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피아노가 아픈 피아노에게
김승희
피아노, 좀 가벼우면 좋겠다
피아노는 무거워서 이사 올 때 한번 자리를 잡으면
언제나 그 자리에 놓여 있다
거실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기보다 피아노는 거기 버림받았다고 할 수 있다
피아노는 이미 음악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
피아노 치던 아름다운 딸은 미국에 간 지 오래,
국토의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우리 허리를 딱 끊어놓고 있는 38선,
피아노는 그렇게 거실의 중심에 놓여
이쪽과 저쪽을 갈라놓는다,
피아노 뚜껑 위에는 가족사진, 책 , 세금 고지서와 우편물들.
커피 잔. 바늘 쌈지, 실, 가위, 다리미, 박카스 병, 안마기, 물티슈,혈압기,
주로 그런 생활의 잡동사니들이 뒤섞여
무슨 무게가 무언가를 누르고 있다
피아노, 피아노는 음악을 상실한 지 오래
뇌 전두엽, 전(前)전두엽, 가슴, 철사 줄에 걸린 세로토닌,
실신한 금붕어같이 하얀 배를 뒤집고 가라앉는 아네도니아,
조율을 안 해서 피아노는 아프고
거실도 아프고 나도 아프다
딸은 방금 생각났다는 듯 피아노 관련 문자 메시지를 가끔 보낸다
엄마, 허리 아프니까 실내 자전거도 좀 타고
피아노 뚜껑도 좀 열어줘,
하루 30분 정도, 피아노 환기를 좀 시켜줘,
제발 피아노 뚜껑 위에 구질구질한 것들 거지같이 늘어놓지 말고
화분에 물도 좀 주고
정신 좀 차려!
⸺계간 《문학과사회》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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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 1952년 光州 출생.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