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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世紀) 사가(史家)들의 새빨간 거짓말 [契丹 : 요(遼)]
2026년 05월 10일
○ 20∼21세기(世紀)에 만들어진 세계사(世界史)는, 「서세(西勢)와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에 의해 짜깁기되고, 왜곡(歪曲)되고, 자신(自身)들의 국익(國益)에 이용(利用)할 수 있도록 구색(具色)을 갖춰 조작(造作)해 만들어 놓은 것이 : 현세(現世)에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고, 통용(通用)되는 소위(所謂) 세계사(世界史)이며, 그 속의 한국사(韓國史)【조선사(朝鮮史)】다.
수많은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 옛 나라(國家)들이 이들로부터 말로 표현(表現)하기 힘든 박해(迫害)를 받고, 심지어 소멸(消滅)되어 흔적(痕迹)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중에서도 조선(朝鮮)과 조선민(朝鮮民)들은, 수만(數萬) 리(里) 강토(疆土)를 모두 빼앗기고, 민족(民族)은 여러 갈래로 찢겨 쫓겨나 흩어졌다.
그리고 암중(暗中)에서 발흥(發興)할지도 모르는 민족혼(民族魂)마저 말살(抹殺)하기 위해 「극동(極東)의 조그만 땅 반도(半島)를 할양(割讓)하고, 조선왕조(朝鮮王朝) 터전이다」라면서 「조선(朝鮮)은 그 민족(民族)이 매우 우매(愚昧)하여 스스로 자립(自立)할 수 없다. 따라서 이에 황제(皇帝) 또는 천황(天皇)의 교화(敎化)를 받아 다스릴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예(例)는 2,026년(年) 현재(現在)도 진행(進行) 중이다.
21세기(世紀) 오늘날, 세계(世界) 10위권에 들고 있는 경제력(經濟力)과 세계(世界) 5∼6위의 막강(莫强)한 군사력(軍事力)을 갖춘 대한민국(大韓民國)임에도, 그 군사력(軍事力)을 독자적(獨自的)으로 운용(運用)할 수 없다. 가장 중요(重要)한 작전권(作戰權)이 없다.
외적(外敵)의 침략(侵略)이 있어도 대한민국(大韓民國) 독자적(獨自的)으로 방어(防禦), 공격(攻擊) 및 진격(進擊)할 수 있는 기본적(基本的)인 작전권(作戰權)이 없다. 말 그대로 허수아비, 식민지(植民地)다. 아니면 뭔가?
○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필자(筆者)는 이들을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라고 칭(稱)한다.】들은 : 조선(朝鮮)의 근간지대(根幹地帶)인 요수(遼水)의 좌안(左岸) 곧 요동(遼東)을 ‘1’ 만리(萬里) 동(東)쪽으로 이동(移動)시켜 오늘날의 심양(瀋陽) 서(西)쪽 근교(近郊)를 흐르는 하천(河川)을 옛 “요수(遼水)=요하(遼河)”라고 설명(說明)한다.
이렇게 “요수(遼水)”를 이동(移動)시켜 놓고 보니 : 역사서(歷史書) 기록(記錄)을 모조리 첨삭과정(添削過程)을 거쳐야 했으나, 여러 가지 제약(制約)으로 인하여 완전무결(完全無缺)치 못한 처리(處理)로, 사서(史書)마다 지명(地名)이나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서로 다른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했다는 것을 자폭(自爆)하는 일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발견(發見)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필자(筆者)는 이들을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라고 칭(稱)한다.】들은, 그저 미친 척하며 입을 닫는다.
➥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는, 우리나라(我國)의 지리지(地理志)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말이다. 뻔뻔한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저 하거나 말거나 신경(腎經) 쓰지 않는다는 것인지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역사학자(歷史學者)라고 하면서 옛 지리지(地理志) 하나 제대로 해설(解說)하지 못한다면 : 역사학자(歷史學者)라는 단어(單語)가 무색(無色)해지는 일이다. 학자(學者)로서의 미달(未達)이요, 무책임(無責任)한 처사(處事)다.
○ 오늘은 “글란(契丹)”에 대하여 “신오대사(新五代史)•요사•자치통감(資治通鑑)•당기(唐紀)”등(等)을 중심(中心)으로 「요수(遼水)=요하(遼河)의 좌안(左岸) 땅」이 “요동(遼東)”이 되었는지에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논거(論據)로 인용(引用)하며, 설명(說明)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글란족(契丹族)”은 본래(本來) 「조선(朝鮮)의 땅(地)에서 살았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본시(本是)부터 조선(朝鮮)의 한 ‘종족(種族)=부족(部族)’이었다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 「요동요서(遼東遼西) 곧 ‘요수(遼水)=요하(遼河)’의 좌안(左岸), 우안(右岸) 모두가 조선(朝鮮)의 땅(地)이었다」라는 것이 된다.
☛ 왜 현대(現代)의 심양(瀋陽) 주변(周邊)을 흐르는 하천(河川)이 ‘요수(遼水)=요하(遼河)’로 만들어지게 된 것일까? 바로 옛 조선(朝鮮)을 심양(瀋陽) 동(東)쪽으로 몰아넣기 위해 만들어진 교묘(巧妙)한 수법(手法)이다.
그것은 바로 “글란(契丹)의 본거지(本據地)가 요택지중(遼澤之中)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곧 21세기(世紀) 진황도(秦皇島)【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산해관(山海關)=유관(楡關)’】로부터 북(北)쪽으로 1,100리(里)쯤 되는 곳에 ‘요하(遼河)’ 상류(上流)인 “요택(遼澤)”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조건(條件)에 맞추려고 : 심양(瀋陽) 서(西)쪽 근교(近郊)를 흐르는 “요수(遼水)=요하(遼河)”【태자하(太子河)라고도 한다】의 상류(上流)의 ‘늪’지대(地帶)를 “요택(遼澤)”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남(南)쪽 1,100리(里) 발해(渤海) 바닷가에 “진황도(秦皇島)”라는 지명(地名)을 만들어 놓고 : 이곳이 옛 “산해관(山海關)=유관(楡關)=유관(渝關)”이라고 만들어 버린 것이다.
➤ 이렇게 만들어 놓고 보니, 기가 막힌 이야기가 연출(演出)되었는데 :
➊ 〈옛 조선(朝鮮)이 최고(最高)로 강력(强力)한 군주(君主)가 재위(在位)할 때 : 최(最) 서(西)쪽으로 진격(進擊)했던 곳이 「요서(遼西)의 유성(柳城), 북평(北平), 산서성(山西省) 병주(幷州)까지를 한계(限界)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➋ 〈이에 맞게 「옛 조선(朝鮮)의 강토(疆土)는 오로지 심양(瀋陽)을 포함(包含)한 그 동(東)쪽으로 한정(限定)되게 만들어진 것이다.」〉
➌ 〈이로써 「옛 조선(朝鮮)의 강토(疆土)를 표현(表現)했던 몇 만리(萬里), 수만리(數萬里), 일만(一萬) 여리(餘里)는 사라지게 되었고」, 그 숫자를 대신(代身)하게 된 것이 「동서(東西) 2 천리(千里), 남북(南北) 4 천리(千里)였다」〉
➍ 〈그러나 이런 것마저 사라지게 되었고, 「20세기 초(初)부터 등장(登場)한 제국주의적(帝國主義的) 실증사학자(實證史學者)들에 의해 만들어진 “반도(半島) 조선(朝鮮)”은, 말 그대로 동서(東西) ‘5’ 백(數百) 리(里)에 남북(南北) ‘3’ 천리(千里)로 찌그러 들고」, 「이마저도 그대로 놔둘 수 없다는 서세(西勢)의 압력(壓力)과 음모(陰謀)에 의해 남북(南北)으로 갈라져 남(南)과 북(北)이 각각(各各) 절반(折半) 땅을 갖게 되었다.」〉
➎ 〈이렇게 흘러온 ‘역사전개과정(歷史展開過程)’에 대해 남 탓을 할 필요(必要)는 없다. 시시때때로 변화(變化)와 개혁(改革)이 요구(要求)되었으나 우둔(愚鈍)하고, 무지몽매(無知蒙昧)하며, 보수적(保守的) 사회경제(社會經濟) 체제(體制)를 무조건(無條件) 수성(守城)하려는 어리석은 군주(君主), 부정부패(不正腐敗)의 만연(蔓延), 권력투쟁(權力鬪爭)으로 인한 국가권력(國家權力)의 누수(漏水), 노예(奴隸)와 천민(賤民), 억눌려 살아왔던 번인(蕃人)들의 반기(叛起) 등에 의한 약화(弱化)는, 결국(結局) 역사(歷史) 무대(舞臺)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누굴 탓할 필요(必要)는 없다. 여기에는 많은 조선인(朝鮮人)들이 반기(叛起)를 들고, 적(敵)의 향도(嚮導)가 되고, 하수인(下手人)이 되어 국가(國家)를, 나라를, 민족(民族)을 몇 푼에 팔아먹었으니 말이다. 누굴 탓할까? 바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일부(一部) 무지몽매(無知蒙昧)했던 선조(先祖)들께서 행(行)한 일이다.
일부(一部) 독자(讀者)께서는 심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하시겠지만 :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가정(假定)이나 추측(推測)할 수 없는 현실(現實)이며, 이는 당시(當時)의 사회상(社會相)이 이를 대변(代辨)해 주고 있다.
○ 그렇다면 「본래(本來)의 글란(契丹) 터전은 어디였을까? 옛 조선(朝鮮) 땅이다」라고 하였다. 본론(本論)으로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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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오대사(新五代史) 글란(契丹) 편(篇)
《雲契丹之先,常役回紇,後背之走黑車子,始學作車帳。: 글란(契丹)의 선조(先祖)들에 대해 전하는 바로는, 회흘(回紇)의 노역(勞役)을 담당하였는데, 뒤에 배신하고 흑거자(黑車子)로 도주(逃走)하여, 처음으로 수레, 장막을 만드는 것을 배웠다. 又北,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河,夏秋冰厚二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 또 북(北)쪽에, 우제돌궐(牛蹄突厥)이 있는데, 사람들의 몸(身體)이 소(牛) 다리와 같았는데, 그 땅은 아주 추운 곳으로, 호하(瓠河)라는 물이 있는데, 여름(夏)과 가을(秋)에도 얼음 두께가 2척(尺)이나 되고, 봄(春)과 겨울(冬)에는 더 철저(徹底)하게 얼음이 얼어, 항상 그릇에 얼음을 넣고 데워 물을 마신다.》라고 하였으니… …,
➤ 이들 “글란족(契丹族)”들은, 회흘(回紇)에 복속(服屬)되어 노역(勞役)을 담당(擔當), 혹사(酷使)당한 부족(部族)이었는데, 견디지 못하고 그 북(北)쪽에 있던 흑거자(黑車子) 땅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이곳 땅에는 “호하(瓠河)”라는 하천(河川)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곳 날씨가 얼마나 추웠던지 하추(夏秋)에도 얼음이 꽁꽁 얼어있는 땅이었다”라는 뜻이며, 이들이 있었다는 곳은 “회흘(回紇)에 복속(服屬)되었다”라는 것으로 보면 : 「신강성(新疆省)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 우랄산맥(Ural, 山脈) 서(西)쪽의 북방지대(北方地帶)로 좁혀진다.」
왜냐하면 이곳에 옛 회흘(回紇)의 여러 종족(種族)과 부족(部族)들이 산재(散在)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동북(東北)’ 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다.】
이것은 “회흘(回紇)”의 여러 부족(部族)과 종족(種族)의 분포(分包)와 맞물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 즉(卽), 회흘(回紇)로 대표(代表)되는 종족(種族), 부족(部族)은 : 「신강성(新疆省)+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흑해(黑海)의 최(最) 북방지대(北方地帶)에 분포(分包)하고 있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서(史書)를 보면 : 누구든지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 여기서 중요(重要)하고 조선사(朝鮮史)와 직접적(直接的)으로 관계(關係)되는 하천(河川)이 바로 『호하(瓠河)=호로하(瓠盧河)』다. 꼭 기억(記憶)해야 할 하천(河川)의 이름이다.
(2) 資治通鑑 卷202 唐 紀18 / 高宗, 下 / 咸亨 四年【AD 673年】
《閏五月, 燕山道總管, 右領軍大將軍李謹行大破高麗叛者於瓠蘆河之西,俘獲數千人,餘衆皆奔新羅。: 당(唐) 고종(高宗) 함형(咸亨) 4년(年)【AD 673年】 : 윤(閏) 5월(月), 연산도총관(燕山道摠管)이며,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인 이근행(李謹行)이 고려(高麗) 반군(叛軍)을 호로河(瓠蘆河) 서(西)쪽에서 크게 깨뜨리고, 수천인(數千人)을 사로잡자, 나머지 무리는 신라(新羅)로 도주(逃走)해 버렸다. 【注 : 「胡 嶠 曰: 黑 車 子 之 北, 有 牛 蹄 突 厥, 人 身 牛 足。其 地 尤 寒, 水 曰 瓠 蘆 河, 夏 秋 冰 厚 二 尺, 秋 冬 冰 徹 底, 常 燒 器 銷 冰, 乃 得 飲。: 호교(胡嶠)가 이르기를 : 흑거자(黑車子)의 북(北)쪽에, 우제돌궐(牛蹄突厥)이 있는데, 사람들의 몸이 소(牛) 다리와 같다. 그 땅은 심히 추운 곳이다. 물은 호로하(瓠蘆河)라고 하는데, 여름(夏)과 가을(秋)에도 얼음 두께가 2척이나 되고, 가을과 겨울에는 더 철저하게 얼음이 얼어, 항상 얼음 그릇에 널고 불에 데워, 그리고 물을 마신다.」 「余 按 唐 書 劉 仁 軌 傳, 此 瓠 蘆 河 當 在 高 麗 南 界, 新 羅 七 重 城 之 北。: 당서(唐書) 유인궤(劉仁軌) 전(傳)을 보면, 이 호로하(瓠蘆河)는 고려(高麗)의 남계(南界)에 있는데, 신라(新羅) 칠중성(七重城) 북(北)쪽에 있다.」라고 하였다.】時謹行妻劉氏留伐奴城,高麗引靺鞨攻之,劉氏擐甲帥衆守城, 久之, 虜退。: 이때 이근행(李謹行)의 처(妻) 유씨(劉氏)는 벌노성(伐奴城)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고려(高麗)가 말갈(靺鞨)을 끌어들여 성(城)을 공격하자, 이근행(李謹行)의 처(妻) 유씨(劉氏)는 투구와 갑옷을 걸치고(擐) 성(城)을 지키자, 오랑캐【고구려(高句驪) 군(軍)과 말갈(靺鞨) 군(軍)을 말한다】가 퇴각(退却)했다. 上嘉其功,封燕國夫人。謹行,靺鞨人突地稽之子也,突地稽見一百八十九卷高祖武德四年。武力絕人, 為衆夷所憚. : 황제(皇帝) 그가 공적(功績)에 기뻐하며, 연국부인(燕國夫人)에 봉했다. 이근행(李謹行)은, 말갈(靺鞨) 사람 돌지계(突地稽)의 아들로, 돌지계(突地稽)는 [189권 고조(高祖) 무덕(武德) 4년(年)에 보인다.] 무력(武力)이 뛰어난 자로, 오랑캐 무리들을 떨게 했다.》라고 하였다.
➥ ‘AD 673年’이면 : 고구려(高句驪)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이 점령(占領)되고 항복(降服)한 때가 AD 668年이므로, 망후(亡後) 5년(年) 뒤에도 이곳저곳에서 고구려(高句驪) 부흥군(復興郡)들이 말갈군(靺鞨軍)과 함께 궐기(蹶起)하여 당군(唐軍)을 공격(攻擊)했다는 것인데… …사실(事實) 이런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고구려(高句驪) 강토(疆土)가 반도(半島)였다’라는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이 “헛소리였다”』라는 것을 확인(確認), 증거(證據)해 주고 있는 기록(記錄)이다.
호교(胡嶠)의 말과 기록(記錄)을 인용(引用)하고 있듯이 : 【注 : 「胡 嶠 曰: 黑 車 子 之 北, 有 牛 蹄 突 厥, 人 身 牛 足。其 地 尤 寒, 水 曰 瓠 蘆 河, 夏 秋 冰 厚 二 尺, 秋 冬 冰 徹 底, 常 燒 器 銷 冰, 乃 得 飲。: 호교(胡嶠)가 이르기를 : 흑거자(黑車子)의 북(北)쪽에, 우제돌궐(牛蹄突厥)이 있는데, 사람들의 몸이 소(牛) 다리와 같다. 그 땅은 심히 추운 곳이다. 물은 호로하(瓠蘆河)라고 하는데, 여름(夏)과 가을(秋)에도 얼음 두께가 2척이나 되고, 가을과 겨울에는 더 철저하게 얼음이 얼어, 항상 얼음 그릇에 널고 불에 데워, 그리고 물을 마신다.」 「余 按 唐 書 劉 仁 軌 傳, 此 瓠 蘆 河 當 在 高 麗 南 界, 新 羅 七 重 城 之 北。: 당서(唐書) 유인궤(劉仁軌) 전(傳)을 보면, 이 호로하(瓠蘆河)는 고려(高麗)의 남계(南界)에 있는데, 신라(新羅) 칠중성(七重城) 북(北)쪽에 있다.」라고 하였다.】도대체 이러한 기후대(氣候帶)를 가지고 있는 곳이 어딘가?
➥ 최소한(最小限)도, 「흑해(黑海)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 및 ‘외몽고(外蒙古)와 러시아(Russia)를 경계(京契)하는 당노산맥(唐努山脈) 북방지대(北方地帶)’쯤 되지 않을까?」 ‘동토(凍土)의 땅’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학계(史學界)가 얼마나 폐쇄적(閉鎖的)인 집단(集團)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3) 新唐書 卷 108 列傳 第 33 劉仁軌
《咸亨五年, 為雞林道大總管, 東伐新羅。 仁軌率兵絕瓠蘆河, 攻大鎮七重城, 破之. : 함형(咸亨) 5年, [유인쾌(劉仁軌)] 는, 계림도대총관(雞林道大總管)이 되어 동(東)쪽의 신라(新羅)를 쳤다. 유인궤(劉仁軌)는 병사(兵士)들을 이끌고 호로하(瓠盧河)를 가로막고, 큰진(鎭) 칠중성(七重城)을 공격(攻擊), 깨뜨렸다.》라고 하였는데… …,
이때가 ‘함형(咸亨) 5年’이라고 했으니, AD 674년 【文武王 14】이며,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AD 675년(年) 2월(月)’이라고 하였다. 【文武王 15, 唐 高宗 上元 2, 675)】
이때 당(當)은 평양성(平壤城)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다스렸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유인궤(劉仁軌)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서 남벌(南伐)하지 않고, 서해(西海)를 건너왔다는 것일까? 「도대체 동벌(東伐)이라는 의미(意味)가 뭐냐?」 하는 것이다.
평양성(平壤城)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 당(唐) 고종(高宗) 【唐高宗總章元年(668年), 九月,唐朝攻滅高句麗後,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轄區最大至鴨綠江下游兩岸及遼河以東地區。不過由於羅唐戰爭期間新羅的不斷蠶食,唐朝放棄大同江以南高句麗舊地,676年都護府駐地遷移到遼東城】가 있었음에도 남(南)쪽으로 군사(軍士)를 보내어 신라(新羅)를 친 것이 아니라, 본토(本土)에서 수군(水軍)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 동(東)쪽의 신라(新羅)를 쳤다는 이야긴가?
동벌(東伐)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4) 舊唐書 列傳 第 三十四, 劉仁軌
《鹹亨五年,為雞林道大總管,東伐新羅。仁軌率兵徑度瓠盧河,破其北方大鎮七重城。: 함형(咸亨) 5년에, 계림도대총관(雞林道大總管)이 되어 동(東)쪽의 신라(新羅)를 쳤다. 유인궤(劉仁軌)는 병사(兵士)들을 지름길로 인솔하여 호로하(瓠盧河)를 건너, 북방(北方)의 대진(大鎭) 칠중성(七重城)을 깨뜨렸다.》라고 하였다.
➥ 위의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를 보면 : 북(北)쪽에서 남(南)쪽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攻擊)하여 깨뜨렸다는 것이니, 동벌(東伐)이 아니라 남벌(南伐)임이 증명(證明)된다. 그러함에도 왜 “동벌(東伐)”이라고 기록(記錄)한 것일까?
「‘당(唐)’나라는 서(西)쪽에 있었고, ‘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는 동(東)쪽에 있었다」라는 것이고, 「그것은 바다(海)를 사이에 두고 대치(對峙)했던 것이 아니라 : 육지(陸地)와 하천(河川)을 경계(境界)로 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이러한 사실(史實)은 : 「북로(北虜)가 수십만(數十萬) 기병병단(騎兵兵團)을 출정(出征)시켜 몇 차례에 걸쳐 백제(百濟)를 침략(侵略), 백제(百濟) 땅 안으로 들어갔다가, 매복(埋伏)한 백제군(百濟軍)에게 궤멸(潰滅)되었다」라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과 함께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임이 증명(證明)된다.
이러한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을 “오류(誤謬) 또는 기록(記錄)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증거(證據)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을 고의적(故意的) 외면(外面)한 째 :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외쳐대는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각성(覺醒)에, 각성(覺醒)을 더 해야 한다.
(5) 遼 史 卷 三 十 七 / 志 第 七 地 理 志 一 : 《遼 國 其 先 曰 契 丹, 本 鮮 卑 之 地,居 遼 澤 中 : 去 榆 關 一 千 一 百 三 十 里, 去 幽 州 又 七 百 一 十 四 里。 : 요(遼) 나라의 선조(先祖)는 글란(契丹)이라고 하는데, 본래(本來) 선비(鮮卑)의 땅에 있었는데, 요택(遼澤) 가운데에 살았다. 유관(楡關)이 1,130리(里) 떨어져 있고, 유주(幽州) 또 714리(里)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으며,
(6) 遼史 卷 49 志 第 18 [脫 脫 等] 禮 志 一 古 儀 : 《遼本朝鮮故壤,箕子八條之教,流風遺俗,蓋有存者. :요(遼)는 본래 조선(朝鮮)의 옛 땅에 있었는데, 기자(箕子)의 8조의 가르침을 유풍(流風) 유속(遺俗)으로, 모두를 간직하였다.》라고 하였다.
➥ 「요(遼)」는 「본래(本來) 동이(東夷), 구이(九夷)의 하나로, 옛 조선(朝鮮)의 땅에 있었으며, 후대(後代)까지도 기자(箕子) 8조(條)의 가르침을 풍속(風俗)으로 간직한 나라였다」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 기록(記錄)하여 후세(後世)에 전(傳)해주고 있다.
➥ 또한 동사(東史)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도 이를 역사적(歷史的) 사실(史實)로 기록(記錄)해 놓고 있는 것이다.
필자(筆者)는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 여러분’들에게 반문(反問)하고 싶다.
➊ 「“도대체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 : 어디가 선비(鮮卑) 땅이며, 요택(遼澤)이며, 유관(楡關)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유주(幽州)는 어디, 어느 땅에 있는 것이냐?」라고 말이다.
➋ 「산봉우리가 삐쭉삐쭉하게 솟아있는 ‘림유산(臨楡山)=림유산(臨渝山)’은, 그 아래를 흐르는 ‘림유하(臨楡河)=림유하(臨渝河)’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또 ‘유관(楡關)=유관(渝關)’은 어디에 있는 어떤 관문(關門)을 말하는 건가?
【특히 ‘유관(楡關)’은, 바로 이곳의 험준(險峻)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이용(利用)하여 만들어진 관문(關門)이란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것인데 말이다.】
☛ 「조선왕조(朝鮮王朝)와 반도(半島)는 직접적(直接的)인 통치구역(統治區域)이 아니었음은, 허수아비 왕조(王朝) 대한제국(大韓帝國)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초기에 이미 다 밝혀진 것이 아니었나!」
5,000년을 이어온 영광(榮光)스러운 왕조(王朝), 단일민족(單一民族)의 왕조(王朝)로 5,000년(年)을 이어왔다고 하면서 : 90%의 문맹율(文盲率)에, 지명(地名)도, 산(山)의 이름도, 하천(河川)의 이름도 모두가 추정(推定)이요, 추측(推測)이며, 미상(未詳)으로 마무리한다는 것은 : 대부분(大部分)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만들었다는 사실(事實)이 이를 증거(證據)하고 있다. 무엇으로 5,000년(年),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증명(證明)한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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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관(楡關)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山海關 : 山海關位於中華人民共和國河北省秦皇島市山海關區與遼寧省葫蘆島市綏中縣的邊界附近,又名渝關、臨閭關、榆關。山海關位於燕山和渤海之間,是明長城最東端的關隘,故而被稱為「天下第一關」。此處早在戰國時期就曾修築有長城,明洪武十四年(1381年)修築現有關隘,自此山海關成為地理分界,該關口以東區域被稱為「關外」。至崇禎年間修建有羅城、衛城和海防城等附屬建築。清朝乾隆年間成為永平府所轄的臨榆縣城。清末時為加強海防而修建多處炮台。中略。》
➊ 위의 현재(現在)의 “중어(中語) 위키백과”에서 「유관(楡關)」에 대한 설명(說明)이다. 다른 사족(蛇足)은 불필요(不必要)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유관(楡關)은, 산해관(山海關)이요, 또 유(투)관(渝關), 림려관(臨閭關)이다』라고 한 것이다.
➋ 또한 「산해관(山海關)은, 유관(楡關)이며, 림유관(臨楡關)이요, 림유관(臨渝關)」이라고도 하며, ➤ 이곳에는 봉우리가 삐쭉삐쭉 솟아난 림유산(臨楡山)【一千餘仞, 海拔高度 2,000m 以上】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림유하(臨楡河)=림유하(臨渝河)’가 흐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장 중요(重要)한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찾아볼 수가 없다. 왜곡(歪曲), 조작(造作)했다는 확실(確實)한 증거(證據)다.
☛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 ➤ 「림유산(臨楡山), ‘림유하(臨楡河)=림유하(臨渝河)’」가 있는 곳에, 「“유관(楡關)=유관(渝關)=림유관(臨楡關)=림유관(臨渝關)=림려관(臨閭關)”이 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요사(遼史)… …「遼史 卷 四十 / 志第 十 / 南京道」로 이어진다. 즉(卽),
(7)- 1) 「遼史 卷 四十 / 志第 十 / 南京道」 ; 《灤州,永安軍,中,刺史。本古黃洛城。灤河環繞,在盧龍山南。齊桓公伐山戎,見山神俞鬼,即此。秦為右北平。漢為石城縣,後名海陽縣,漢水為公孫度所有。晉以後屈遼西。石晉割地,在平川之境。太祖以俘戶置。灤州負山帶河,為朔漢形勝之地。有扶蘇泉,甚甘美,秦太子扶蘇北築長城嘗駐此;臨榆山,峰巒崛起,高千餘仞,下臨渝河。統縣三 : 義豐縣。馬城縣。石城縣以下中略。》
➥ 이곳에서 말하는 땅은 : 〈『진(秦) 나라의 태자(太子) “부소(扶蘇)”가 북(北)쪽 변경(邊境) 땅에 “장성(長城)”을 쌓는 것을 감독(監督)하기 위해 머무르고 있었던 곳이며, 부소천(扶蘇泉)의 물은 감미(甘味)로웠다고 전(傳)하며, 이곳에 봉우리가 삐쭉삐쭉하게 솟아난 높이가 ‘1’ 천(千) 여인(餘仞)【높이가 2,000 餘 미터에 달한다】에 달하는 림유산(臨楡山)이 있다』라고 한 땅을 말하고 있다.〉
또 하나는, 〈이곳 땅에 「한수(漢水)가 흐르고 있었는데, 이 유역(流域)을 공손도(公孫度)가 소유하고 있었다」라고 한 곳이다.〉
위에서 말한 두 조건(條件)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충족(充足)하는 땅에 “유관(楡關)”이 있어야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 이곳에 림유산(臨楡山)이 있고, 그 아래를 흐르는 림유하(臨楡河)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진황도(秦皇島) 및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 그 어디에도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가지고 있는 땅이 없다. ➤ 곧 ‘진황도(秦皇島)의 산해관(山海關)’은 그저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산해관(山海關)일 뿐, “옛 유관(楡關)이 될 수 없다”라는 뜻이다.
(7) -2)「讀史方輿紀要 卷 十八 / 北直 九」/ 契丹 : 〈契丹東夷也。《晉書 :契丹本東胡別種。其先為匈奴所破,保鮮卑山。: 글란(契丹)은 동이(東夷)다. 《진서(晉書)에 글란(契丹)은 본래(本來) 동호(東胡)의 별종(別種)으로 그 선대(先代)가 흉노(匈奴)에게 패배(敗北)하고, 선비산(鮮卑山)에서 부족(部族)을 보존(保存)하였다.》하였고, 《唐史:契丹本鮮卑地,居遼澤中,潢水南岸,南距渝關千一百三十裏,自渝關去幽州又七百一十四裏。: 당사(唐史)에 : 글란(契丹)은 본래(本來) 선비(鮮肥)의 땅인, 요택(遼澤) 가운데에서 살았는데, 황수(潢水) 남안(南岸)으로, 남(南)쪽으로 ‘유관(渝關)=투관(渝關)’까지 1,130리(里) 떨어져 있으며, ‘유관(渝關)=투관(渝關)’에서 유주(幽州)는 또 714리(里)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는데, 【억지(抑止)로, 사서(史書)를 첨삭(添削)하다 보니… …결정적(決定的)인 실수(失手)를 한 것이다.」 왜? 아래의 글에서 하나하나로 밝혀보기로 하자.】
➌ 위의 고전(古典) 원문(原文)을 보면 : 「글란(契丹)은 동이(東夷)다」라고 간단명료(簡單明瞭)하게 설명(說明)하고 있다. 「곧 동이(東夷)였고, 구이(九夷)중의 하나였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요사(遼史)를 저술(著述)한 분들은 “요(遼)는 본래(本來) 글란(契丹)으로 조선(朝鮮)의 옛 땅(故壤)에 있었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글란(契丹)은, 염제(炎帝)의 후예(後裔)라고 하였으니, 조선(朝鮮)의 속국(屬國)이었다는 뜻과 같다. 왜냐하면 염제(炎帝)와의 전쟁(戰爭)에서 승리(勝利)한 황제(黃帝)의 후예(後裔)들이기 때문이다. 황제(皇帝) 직계(直系) 자손(子孫)이 고구려(高句驪), 신라(新羅)의 후손(後孫)이며, 성씨(姓氏)이기 때문이다. 이걸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학자(學者)는 없다.】
➍ 위의 글 “(7)- 1)”과 “(7)- 2)”를 보면 : 눈에 확 들어오는 관(關)의 이름, 지명(地名)과 산(山)의 이름, 하천(河川)의 이름이 있다. 바로 『臨榆山 : 臨渝河 = 臨楡關 : 臨渝關 = 楡關 : 渝關』이다. 바로 오늘날의 진황도(秦皇島)에 있다는 “산해관(山海關)=유관(楡關)”을 말한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
「위의 글 ’(7)- 1)‘의 「요지(遼志) 남경도(南京道) 란주(灤州)」편(篇)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란주(灤州)‘에 있었으며, ➥ 이곳에 “림유산(臨榆山) : 림유하(臨渝河)”가 있는데, 관문(關門)의 이름이 이곳에 있는 “림유산(臨榆山) : 림유하(臨渝河)”의 이름을 취하여 “림유관(臨楡關) : 림유관(臨渝關)”이라 하였다면, ➥ 바로 이곳 가까운 곳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인 “림유관(臨楡關) : 림유관(臨渝關)”이 있었다는 뜻이다.
➎ “림유관(臨楡關) : 림유관(臨渝關)”이란 관문(關門)의 이름을 “유관(楡關) : 유관(渝關)”이라고도 부른다는 뜻이 된다. 이곳의 “림유관(臨楡關)=림유관(臨渝關)=유관(楡關)=유관(渝關)”은 : 〈바닷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 내륙(內陸) 깊숙한 곳 산봉우리가 삐쭉삐쭉 솟아있는 2,000m의 험(險)한 산(山)【림유산(臨楡山)】과 그 아래를 흐르는 하천(河川)【림유하(臨楡河)】주변(周邊)에 있었다〉라는 것이 위의 고전(古典) 원문(原文)에서 말해주고 있는 사실(史實)이다.
➏ 위의 글 “(7)- 1)”의 “요지(遼志) 남경도(南京道) 난주(灤州)” 편(篇)과 “(7)- 2)”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 ➥➥➥ 〈“산해관(山海關)=유관(楡關)=유관(渝關)=림유관(臨楡關)”은 바로 이곳 「난주(灤州) 땅에 있는, “림유산(臨楡山)과 림유하(臨楡河)가 흐르고 있는 험준(險峻)한 계곡(溪谷)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라는 뜻이다.
➐ 「지형지세(地形地勢), 방위(方位)로 이를 바라보면 : 어떻게 될까? 사실(事實)은 이게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核心)으로 등장(登場)한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지세(地勢)와 방위(方位)로 보면 : 제(第) 2차(次) 천지개벽(天地開闢)의 문(門)이 열려도 불가능(不可能)하다.
➤ 「서(西)쪽 “1” 만리(萬里) 너머에 있었던 관문(關門)을, 글자 몇 개(個) 첨삭(添削)하여 극동(極東) 땅에 갖다 놓았기 때문이다.」
즉(卽), 《글란(契丹)은, 본래(本來) 선비(鮮肥)의 땅인, 요택(遼澤) 가운데에서 살았는데, 황수(潢水) 남안(南岸)으로, 남(南)쪽으로 유관(渝關)=투관(渝關)까지 1,130리(里) 떨어져 있으며, 유관(渝關)=투관(渝關)에서 유주(幽州)는 또 714리(里) 떨어져 있다》라고 한 것이다.
위의 구절(句節)을 실제(實際) 오늘날의 지형지세(地形地勢)와 방위(方位)에 맞춰 대입(代入)해보면 : 요하(遼河) 상류(上流) 요택(遼澤)에서 남(南)쪽으로 1,130리(里)에 “유관(楡關)=산해관(山海關)=진황도(秦皇島)”이다.
➤➤➤ 다시 《“유관(楡關)=산해관(山海關)=진황도(秦皇島)”에서 남(南)쪽 714리(里)에 “유주(幽州)”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 “유주(幽州)는 황해(黃海) 수백(數百) 미터 수중(水中)의 해중도시(海中都市)를 이루고 있다”라는 말과 같다.
『이는 곧 불가능(不可能)한 지세(地勢)와 방위(方位)다. 그래서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을 듣다 보면 : 외계인(外界人)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7)- 3) 「讀史方輿紀要 卷 十八 / 北直 9」 : 《延慶州界之火焰山 : 延慶右衛在懷來城內。舊置於居庸關,宣德五年,移建於此。本曰隆慶右衛,隆慶初,改名延慶右衛。今仍置延慶衛。》 【火焰山 [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火焰山(維吾爾老文字:قىزىل تاغ/يالقۇنتاغ,拉丁維吾爾文:Qizil tagh/Yalquntagh)是位於中華人民共和國新疆維吾爾自治區吐魯番市的單面山,是博格達山山前東西走向的褶皺與逆沖斷層帶。火焰山山體以紅色為主,北緩南陡,南側沖溝遍布,形似火焰。出露有侏羅系、白堊系、古近系、新近系、第四系的地層。火焰山因獨特的地貌、熾熱的氣候而聞名。中國四大名著之一《西遊記》中「三調芭蕉扇」的故事發生在火焰山。】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卷 十八 / 北直 9 : 「북직례(北直隸) 편에서 연경주(延慶州) 편(篇)을 보면 : 《延慶州界之火焰山 : 延慶右衛在懷來城內。: 연경주(延慶州) 지경(地境)에 화염산(火焰山)이 있다 : 연경(延慶) 우위(右衛) 회래성(懷來城) 안에 있다.》라고 하였다.
「화염산(火焰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단 한 곳이다. 바로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박격달산(博格達山) 주변(周邊) 토노번(吐魯番)에 있는 화염산(火焰山)이다.」
「북직례(北直隸)에 화염산(火焰山)이 있다」라면… …『신강성(新疆省) 오노목제(烏魯木齊) 동남(東南)쪽 토노번(吐魯番) 주변일대(周邊一帶)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주요 지역(地域)이었다.』
➤ 화염산(火焰山) 최고점(最高點) 해발고도(海拔高度) 851m [出處 : 중어 위키백과] 이러한 화염산(火焰山)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었던 북직례(北直隸)에 있었던 연경주(延慶州)의 경계(境界)에 있다【延慶州界之火焰山】는 말은 : 곧 “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 주변일대(周邊一帶)”를 말하는 것이다. [출처(出處) : 중어(中語)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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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渤海) 바닷가에 있다”라는, “산해관(山海關)=유관(楡關)”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출처(出處) : 중어(中語) 위키백과] : 이게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것은, 유관(楡關)이란 말 그대로 느릅나무(楡)와 직접적(直接的)인 관계(關係)가 있어야 하는데, 21세기(世紀)의 유관(楡關)은 느릅나무(楡)와 전혀 관계(關係)없고, 엉뚱하게도 발해(渤海) 바닷가에 있다.
「그저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산해관(山海關)으로 짝퉁일 뿐이다.」 곧 그 이전(以前)의 유관(楡關)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 발해(渤海) 바닷가에 있다는 「산해관(山海關)=유관(楡關)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말한다. [출처(出處) : 중어(中語) 위키백과]
21세기(世紀)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 옛 고전원문(古典原文) 기록(記錄)을 대입(代入)해보면 :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 조선사(朝鮮史)에 관심(關心)이 없고, 조선사(朝鮮史)를 모르는 분들에게는 씨알이 먹히는 이야기겠지만 : 조선사(朝鮮史)를 연구(硏究)하는 필자(筆者)가 보면 : “21세기(世紀) 사학자(史學者)들의 헛소리요,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을 왜곡(歪曲), 조작(造作)하고 있다.”라는 것을 금방(今方) 알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행위(行爲)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특정집단(特定集團)을?
특정국가(特定國家)를?
무엇을 얻고자? 이게 궁금한 것이다.
2026년 05월 10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조선사"는 "오늘날의 "한국사'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없다"는 것이 지론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한국사는 '반도사관=식민사관' 논자들에 의해 주도된 왜곡된, 조작된 '반도 땅"에 대한 역사해설이기 때문이다.
* 과연 "반도 땅에 대한 역사 기록은 있는건가? 아예 처음부터 없던 것일까?"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그 어떤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는 것에 무게가 실린다.
특히 반도와 함께 : 그 북방지대의, 일제에 의해 "만주"로 명명된 땅에 대한 1900년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 그곳은 역사전개과정에서 완전히 제외돤 무주공산의 땅이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그 남쪽의 반도 땅 역시 똑같았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오죽하면 당시의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보고서에 의하면 : "경기일부, 충청도, 전라도 땅'에 있었다는 660년 망년 당서에 기재된 호수 760,000 여호(돌궐과 고구려등으로 이주한 백성들을 제외한 것이다)에 대한 평가에서... ...반도 서남 일부 땅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이다"등으로 못박고 있다.
* 오늘의 조선사(반도사)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여기서 또 언급하고 싶은것은,
*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 또는 중엽 : 소위 민족주의적 사관이니, 애국애족 사관이니... ...하면서 언급되는 몇 종류의 조선사 해설집들을 보면 : 반도 땅과 그 북방지대의 만주 땅이 바로 엣 조선사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신데... ...이런 분들을 후세에 의해 '민족주의적'이라는 사학이라는 이름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 그러나 이 분들에 의한 저서 혹은 주장 역시 일제의 논리, 주장과 함께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면 또 한번의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도 땅과 일제에 의해 "만주'라고 명명된 곳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는 : 그곳에 그 어떤 관료체제 행정조직이 없었다는 뜻과 같다. 그곳이 옛 조선사 강토였다면 : 그곳에는 반만년 이어온 조선의 행정조직이 마땅히 있었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또한 소위 동국지리지등에... ...기록되어 있었어야 마땅한 것이다.
* "민족주의"라는 말을 하지 말자. "아무개, 아무개"의 민족주의 사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말자는 것이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란 말이 뭔가?
주인없는 빈산이란 뜻으로, 20세기 초 만주 땅은 주인이 없었다는 뜻이다
* 오늘날의 대륙 곧 중국(中國)이 무엇 때문에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가동한 것일까?
반도 땅으로 밀려난 옛 조선의 후에들이 언젠가 조선의 역사에 대한 진실을 깨달을 것을 대비해 : 본토 땅과 만주 땅을 선점, 고착하려는,선점하려는 의도가 100%다.
* 중국어 위키백과를 보면 :
조선사에 대한 검색은 대한민국에서 검색하는 것을 무색케 할 정도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오늘날의 한국에서 주장하고 있는 역사논리를 재빠르게 편집해 대대적으로 기재해 놓고, 누구든지 검색에 편리하도록 만들어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 더불어 이곳에서는 우리가 모르는"역사의 진실 또한 많은 것들이 있다"라는 것 또한 알고 있어야 한다.
* 조선(朝鮮)의 후예라면 :당연한 결과로 선조들의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어야 함은당연한 일일 것이다. 특정한 분들의 특정한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주장하고, 논리를 설파하고, 비판하고, 반론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도사학은 지극히 페쇄된 분야중의 한 분야다.
누구도 반론이 없고, 또 어설픈 반론은 밥줄이 끊어진다고 한다. 물론 우수갯소리겠지만... ...그것이 의하는 바는 크다.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반도사관 곧 식민사관 논자들에 의해 폐쇄된 분야를 그대로 놔 두어야 하겠는가?
대통령이 "역사" 한 마디를 했다고... ...한국사 온 모임단체에서 발칵... ...호들갑을 떨고 성명서를 내고... ...하는 것을 보면 : 그들도 역시 "진실의 역사"가 무섭긴 무서운 것을 아는 모양이다.
* '반도사관=식민사관'이라고 몰아붙이는 "필자"에 대한 공격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이다.
수백, 수천권에 대한 원전을 내 놓고 : 대응한다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거기에 반도 땅에서 불가능한 동국지리지에 대한 해설은 반도사학게의 아킬러스건이다.
* 많은 고전 원전과 조선사 원전, 여러 동국지리지와 수많은 사대부들이 기록해 놓은 문집등에 의한 '조선의 강역'은 반도 땅일 수 없다는 것, 그들이 먼저 알고 있어야 정상이다.
* 이제는 우리도 깨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일제의 망령에 시달려야 하겠는가?
다음 편은,
조선왕조(총칭) 북변과 서북변의 사막지대를 증거하는 서지적 기록에 대한 것으로 여러 편으로 계속됩니다.
글을 보고 계시는 독자분들께... ..."조선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역사스페셜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산해관, 진짜 짝퉁이군요.
멋진 글 머리에 새기겠습니다.
안녕하세요.
"Romantic"님!
오늘은 낮 기온이 30도까지 올라 반 팔을 입었는데 땀이 나네요.
벌써 그늘이 그리워지면 : 한 여름 더위는? 벌써 걱장입니다.
조선사에 대한 관심과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늘 좋은 내용을, 원전과 함께 객관적인 시각과 특히 지세(地勢), 방위(方位), 기후(氣候), 토산물(土産物), 거리(距離)등을 주요 쟁점을 고찰하여 : 비교 검토하기 때문에... ...실수 또는 오류를 막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조선사 내용을 갖고 꾸준히 공부하고, 연구하여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드리며,
댁내 평안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