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 쳇바퀴를 도는 하루가 또 지나간다. 쳇바퀴 위의 다람쥐는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지 못한 채 부지런히
달리지만, 그 모습이 꼭 우리의 하루와 닮았다. 큰 사건도, 눈에 띄는 변화도 없이 흘러가는 날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했으니, 별 탈 없이 지나가는 하루는 분명 복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건
왜일까.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쌓이면, 그 위에 내일이 또 얹힐 테니 말이다.
사전 속의 하루는 명확하다. 한 낮과 한 밤이 지나가는 동안, 혹은 자정에서 다음 자정까지. 시계와 달력은 하루
를 공평하게 나눠 주지만, 체감되는 하루의 길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바쁠 때의 하루는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기다림 속의 하루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대에 묶여 산다.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정오를 정하고, 그 정오에 맞춰 점심을 먹고 회의를 하고 퇴근을 한다.
하지만 바다 위의 하루는 조금 다르다. 배에서는 정오에서 다음 정오까지가 하루다. 해가 머리 위를 지나는 그 순간
을 기준으로 시간을 새로 고쳐 쓴다. 동쪽으로 가면 하루가 짧아지고, 서쪽으로 가면 길어진다. 극지방에 이르면 낮
과 밤의 질서마저 무너진다. 백야와 극야 속에서는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그럼에도 배는 하루를 기록
한다. 눈 레포트(Noon Report). 하룻동안의 위치와 거리, 연료 소모량과 잔량, 보이지 않는 슬립까지 꼼꼼히 적어
회사에 보낸다.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도 하루는 숫자와 문장으로 남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저마다의 눈 레포트를 쓰며 산다. 누군가는 매일 밤 일기를 쓰고, 누군가는 짧은 메모를 남긴다.
나는 탁상일지에 그날의 흔적을 적는 편이다.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오늘 걸은 걸음 수.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몇 번이고 적어 넣다 보면, 별일 없던 하루도 어느새 칸을 채운다. 스마트
폰에 모든 것을 담는 젊은 세대와 달리, 종이에 남은 잉크는 손의 온기를 오래 붙잡아 둔다.
백지로 넘어가는 날이 있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무 일도 없었던 날에도 걷기는 했다. 숨은 쉬었고, 밥은 먹었고,
해는 떴다 졌다. 배의 눈 레포트에 파고 없는 잔잔한 바다라 적히듯, 나의 하루에도 “특이사항 없음”이라 적히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 문장 하나가 사실은 가장 어려운 기록일지도 모른다. 탈 없이 지나갔다는 말 안에는 수많은 균형과
절제가 숨어 있으니까.
그래서 가끔 상상해 본다. 만약 내 하루에도 눈 레포트가 있다면 무엇을 적을까. 위치는 ‘집과 일터 사이’, 항주거리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 연료 소모량은 ‘하루 동안 쓴 기운과 마음’, 잔량은 ‘내일을 버틸 여유’. 그리고 맨
아래 비고란에 이렇게 적을지도 모른다. “큰 변화는 없었으나, 무사히 항해함.”
쳇바퀴 도는 듯한 하루도 이렇게 기록하면 조금은 다른 얼굴을 갖는다. 발전을 향한 각오가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늘의 눈 레포트를 성실히 쓰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항해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