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한대 타는 시간동안 참선 마음의 찌꺼기도 함께 탑니다”
지난 28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학교 과학관 465호, 박영재(48) 교수의 연구실.
한밤중인데도 연구에 여념이 없다.
역시 바쁘다.
박 교수는 서강대 자연과학대학장이자 재가 수행의 선구자인 수선회를 이끄는 지도자다.
그가 화두처럼 던진 〈두 문을 동시에 투과한다〉라는 제목의 그의 책이 떠오른다.
일과 수행을 함께 투과하려니 어찌 한가할 수 있을까.
외모는 전형적인 책상물림이지만,
그의 자세에선 차분함과 강인함이 느껴진다.
5녀 사이의 2대 독자로 태어났으니,
그는 어려서부터 이런 차분함이나 강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너무 민감한 성격이어서 시험이 다가오면 밥조차 먹을 수 없었고,
통학 버스에 여학생이라도 타면 그가 내릴 때까지 붉힌 얼굴을 들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런 삶에 일대 전환이 온 것은 서강대 물리학과 2학년이던 20살 때였다.
근대 선지식인 효봉 선사의 지원으로 1965년 선도회를 결성해 일반 불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하던 종달 이희익 노사를 만났다.
‘하루 향 한 대 타는 시간(30분~40분 가량) 동안 앉지 않으면 한 끼를 굶는다.’
선도회의 엄격한 가풍에 따라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 한 시간,
일어나서 한 시간씩 어김없이 수행했다.
점차 주말엔 시간을 잊고 앉아 있곤 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삶이 변화되었다.
조그만 일도 마음에 걸려 못 견디던 그가 예전 같으면 한 달 속 끓일 일이
1주일이 못 가 사라지고,
점차 1주일 걸릴 일이 하루가 못 가 풀어졌다.
참선한 지 10년쯤 지날 무렵 가슴에 맺혔던 것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그는 87년 마침내 중국 남송 때 무문 혜개선사의 공안집인 〈무문관〉 48측을
모두 통과해 종달 노사로부터 깨달음의 상징인 ‘인가’를 받았다.
그는 “‘인가’는 혼자서도 충분히 수행해갈 수 있다고 여기는 ‘박사학위증’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반드시 부처님과 같은 대각을 해야만 선을 지도할 수 있다는 일부 견해 때문에
일반인들이 참선의 맛을 보기 어렵게 된 것을 아쉬워한다.
종달 노사는 모두 10명을 인가해 재가 선풍의 밑거름을 다졌다.
박 교수는 90년 입적한 종달 노사로부터 수선회 법사직을 이어받아
스승이 했던 것처럼 ‘입실 지도’를 하고 있다.
‘입실 지도’란 제자와 일대일로 만나 수행을 점검하는 것인데,
해방 전까지 우리나라 선가에도 이런 전통이 있었다.
매주 화요일 아침 7시가 되면 서강대 안 성당 기도실에서 15명 정도가 참선을 한다.
이곳은 종교의 벽도 없다.
외국인 신부와 수녀도 함께한다.
그는 조부 때부터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내도 천주교 신자다.
그는 이 수행터를 주인공 또는 천주님을 본다는 뜻인 ‘견주굴’이라고 이름붙였다.
견주굴 수행이 일과 시간이 시작되는 9시를 넘기는 법은 없다.
일할 때는 철저히 일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가풍이다.
향 한 대가 탈 시간 동안 어떤 잡념도 없이 참선하면 온종일 투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도 국외 학술지에 가장 많은 논문을 발표하는
물리학자 가운데 한 명인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수행과 일.
그에게 두 문은 한 문이다.
이제 그가 수고로이 통과할 한 문마저 없다.
다만 매 순간의 ‘투신’이 아름답다.
글·사진 조연현 기자
묵은 짐 내려놓고 내면 여행 떠나요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오고 있다.
잠시 일상의 속박에 벗어나 지나간 해를 돌아보고, 오는 해를 준비하면 어떨까.
모두가 움츠려드는 겨울.
수도원과 산사에서 깊은 내면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의 온기와 자유를 되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물론 교회가서 기도할 수도 있고. 여행을 떠나도 됩니다만....
산사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그 어느것과 비교가 안되게 좋답니다.
우선 장관님께서 산사에서 하룻밤이라도 묵어보시는 것이 어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