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비자금 의혹 등을 수사했던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이건희 회장 등 삼성그룹 전현직 핵심임원 1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99일간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조준웅 특검은 17일 오후 2시 서울 한남동 고뫄스빌딩 6층 특검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총 149쪽에 해당하는 수사결과 내용을 발표했다. 특검 수사결과 발표 1부에서는 수사결과 발표 요지문을 낭독했으며, 10분간의 휴식 뒤에는 기자들의 질의에 답변했다. 조 특검은 이날 특검수사결과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빗발치자 TV카메라 등을 내보낸 뒤 펜기자들과 별도의 비공개 질의응답 시간을 갖기도 했다.
특검의 수사 결과 특검이 삼성 비자금 의혹 등의 수사와 관련해 기소한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현명관 전 삼성그룹 비서실장,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전략기획실장), 김인주 전략기획실 사장, 최광해 전략기획실 전략지원팀장, 유석렬 삼성카드 대표이사, 황태선 삼성화재 대표이사, 김승언 삼성화재 전무, 김홍기 이섬테크 회장, 박주원 삼성SDS 미국법인장. 특검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 대해 에버랜드 편법 경영권 승계사건(이하 에버랜드 사건)과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체의 헐값발행사건(삼성SDS 사건), 차명계좌 주식거래를 통한 양도소득세 포탈(2000-2006), 소유주식 변동 51회 미보고(2005-2007) 등과 관련해 특경가법과 특가법상 배임과 조세포탈,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했다.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도 이건희 회장과 마찬가지로 에버랜드사건과 삼성SDS사건, 양도소득세 포탈 혐의로 특경가법과 특가법을 적용받아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현명관 전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과 유석렬 삼성카드 대표이사(전 재무팀장)는 에버랜드사건과 관련해 특경가법상 배임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했다. 김홍기 이섬테크 회장(전 삼성SDS 대표이사)과 박주원 삼성SDS 미국법인장(전 경영지원실장)은 삼성SDS사건과 관계돼 특경가법상 배임 혐의로 불구속 처리됐다. 최광해 전략기획실 전략지원팀장은 특가법상 양도소득세 포탈, 황태선 삼성화재 대표이사는 미지급보험금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으며, 김승언 삼성화재 전무는 전산자료 삭제 건으로 특검법 위반과 증거인멸 혐의가 적용돼 불구속 기소했다. 지난해 10월 29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첫 번째 양심고백 기자회견을 열고 폭로한 삼성 비자금 의혹 등 모두 16개의 수사항목에 대해 특검팀은 대개 불기소, 혐의 없음 처리하고, 이건희 회장의 경영권 불법승계, 차명거래를 통한 비자금 모집과 관리 등의 범죄에 가담한 핵심 전현직 임원들에 대해 모두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매듭지은 것이다.
특검이 밝혀낸 내용 8년 전 이건희 회장이 이재용 등에게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헐값에 발행해 그룹 경영권을 불법 승계하려고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삼성에버랜드 편법 경영권 승계의혹 사건과 관련해 조 특검은 회장 비서실의 조직적인 개입으로 전환사채가 발행됐다며 이때 전환사채는 불법적인 제3자 배정방식을 통해 현저히 낮은 가격으로 발행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조 특검은 당시 그룹 비서실 재무팀 소속 김인주 이사와 유석렬 재무팀장 등이 불법 전환사채 발행과정을 주도했다며 이 내용은 이학수 차장과 현명관 당시 비서실장에게 보고됐고, 이건희 회장에게도 전달됐다고 말했다. 범죄사실이 충분히 인정된다는 지적이다. 반면 홍석현 <중앙일보> 대표이사와 홍라희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에 대해서는 전환사채 발행경위 등을 모르고 있고 전환사채 발행가격의 적정여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실권한 것으로 배임의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고, 공소시효 10년이 완성돼 불기소 처분했다고 밝혔다.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의 헐값발행사건에 대해서도 당시 구조본 재무팀장인 김인주와 관재담당자 박재중이 비상장법인인 삼성SDS의 재무상태를 분석해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싼 가격에 발행하여 이를 이재용 등이 인수하면 시세차익이나 상장차익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의도적으로 싼값에 발행하여이를 당시 구조본부장 이학수와 이건희에게도 보고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피력했다. 조 특검은 삼성그룹 전현직 임직원 명의의 차명의심계좌에 대한 자금 추적과 조세포탈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전략기획실이 삼성 임원들의 이름으로 관리하는 자금 대부분이 이건희 차명자금이며 그 전체 규모는 삼성생명 2조3000억원 상당을 포함해 모두 4조5000억원 정도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한 이건희 회장의 차명 재산을 관리하던 전략기획실 재무라인 임원들이 1199개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삼성계열사 주식을 사고팔아 남긴 차익 5643억원에 대한 양도소득세 1128억원을 포탈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전했다.
특검의 한계와 미흡했던 수사의지 정관계 로비와 관련해서는 김용철 변호사의 일관된 주장과 달리 조 특검은 김 변호사에게 삼성이 관리했다는 검찰간부 명단을 제출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제출하지 않았다며 계좌추적과 비행기탑승기록, 골프장 기록 등 특검의 광범위한 압수수색과 계좌추적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조직적 로비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용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과 추미애 의원 등의 진술을 보면 삼성그룹 내에 조직적 인맥관리체제가 구축돼 로비가 이뤄진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은 있으나 김용철 변호사의 태도와 진술이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점에 비춰볼 때 그의 진술만을 근거로 계속 수사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돼 수사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추미애 의원이 2000년 총선 당시 삼성직원 1명이 선거사무실에 찾아와 현금 1억원이 든 골프가방을 가지고 왔으나 돌려보냈다고 진술한 부분에 대해 수사를 확대하지 않은 것은 의문이다. 또 돈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상품권이나 포도주 등을 선물로 주라고 로비를 지시한 회장 지시사항 문건과 홍석현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이 금품지급을 논의한 대화가 담긴 안기부 X파일 녹취록이 있는 점 등에서 볼 때 당연 수사를 벌였어야 함에도 하지 않았다.
특히 김성호 국정원장의 경우 김용철 변호사는 김 원장이 99년 창원지검 차장으로 재직할 때 500만원의 헌 수표를 직접 전달했다고 주장하나 진술의 신빙성을 믿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종찬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에 대해서도 김용철 변호사는 박재중 전무가 돈봉투를 가지고 올라가는 것을 봤다고 진술하나 목격자의 진술과 건물구조상 이를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임채진 검찰총장이 삼성의 관리를 받았다는 의혹도 김용철 변호사 스스로 진술이 충돌하고 임채진 총장 관리자로 지목된 이우희는 2001년 인사팀장에서 에스원 사장으로 부임해 김용철을 만날 이유가 없다고 진술한 만큼 임채진 총장에 대해서는 김용철의 주장 자체가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못 박았다. 이귀남 대구고검장과 이종백 전 국가청렴위원장 등도 삼성의 로비를 받았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개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들이기 때문에 계속 수사할 의미가 없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조준웅 특검은 불법경영권 승계의혹과 비자금 모집 및 관리 중 차명계좌 주식거래 등 일부에 대해서만 기소하고, 불법로비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상 김용철 변호사 진술의 신뢰 부족 등을 이유로 모두 혐의 없음 결론을 내리고 내사종결 했다.
특검이 밝힌 불구속 사유 조준웅 특검은 이번 사건을 결론지으면서 이 사건의 범죄는 재벌그룹이 구조조정본부라는 조직을 통해 계열사의 경영과 지배구조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장기간 내재된 불법행위를 엄벌하는 것이라면서도 전형적인 배임·조세포탈 범죄와 다른 측면이 있고, 피의자들이 대기업그룹 회장 또는 최고경영자 등 중추적 핵심 임원들이기 때문에 구속하면 기업경영에 엄청난 공백과 차질이 생기고, 경쟁이 극심한 글로벌 경제 상황에서 우리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파장이 매우 클 것으로 판단해 불구속 기소한다고 밝혔다. 법의 적용과 집행에는 보편성이 있어야 하고 불합리한 차별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지만 평등한 법적용이 개별적 특수성이나 시대적 상황 등을 전혀 외면한 채 기계적으로 똑같이 적용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준웅 특검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 사건의 피고인들의 범행은 중죄에 해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고인들을 반드시 구속해 재판해야 한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의 분노 그러나 이 같은 특검의 수사종결에 김용철 변호사의 변호인단은 물론 삼성 불법행위 규명운동 등 시민단체들은 한 마디로 수사할 필요도 없었던 수사였다고 강력 비판했다.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처장은 결론적으로 새로운 게 전혀 없다며 부실하고 짜맞추기 수사였다고 한탄했다. 박 처장은 삼성이 잃은 게 뭐냐며 비자금이나 뇌물사건은 대개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소환수사가 필요한데 김용철 이외에는 소환한 사람이 없다고 수사부실을 비판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변호인단 소속 김영희 변호사도 삼성을 전면적으로 봐주기 위한 수사결과라며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김영희 변호사는 이 사건의 출발은 김용철 변호사가 자기 명의로 차명 비자금이 있다고 폭로하면서 시작됐지만 특검팀은 계열사를 통해 조성한 비자금이라는 내용을 전혀 밝혀내지 못했다고 통탄했다. 그는 조성된 비자금은 모두 사망한 이병철 선대회장으로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삼성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게 과연 수사라고 할 수 있냐며 삼성측 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삼성 측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도 면죄부 수사라며 특검이 삼성에 대해 면죄부 수사를 할 것이라는 의구심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김 소장은 엄청난 비리사건에 대해 10명 불구속 기소로 처벌하는 게 과연 정당한 것이냐고 묻고 삼성이 법적으로 적합한 기업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사였다고 분석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대 교수는 이건희 회장이 포탈한 금액이 1128억원이면 극형에 처하는 게 법리상 맞다며 탈세액이 1억원 이상이면 무조건 구속하고, 5년 이상의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우리나라에는 재벌에 관한 특별법이 있는 것 같다며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구속하거나 처벌하지 않는 치외법권을 만들어놓고 너무 지나치게 노골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기계적으로 똑같이 법 적용을 할 수 없다는 조 특검의 말에 일리가 있기는 하다며 문제는 그렇게 말하려면 이건희 회장의 구속으로 삼성이 망하고,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증거가 있어야지 그런 증거도 없이 법률가가 그런 판단을 내려서야 하느냐고 질타했다. 그는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게 이건희 회장인지, 삼성 노동자들인지 정말 따져봐야 하는 게 아니냐며 경제적 판단을 할 줄도 모르는 검사들이 어떻게 나라경제 걱정을 탓하며 불구속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오마이뉴스 장윤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