 모를 이가 없었을 것이고 이것은 후에 그의 폐위 원인 중에 하나가 됐다.
인조 또한 광해군만큼이나 정통성에 자신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명을 섬기는 사대부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결과는 뻔했다. 명 황제의 인정도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신흥 강국인 청 (더군다나 자신들을 오랑캐라고 여기는 조선의 행태를)이 달갑게 볼 리가 없었다. 그렇게 첫 침략이 있었고 한 차례 잘 넘어가는 듯했으나 차이와 기후, 지리적 조건의 차이에 의해 그들의 첫 침략은 순순히 물러가는 것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내 조선이 여전히 자신들을 오랑캐라고 여기자 다시 침략해 왔다. 인조와 정치가들은 도성을 버리고 천혜의 요새인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청의 주력부대는 벌판을 휘젓는 기병이고 그들의 전투 방식대로 우두머리가 살아 있다면 전쟁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라 인식하는 그들의 전투 방식을 앞선 침략 때 간파했고 조선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장기 공성전을 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온 계책이기도 했다. 각설하고 영화 '남한산성'은 남한산성에서 청과의 장기 대치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여전히 맹목적으로 명을 좇는 영의정을 비롯한 신하들과 그들의 정치 속에서 여전히 빼앗기고 억압받지만 삶을 이어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이 사태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 최종 결정 권한이 있는 왕에게 말로써 의견을 피력하는 두 대신의 이야기를 그린 정치 드라마이다. 나는 이 작품을 현대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에 비추어 인간 실존에 위협을 가하는'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토론하는 두 인물과 어쩌면 실제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서날쇠'라는 인물에 대하여 풀어보고자 한다.
II.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으로 본 영화 '남한산성'과 현실정치
1. 문제의 출발점
" 수학의 정식으로 증명되고 기술적으로 입증된 근대적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진리들'이 더 이상 보통의 말과 사유로 표현되지 못한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 - 인간의 조건 79p
한나 아렌트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위의 인용구와 같이 아무 조건 없이 우리에게 삶의 공간을 허락했던 지구를 자연과학의 세계관에 따라 감옥이라고 여기고 우월한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증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더불어 그러한 지식을 수단으로 지구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보장해 주던 곳을 파괴하고 '과학만능주의'에 취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잃고 노예로 만드는 행태 (칸트에 따르면 누군가를 목적으로 여기지 않고 수단으로 여기는 행위)가 만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과학 중심주의의 세계관은 인간으로부터 말과 행위의 능력을 빼앗아 가고 그것을 대신해줄 기계에 의존하게 되고 결국 사유를 멈추게 됨으로써 인간의 본질인 '정치하는 인간' 으로써의 능력을 빼앗아갔다. 여기서의 정치는 방법과 기술로써의 정치가 아니라 공동체의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삶에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는 다수가 동의하고 정치적으로 해결될 문제이지 어떤 한 사람의 고찰이나 의견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경험과 공포를 단편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얻게 된다. 이때 공허하고 하찮은 진리들을 추구하는 것은 노예로서의 삶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문제에 특정한 해답을 제시하는 대신해 하나의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소외당하고 지나치는 것들을 밝혀 줄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두고 '활동적 삶(Vita activa)'이라는 단어로 그녀의 정치철학 일반을 표현할 수 있다.
2.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그녀는 자신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인간의 조건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그것은 노동, 작업, 행위이다. 이 세가지는 인간의 사유하는 능력과 더불어 거기서 나오는 '말과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라 종합해 볼 수 있다. 고대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그리스적 사유에서 나온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은 인간의 활동적 삶을 단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킨다. 그녀는 관조적 삶 자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원리가 있고 이 원리 없이는 어떤 질서도 확립될 수 없다는 전통적 사유에 내제하는 위계질서의 타당성을 의심한다. 다시 말해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은 분리할 수 없고 어느 하나에 지나친 무게를 두는 것은 인간 실존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표현으로 인간은 불멸이지만, 영원하지는 않은 우주 속에서 죽어야 하는 존재다.(인간의 조건 96p 두 번째) 영원한 삶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느 정도의 영속적인 속성을 산출하려고 하는데 바로 그것은 '흔적'을 남기는 행위이며 그것은 다시 말해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활동의 방식이 아니라 관조함에서 나오는 능동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관조를 통해 영원성을 경험하고 인간은 그 경험을 토대로 활동적 삶으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인간의 활동적 삶이 '관조의 시녀'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곳이 '공론의 영역'이다. 인간은 늘 그들이 능동적 행위로 인해 만든 작품과 같은 사물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개념이 없다면 인간의 활동은 무의미하다. 활동적 삶의 근간이 되는 행위는 인간 사회 밖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행위' 만이 타자의 지속적인 현존을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 이러한 인간의 공동생활에서 인간이 본디 '정치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며 '공론 영역'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인간의 조건 후반부에 이 공론 영역을 유지시키는 힘으로 권력(Power)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을 무엇이든 사적으로 점거하여 고립으로 향하는 인간의 욕망인 세력(Force) 또는 힘(Strength)과 구분한다. 함께 살면서 진정으로 우리는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해결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가질 수 있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권력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낸 세계의 생명줄 즉, 무언가 세계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작품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다. 단순히 상업적으로 나와 타자의 1대 1 교환 관계가 아니라 혼자 있을 때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을 이 공론 영역에서 드러냄으로 모든 부조리에 항거하고 무언가에 얽매여 살았던 노예적 삶에서 인간 본질을 회복시킨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사는 Give & Take의 사회, 효율성만을 중시해서는 안되는 곳에서 그것을 중요시하며 인간을 어떤 것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결과 지향적인 오늘날의 사회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관점이다.
3. 영화 '남한산성'과 현실정치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정치' 보다 조금 더 작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정치가' 들의 정치인 현실 정치행태가 이러한 공론 영역을 잘 보장해 주는가에 대해 우리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공약'이라는 것을 통해 우리가 공론영역에서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인간 실존의 회복을 논할 가능성을 보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정치를 경험해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잘 지켜지고 그 안에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을 할수 있나'를 고민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경험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약속은 인간사의 어두움을 극복하는 힘이 있으며 자기 지배와 그에 따른 타인의 지배에 의존하는 지배 형식의 유일한 대안이 되며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삶에서 신뢰의 이정표를 세운다고 표현했다.(351p) 이렇듯 약속은 함께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부조리에 대한 회복이 있을 것이란 희망의 말을 건넬 수 있는 근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약속'이라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로 돌아가 보자. 오랑캐의 침입을 앞두고 왕이라는 권력은 백성과 신하들에게 어떤 '약속'으로 지속적인 삶을 보장할 것인지 고민한다. 이에 두 가지 방향의 약속이라는 선택지가 최명길(이병헌 분)과 김상헌(김윤석 분)에게 주어진다. 한 가지는 최명길의 주장처럼 청과의 화친을 통하여 조선이라는 공동체가 물리적인 삶을 유지한 뒤에 후일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일단은 삶이 있은 뒤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김상헌이 주장하는 바는 조선이라는 공동체가 이제껏 유지해 온 시스템은 결사항전으로 싸운다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 먼저 굴복한다는 것은 그 이후의 삶에서 언제나 청이라는 외부 세력에 얽매이는 노예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이다. 두 주장 모두 전쟁이라는 외부의 강력한 타격으로 인한 죽음 앞에서의 고민에 합당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정치가의 길을 걷고 있으나 영의정으로 대표되는 여타 사대부의 세력들은 그러한 불가피한 외부의 상황 가운데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계산하며 두 의견을 번갈아 가며 옹호하거나 혹은 비난한다. 결국 그렇게 갈팡질팡 하는 사이에 혹은 더 높은 힘으로 인하여 논의는 묵살되고 잘못 결정 내려진 것들로 인해 실제 전쟁터에 나가거나 성 안에서 생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백성들에게는 직접적인 피해로 다가온다. 전쟁에 필요한 말의 먹이를 준다는 이유로 가마니를 빼앗아가 엄동설한에 동상에 걸린다던가, 굶는다던가, 무능한 자들의 잘못된 계책으로 인하여 전쟁터에서 죽어간다. 지금의 국민은 조선의 백성들과 다르게 주체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을 그들이 생각하는 약속의 가치를 잘 드러내 줄 것 같은 정치가에게 희망을 두고 양도했을 뿐이다. 약속에는 회복의 힘이 있다는 믿음에 의거한 행위이다. 정상적인 구조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최명길과 김상헌 같이 공론 영역에서 치열하게 토론하여 자신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에게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약속의 가치를 실현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의 백성들이 말을 먹인다는 이유로 자신의 집 지붕을 빼앗아가도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노예적 존재였다는 사실을 감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체적 권력을 가졌다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 정치가들에 의해 세워진 정책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조선 백성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대사가 와 닿는다.
(김상헌이 서날쇠에게 부탁을 하고 상을 약속하자 서날쇠가 하는 말) "제가 이일을 하는 것은 주상전하를 위함이 아닙니다. 전하와 사대부들이 청을 섬기던 명을 섬기던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 같은 놈들이야 그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어 겨울을 굶지 않고 날 수 있는 세상을 꿈꿀 뿐입니다. "
III.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간의 조건'으로 풀어본 인물들 (서날쇠 그리고 최명길, 김상헌)
1. 서날쇠
여기서 다른 두 인물보다 서날쇠를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공론 영역에서 말과 행위로 조선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듯 보이는 두 대신 사이에서 세워지는 정책이 삶에 직접적 영향이 되는 백성의 대표이고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그는 현대의 국민처럼 권력을 양도할 힘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있는 근간인 백성을 대표로 하는 점에서 현대의 국민과 의미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의 주장에 비추어 봤을 때 그는 능동적으로 활동적 삶을 이어나가기보다 그저 노동하는 인간으로서 존재하기에 사유 없이 생산과 축적된 것을 소비만 하는 노예적 인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봤을 때 말을 넘어서서 행위하는 유일한 인간으로 나타난다. 그는 대장간을 운영하는 장인이다. 그는 그의 분신과 같은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전쟁 상황에서 군인에게는 총으로 나타내지고 백성들에게는 농기구로 나타내어진다. 서날쇠는 조선이라는 세계의 상황을 사물화 하는 인물이다. 그가 만들어 내는 사물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것도 아니며 수많은 타자의 삶(백성의 일상적 삶의 회복을 위하 몸부림)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진정 이익을 위해서 행동했다면 당장 자신의 기술과 조선의 군사적 정보들을 가지고 청에 합류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걸고 지원군을 요청하는 임무를 감당하기도 한다.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세계를 (두 대신의 조선과 관계없는, 백성의 조선을) 우선한 것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두 대신 최명길과 김상헌이 말의 방식으로 세계를 소유한다면 그는 다른 방식의 세계를 소유하는 호모 파베르적 인간이다. 아렌트의 표현에 의하면 노동은 모든 피조물과 인간이 살아있음의 순전한 기쁨을 공유하는 경험 방식이다. (196p) 서날쇠의 대장장이로서의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단순 노동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것은 영속적인 세계를 창조하려는 인간 본질의 몸부림이다. 최명길의 세계가 그의 주장대로 계약으로 청과의 화친을 이끌기 전에 굴복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순간 끝이 났고 김상헌의 세계는 화친이 이루어지는 순간 끝이 났다.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서날쇠의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는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나긴 겨울을 지나 다시 민들레 꽃이 피는 것으로 지켜지지 않았지만 약속에 대한 가치를 믿고 이상을 품으며 자신에게 입양된 어린아이 바라보는 희망적인 시선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이런 흐름에서 서날쇠는 자신의 도구에 잠식당하지 않고 (241p) 인간의 조건을 실현했던 인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최명길과 김상헌
한나 아렌트의 문제제기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근대로 들어오면서 우리가 세계를 구성하기 수월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던 기계 (장인에 있어서 도구)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것에 종속되어버리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기술 세계에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구에 얽매이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한나 아렌트가 주장하는 것이 실제 우리의 삶을 사는데 너무나 이상적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존하는 인간이라면 설령 내 앞의 현실이 당장 눈에 보일 정도로 좋아지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치열하게 무엇인가 활동하며 희망과 목적으로 삼는'이상 세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가 이상을 추구한다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이 전쟁과 같은 삶 속에서 그것을 너무 '비현실적' 이라며 단박에 비판할 것이다. 남한산성의 두 인물 최명길과 김상헌이 만약 우리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그들도 이 날카로운 말들을 피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실제 전쟁의 상황에서 조정안에서 언어라는 방법으로 서날쇠가 도구를 통해 세계를 만들었던 것처럼 각자의 이상을 추구한다. 서날쇠의 이상은 '사물화'로 표상하는 인간의 조건이라면 이 둘은 언어로 표상하는 인간의 조건을 드러낸다. 최명길은 다른 대신들이 전투를 통해 승리를 쟁취하는 방식을 주장하여 자신이 주장했던 화친의 길이 막히자 오랜 벗이었던 '수어사 이시백(박휘순 분)'과의 대화에서 "칼이 말의 길 마저 막을까 두렵소"라고 이야기한다.그가 추구했던 세계는 쉽게 말해 '말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한다. 지금의 우리에게 '말이 잘 통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살고 있느냐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다. 한나 아렌트는 행위와 더불어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인간의 활동 중에 행위만큼 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p277) 사람들은 행위하고 말하면서 정체성을 드러내며 세계에 자신을 드러낸다. 타인과 구별 짓고 또 차이를 표현한다. 자기 것만을 표출하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독단이며 고립이자 어떤 것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욕망일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표현의 차이는 서로가 서로의 차이를 잘 이해함과 동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문제에 있어서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통해서 더 나은 방향 혹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차선의 방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적인 점거를 아렌트는 소유의 개념과 구분한다. 우선 사적인 점거는 인간의 관계를 박탈한다. 관계의 박탈성이 드러난 가장 극단적이고 반인 간 적 형태가 고독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현대의 정치 행태는 이러한 박탈성이 잘 드러난다. 반대를 위한 반대, 상대 당이 A를 추구하니 설령 A가 최선의 방향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덮어놓고 B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심화될 경우 폭력으로 치닫고 결국 이것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차별했던 전체주의적 시각과 다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대화라는 것의 이상은 무엇인가? 일단 상대가 옳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 비추어 봤을 때 최명길은 화친을 주장하지만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워 조정을 사적으로 점거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세계관을 '소유' 할 뿐이다. 이것은 공론 영역에서 밝히 드러나고 함께 하는 공간에서 타자를 통해 인정받는다. 최명길은 벗 이시백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이오?"그러자 그는 대답한다. "나는 그저 내 칼로 적을 쓰러뜨리는 무관일 뿐이오, 어느 쪽도 아닙니다." 최명길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마치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잠시 이시백의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칼은 지키는 것에 쓰이는 힘이지 상대를 향하는 날카로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명길을 통해 우리는 '말이 통하는 세상'을 꿈꿔본다.
최명길과 다른 방향을 걷지만 수어사 이시백과 같이 무언가를 '지키는' 사람이 또 하나 있다. 최명길이 추구한 세계관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인 예조판서 김상헌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을 통해 약속을 지키려 한다. 김상헌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송파강나루에서 길을 안내해준 노인을 죽인다. 그 이유는 그가 김상헌과 조선의 왕에게 얼음길을 가르쳐 준 것처럼 청나라 군대가 길을 물어 오거든 똑같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더불어 그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조선의 왕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에 김상헌은 약속한다. 살던 터를 떠나 남한산성으로 같이 가면 식솔들을 책임지겠다고. 노인이 거절하자 김상헌은 자신의 세계와 왕을 지키려 백성에게 칼을 높이 든다. 나중에 김상헌은 자신이 죽인 노인의 손녀 '나루'가 혈혈단신으로 남한산성까지 찾아온 것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지만 그래도 삶의 길을 찾아온 여자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히고 잠자리를 준다. 보이기에 죄책감 때문이지 선행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 결론적으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여준다. 또한 김상헌에게 여자 어린아이 나루는 지켜야 할 어떤 것을 상기시켜준다. 바로 자유를 지키는 것이다. 왕은 누군가에게 굴복하지 않고 왕의 세계를 소유할 때 그리고 또 그 책임을 다 할 때,사대부는 사대부의 위치에서 조선이라는 국가의 근본 이념을 지킬 때, 백성은 국가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생을 살아갈 때 비로소 그 자유는 지켜진다. 김상헌의 세계 소유의 모습이 바로 말에 책임을 지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백성의 역할인 인물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김상헌이다. 서날쇠가 성채 위 병사들이 추위에 떨 때 자신의 요청에 따라 쌀가마니를 올려주었던 김상헌을 기억하고 병사들의 병장기를 고치는 문제를 의논하러 찾아온다. 그때 서날쇠는 "대감마님은 들어주실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전의 것들도 모두 주상전하의 은덕이라며 말을 회피하지만 결국 백성의 요청을 듣고 약속을 지킨다. 이는 서날쇠가 벼슬아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까지 김상헌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이는 그래도 '책임'을 지는 김상헌과의 인간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신뢰일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책임을 회피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가? 누군가가 회복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옷을 벗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책임을 지는 것인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해결의 실마리 조차 없다. 물론 김상헌도 영화 마지막에 조선의 왕이 청에 굴복했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죽음을 맞이 한다. 그러나 자신이 약속했던 혹은 그것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방편은 마련해놓고서 운명을 다하는 태도, 명에 대한 군신의 의리를 지키며 성리학의 근본이념으로서의 조선이라는 세계를 소유했던 한 인간은 책임을 다하자 존재를 스스로 멸한다. 책임을 지려면 죽음을 수반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뱉은 말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만약 누군가의 무거운 인생 자체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짊어지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언제부터 책임을 지는 사회가 우리의 '이상'이 되어 버린 것일까? 한나 아렌트의 말로 책임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위대한 사람들은 현재의 자기 모습으로 판단받는다.통속적 대중만이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과거의 행했던 것으로부터 자부심을 얻으려 한다" (p314)
IV. 결론 <전염병 사태와 전쟁>
우리는 코로나라는 초유의 전염병 사태로 인하여 요즘 직접 만나는 것이 어려워진 세상에 살고 있다.수어사와 최명길처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일조차 쉽지는 않다. 비대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스마트 기기 일 것이다.언뜻 보면 이런 위기 상황에 인터넷 강국인 대한민국의 기술력이 돋보이는 것 같지만 여러 방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마치 직접 소통하고, 무언가 교류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적 관점으로 보자면 마치 이러한 과학 기술이 우리에게 엄청난 기술로 발전한 공론 영역의 현장을 나타내 주는 것 같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아무리 화상회의 어플을 통하여 말을 주고받으며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 이미 인터넷 상에는 비대면 전문가들이 넘쳐난다.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비대면의 방식을 택한 비전문가들이나 혹은 가까운 사람의 것들을 취사선택하는 이유는 이미 일상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비대면 기술은 단지 상황에 따른 우리가 도구로 선택한 것일 뿐이지 그것이 온전히 일상의 세계를 대체할 수 없고 실제로 그것은 '말이 통하는 세상' 이 아니다. 그리고 직접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이 아니기에 타자와의 관계에 따른 '책임'이라는 가치가 불분명해지는 것이다.
남한산성의 배경인 ‘전쟁’ 또한 팬데믹(Pandemic)같이 인간의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염병과 전쟁은 언제나 그런 면이 있었다. 처음 맞이하여 일상성을 없애버린 것들을 통해 인간은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의 삶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개인의 노력, 전염병의 상황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위생에 힘쓰며 전쟁의 상황에서는 국가에 협력하거나 아니라면 당시 주도권을 지는 세력에 최대한 협조하면서 개인적인 삶을 이어나가야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 일시적이고 일차적인 차원의 해결이지 ‘다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공론의 영역이 필요하다. 많은 것들이 대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야말로 잠시 우리를 전염병이나 전쟁의 고난 속에서 벗어나게 해 줄 뿐이다.위기상황에서 어떤 작은 상자 안에 들어가 숨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또는 집안에 오물이 있다고 그것을 이불로 덮어 보이지 않게 한다고 해도 흘러나오는 악취를 해결할 수 없다. 보기 싫은 면을 들추어보아야 하고 그래서 치울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구들을 조금 더 능동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공론의 영역에서 방향을 설정하고 또 치열하게 토론하며 현재의 시간에서는 미완 일지는 모르나 점차 단단하게 만들어갈 공공의 정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때 공론의 영역에서 이야기하는 우리들의 또는 위정자들의 태도가 최명길과 김상헌 같이 각자의 이상을 위해 말을 하되 서로를 존중하고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알며,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것에는 여지없이 협력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동시에 ‘코로나가 주는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개인적인 욕구의 충족이나 무한한 자본의 흐름 속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얼마나 왜곡해서 사용해 왔는가? 이것을 돌아볼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전염병이나 전쟁 같은 우리가 열심히 만들었던 세계를 무너뜨리면 사람들은 이제 사회적 약속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란 희망을 버리고 냉소적이 되며 점차 개인주의로 치닫는다. 이것은 전부 그러한 메시지를 불명확한 근거를 통해 잘못 해석하는 것에서 온다. 무언가 해석하는데 그것이 정확한 뜻을 가지려면 개인으로는 전혀 할 수 없는 일이다. 첫째, 공간적인 공론의 영역이 필요하고 둘째, 자신의 세계관은 가진 수많은 타자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각자의 세계를 편견 없이 나눌 수 있는 ‘인식의 대전환’ 이 필요하다. 남한산성에서의 항전은 위기의 상황에서 비록 청에게 항복하는 형태로 끝났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최명길, 김상헌 그리고 서날쇠의 말과 행위들이 있었고 결과만 그것은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끝난 것 같지만 겨울 추위가 살을 에는 것 같은 고난의 날을 지나는 영화 속 ‘살아남은 자들’ 에게 그리고 전염병 사태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희망을 선물한다.
“그 해 봄, 다시 민들레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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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 인간의 조건 - 한나아렌트 (이진우 역) / 한길사 / 2019
남한산성 - 김훈 / 학고재 / 2017 (100쇄 기념)
잠시 멈춘 세계앞에서 - 이영석/ 푸른역사 / 2020
참고영상 : 영화 '남한산성' / 이병헌, 박해일, 김윤석 주연 / 2017
첫댓글 졸업논문으로 제출해도 될 정도네요. "전염병이나 전쟁 같은 우리가 열심히 만들었던 세계를 무너뜨리면 사람들은 이제 사회적 약속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란 희망을 버리고 냉소적이 되며 점차 개인주의로 치닫는다."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해요. 지금은 지쳐 있지만 K-방역 성공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전시상황"이라는 용어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집단주의적 사고를 하게 만들 뿐 아니라, 개인의 권리를 빼앗는 극단적 상황을 정당화하는 상징이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