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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____
아주 특별한 휴가
배상민
“예쁘지?”
혜리가 가슴에 비키니를 대 보이며 물었다.
“응.”
나는 비키니를 3초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진심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대체 작년 것과 어디가 어떻게 달라서 이걸 또 사야만 했는지 의문이었다. 혜리는 나의 진심어린 연기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의문을 눈치 챘는지, 이거… 소녀시대가 뮤직비디오에서 입고 나온 거야, 하고 결정적인 한 마디를 보탰다. 그러니까 ‘차이’라는 것은 디자인의 차이라기보다 올해 누가 입었느냐의 ‘차이’였다. 이 ‘차이’ 때문에 혜리는 여행 출발 시간을 2시간이나 미뤄가며 택배를 기다렸고, 나도 덩달아, 렌트한 차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부아가 치밀만한 시간이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여행 출발부터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비키니만큼은 ‘소녀시대’였다.
문제는 또 있었다.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은 바다가 아니라 어느 한적한 산촌이었다. 가재나 송사리가 정겹게 노닐만한 냇가 정도는 있겠지만, 그 곳에서 비키니를 입는다는 것은 가재나 송사리조차 눈살을 찌푸릴 만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시동을 걸면서 물었다.
“그런데 산에 가면서 비키니는 왜 갖고 가는 거야?”
“글쎄…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
혜리는 비키니를 품에 안고 차창 밖을 내다보며 대꾸했다.
혜리가 저렇게 표정을 숨길 때는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지만, 나는 괘념치 않기로 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나이고, 경비를 모두 대는 사람도 나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휴가를 가기 위해 내건 조건이기도 했다.
사실 처음 휴가 계획을 말했을 때, 혜리는 그리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번 휴가는 남들 다 가는 바닷가나 관광지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 좀 특별한 나만의 휴가를 보내고 싶어. 아무런 계획도 없이 한적한 산길을 거닐면서 나무 냄새도 듬뿍 맡고, 낮잠도 늘어지게 자는 거지. 책도 좀 읽고 싶고. 어때?”
휴가 가기 일주일 전, 회사 앞 카페에서 혜리와 마주앉은 나는 기대에 부푼 얼굴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턴 생활 내내 야근과 주말 근무에 시달려왔던 터였다. 혜리와의 데이트조차 이렇게 점심시간에 잠깐 짬을 내 겨우 얼굴을 보는 정도였다. 덕분에 정규직 전환을 코앞에 두게 되었지만, 나는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코앞에 둔 사람처럼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토, 일, 월. 화, 주말을 끼고 받은 이 4일의 휴가 동안, 그저 죽도록, 쉬고 싶었다.
혜리는 팥빙수를 오물거리면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뭐야? 그럼 휴가 때 걷고 자는 것만 할 거야?”
볼록 부풀린 혜리의 양 볼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이럴 때는 백 마디 말로 설득하는 것 보다 한 번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자칫 언쟁으로 가게 되면 도리어 내가 설득당할 가능성이 더 컸다. 나는 일부러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폐 밑바닥에 있는 묵은 공기까지 쥐어짜내 한숨을 쉬었다.
“힘들어. 우리 결혼하기 전에 한번만 내 뜻대로 해줘.”
나는 일부러 결혼이라는 단어를 슬쩍 내비췄다. 혜리와 사귄지 5년이었다. 요즘 들어 혜리는 같이 길을 걸을 때면, 부동산에 내걸린 전월세 시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거나, 옷 가게 좌판에 전시된 아기 옷을 만져보곤 했다. 짐작컨대, 혜리는 우리 결혼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내게 끊임없이 던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저 말은 혜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부풀었던 혜리의 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어디 갈 건데?”
“내파리! 서해 바다랑 접해 있는 산골인데, 삼나무랑 편백나무가 우거진 데야. 아직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래.”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시골로 가는 거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혜리의 볼은 다시 부풀어 올랐다.
주말이었지만, 서울을 빠져나가는 도로는 붐볐다. 2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시계는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계획대로라면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있어야 했다. 출발할 때부터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던 혜리는 생글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우리 이왕 늦은 김에 맛있는 거 먹고 가자.”
“어디?”
“마침 이 근처에 중식당이 하나 있어. 요즘 대세 셰프가 나오는 데야.”
지난 6개월 동안 텔레비전 볼 틈도 없이 살았던 나로서는 셰프라는 단어도, 그 이름도 생소했다. 하지만 나와 달리 6개월간 취업 준비를 하며, 요리 프로그램에 푹 빠져 살았던 혜리는 이 중식당에서 꼭 먹어봐야할 메뉴를 줄줄이 읊었다. 아무래도 거기로 간다면, 짜장 하나, 짬뽕 하나 수준에서 간단히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대세라는 셰프의 중식당에는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주차는 주차요원이 와서 내 차를 몰고 사라지는 것으로 대신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입구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르바이트 생으로 보이는 여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지금 앞에 대기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1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사무적으로 친절한 말투였다. 그럼요. 혜리가 냉큼 대답했다. 종업원보다 더 친절한 목소리였다.
기다림은 무료했고, 식당 밖은 더웠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언젠가는 들어서게 될 거라고 짐작되는 입구를 노려보았다. 혜리는 내 시선이 닿아있는 바로 그 곳에서 수십장의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카메라에 담긴 자신의 얼굴을 보느라 내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몇 장을 나에게 보여준 후, 기어코 예쁘다는 대답을 들은 뒤에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렸다. 적어도 사진에서 만큼은 무료하고 무더웠던 시간이 생략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배신감이 들었다.
식당에 앉은 후에도 사진에 대한 혜리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식당 안에 앉은 자신을 찍었고, 나와 함께 있는 자신을 찍었으며, 배고픔에 못 이겨 단무지와 차사이를 집어 먹는 나를 바라보는, 자신을 찍었다. 음식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로서는 음식을 찍는 카메라까지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지만, 혜리는 내가 젓가락을 들기만 하면 단호하게 기다려! 라는 명령을 반복했다. 사료를 먹기 위해 밥그릇 앞에 앉은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혜리는 탕수육 한 점을 입에 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음, 탄성을 내질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일단 위에 음식부터 집어넣었다. 탄성을 내지를 겨를도 맛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리를 이해했다. 우리 동네 중국집 탕수육 가격의 두 배를 주고 주문한, 조금 희고, 한결 바삭한 탕수육이었다. 모름지기 저런 감탄사라도 내뱉지 않는다면 내 돈은 아무런 위안도 받지 못하고 사라질 터였다. 야근에 주말 근무를 불사하면서 벌어들인 돈이었다. 사라질 때 위안을 받을 만한 그런 돈이기도 했다.
“차는 옆 건물에 있어요.”
주차요원은 차 키를 건네주고 또 다른 차를 실종시키러 서둘러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주차요원이 실종시킨 차를 찾는데 20분이 걸렸다. 중식당의 옆 건물은 사방으로 네 개가 있었다. 불행히도 각각의 건물에는 20여대 가량의 차가 넉넉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여기서 기다릴게. 혜리는 중식당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으면서 말했다. 나는 땡볕에서 건물 하나하나를 찾아 헤맨 끝에야 중식당 서쪽 건물 15번째 칸에 웅크리고 있는 내 차와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차문을 열자 차는 오랜 기다림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듯 더운 숨을 토해 냈다.
오전 10시에 출발해서 서울을 빠져나가지도 못했는데, 시계는 벌써 오후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발길이 닿는 곳에 자리 잡은 한갓진 숙소에 짐을 풀고 혼곤히 낮잠을 즐기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꽉 막힌 도로가 발길을 붙드는 가운데 혼곤하게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휴가를 가기 위해 어제 무리해서 야근을 한 탓인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혜리를 잠깐 쳐다봤다. 무슨 말이라도 붙여주기를 바랐지만 혜리는 스마트 폰에 고개를 묻은 채 또 다른 맛집을 검색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졸음이 달아났다. 아마도 이건 분노의 감정일 지도 몰랐다.
그러나 분노는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 내 차가 차선을 한 번 슬쩍 넘나들고 나서야 혜리는 스마트 폰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괜찮아?”
나는 말없이 목 언저리를 긁었다. 혜리의 무관심에 대한 무언의 시위였다. 혜리는 비로소 내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우리 잠깐 쉬었다 가자. 눈도 붙이고 시원한 거라도 마시면 잠이 깰 거야.”
순간, 잠깐 눈을 붙이러 혜리와 함께 모텔에 들어가는 장면이 와이퍼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인턴 생활하는 내내 혜리와 잔적이 없었다.
“어디 갈까?”
나는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혜리가 안내한, 잠깐 쉴 곳은, 유명한 호텔 출신의 파티셰가 직접 운영한다는 디저트 카페였다. 이곳에서도 중식당에서 겪었던 일이 그대로 반복됐다. 차는 또 실종되었고, 기다리는 줄은 길었으며, 혜리는 그 동안 분주하게 셀카를 찍어댔다. 물론,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조합한 디저트에 에메랄드빛이 도는 음료를 곁들이면서 음, 탄성을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윤회환생이라도 보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정말 눈만 붙였다.
서울을 아직 빠져나가지도 못했는데, 해가 지고 있었다. 한강 다리에 걸린 노을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어느새 도로는 한산해졌고, 덕분에 차는 속력이 났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쉬겠다는 일념 하나로 힘껏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잘 데는 예약했어?”
혜리가 내 입에 오징어를 넣어주면서 물었다. 다분히 인위적인 땅콩버터 향이 입 안을 맴돌았다. 나는 오징어를 기계적으로 질겅거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내파리를 휴가지로 정하고 나서부터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걱정한 적은 없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곳이니 적어도 숙소가 부족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무 사이에 해먹만 걸쳐 놔도 세상모르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피, 뭐야? 혼자 다 알아서 한다더니….”
혜리는, 평소와 달리, 내가 혼자 다 알아서 하지 못했는데도, 불만어린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다시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차가 신호에 걸렸을 때 얼핏 보니, 혜리는 풀장이 딸려 있는 펜션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기어코, 비키니를 입어 보겠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찾는 사람 하나 없는 내파리에 풀장이 딸린 펜션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혜리는 지금 내파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묵을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가슴 언저리에서 뭔가 욱하는 게 치솟았다. 출발부터 지금까지 일정이 꼬인 건 전부 혜리 탓이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 하루는 나를 위한 휴가가 아니라 혜리를 위한 맛집 탐방에 불과했다. 그런데 숙소까지 혜리 멋대로 결정한다면 4일의 금쪽같은 휴가 중에 하루를 날리는 거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어차피 늦은 일정이니 혜리가 원하는 펜션에서 하루 자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슬그머니 자기 뜻대로 일정을 끌어가고 있는 혜리가 얄미웠다. 지금 나에게 있어, 혜리가 원하는 펜션에 자느냐 마느냐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나는 다시 차를 출발시키면서 단정적으로 말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파리에 갈거야. 거긴 그런 펜션 없을 걸.”
혜리는 검색을 하다 말고 차창 밖을 내다봤다.
“해가 지네?”
대답하지 않았다. 해가 지는 것은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거기 내파리라는데 찾아가 본 적 있어?”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찾지 않은 데를 내가 찾았을 리가 없다는 건 혜리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파리라는데 도착하면 깜깜한 밤일텐데… 숙소나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이번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나도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뭐 잘 데 없으면 해먹이나 치고 잘까?”
혜리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뜨끔했다. 아까 내가 한 상상을 귀신같이 알아맞힌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또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해먹도 좋지. 모기한테 뜯기고, 산에서 자면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데 추우니까 자고 나면 입도 돌아갈 테고… 참, 귀신도 나오겠다. 그치?”
혜리는 명백히 비아냥대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세 가지가 모기, 추위, 귀신이었다. 나는 엑셀레이터를 밟았던 발에서 힘을 슬그머니 뺐다.
“어디 가까운 펜션 한 번 알아봐.”
혜리는 스마트 폰을 내밀었다. 이미 펜션 검색은 끝난 뒤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능수능란한 애가 왜 취직은 못하는 걸까하고.
그러나 혜리도 실패할 때가 있었다. 혜리가 검색한 멋진 풀장이 딸린 펜션은 이미 여분의 방이 없었다. 오늘 만 그런 게 아니라 이번 달 예약이 모두 꽉 찼다고 했다. 맛집만큼이나 펜션에서도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 있었던 것이다. 혜리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폭풍 검색에 돌입했고, 첫 번째보다는 좀 못하지만 그럴싸한 풀장을 가진 펜션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방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개의 펜션을 더 떠돌아 다녔지만 풀장이 있는 펜션은 죄다 예약이 꽉 차 있었다. 해는 진 지 오래고, 달도 뜬 지 오래였다. 나의 피곤은 극에 달했다. 이제는 나무 사이가 아니라 공동묘지에 해먹을 걸쳐 놓아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수만 있다면, 모기도 귀신도 추위도 두렵지 않았다. 모기는 물려주면 그만이고, 추위로 돌아간 입은 다시 되돌려 놓으면 그만이었다. 귀신은 잠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돌아다녀도 괜찮았다. 다만 나를 잠에서 깨운다면 한 번 더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지치기는 혜리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산 비키니를 만지작거리다가 뒷좌석으로 던져 놓았다.
“아무데나 들어가자.”
나는 혜리의 말을 듣자마자 가장 가까운 펜션으로 향했다. 풀장이 있는 펜션과 가깝기는 했지만 풀장도 없었고 어느 누구의 블로그에도 올라있지 않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리는 비키니를 입고 창문 난간에 걸터앉아 옆 펜션의 풀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만 놓고 보면 꼭 펜션의 풀장에서 찍은 것처럼 보였다. 혜리는 다시 나를 붙들고 사진들을 보여준 다음, 기어코 예쁘다는 말을 들은 후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나는 비키니를 입은 혜리를 안은 채로 잠들었다. 비키니만큼은 소녀시대인데 너무 피곤했다.
늦잠을 잤다. 내 잠을 깨운 것은 핸드폰의 알람도 아니고, 혜리도 아니었다. 부장의 전화였다. 휴가 중에 대단히 미안하지만 오늘 시간되는 대로 잠깐 회사로 나와 줄 수 없냐고 했다. 하필 수요일에 부서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발표가 잡혔는데, 파워포인트를 만들어줄 유능한 인재가 하필 또 나 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회사에 능력을 보여주는 게 앞으로 나의 위치를 확실히 하는데 보탬이 되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한 마디로 잘리기 싫으면 자기가 발표할 파워포인트를 대신 만들어 달라는 뜻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간다고 하면 어떡해?”
혜리는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팔짱을 끼고 불퉁거렸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면서 대꾸했다.
“부장님이 시키는 데 할 수 없잖아. 아직 정직원도 아니고.”
혜리는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두 볼을 잔뜩 부풀렸다. 나는 그런 혜리가 서운했다. 솔직히 불만스러워도 내가 더 불만스러워야 했다. 그래도 혜리는 어제 하루는 자기 뜻대로 휴가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나는 내파리는 가보지도 못했는데 서울로 되돌아가는 판이었다. 혜리는 지금 잔뜩 불만어린 표정을 짓고 있기 보다는 나를 다독여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에도 혜리는 스마트 폰을 들고 끊임없이 검색을 했다. 생각해 보니 어제부터 지금까지 운전하느라 피곤해 하는 나를 위해 말 한 마디 붙여주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또 야속했다. 생각 같아서는 저 스마트폰을 뺏어서 차창 밖으로 내던지고 싶었다.
“점심은 먹어야지? 여기 어때?”
혜리는 블로그에서 찾아낸 맛집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운전에 집중하는 척하면서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한번 봐봐.”
혜리는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그만해. 운전 중이잖아.”
나도 모르게 말투에 토라진 기색이 섞였다.
“왜 화를 내?”
혜리도 예민하게 받아쳤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운전을 방해하지 말라는 거잖아.”
“내가 뭘 얼마나 방해했다고 그래? 팔 두어 번 두드린 게 운전방해야?”
혜리는 따지고 들 기세였다. 나는 말을 말자 싶어서 인상을 쓴 채 앞만 주시했다.
“왜 뭐가 문젠데?”
혜리가 다그치듯 물었다. 하지만 뭐가 문제라는 말을 하기도 번잡스럽고 무엇보다 내가 지질해 보이는 것 같아 계속해서 입을 다물었다. 혜리는 그런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스마트 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또 다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서울로 올라가는 내내 차안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뭐라도 말을 건네서 이 분위기를 풀고 싶었지만 긴 침묵 속에 서로 미묘하게 자존심이 걸려버린 상태였다. 내가 먼저 말을 걸기도 싫었고, 혜리가 먼저 말을 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침 휴게소가 눈앞에 보였다. 서울로 들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휴게소였다. 나는 여기 잠깐 들러 밥도 먹고, 분위기도 전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핸들을 휴게소 방향으로 틀었다.
차가 주차장에 들어섰음에도 혜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건성건성 인터넷 페이지를 넘길 뿐이었다.
“여기서 뭐 먹고 가자.”
1시간 만에 처음으로 혜리에게 말을 건넸다.
“싫어.”
혜리는 간결하게 거절했다.
“그냥 여기서 먹자. 나 곧바로 회사 가야해.”
“그럼 혼자 먹어. 이런 데서 먹기 싫어.”
이런데서 먹기 싫다는 말이 신경을 건드렸다. 혜리는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데서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이렇게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자와 꼭 결혼해야 할까, 의문이 생겼다. 우리 결혼하면 말이야, 내가 운을 떼자, 비로소 혜리가 고개를 들었다.
“나 평생 이렇게 살게 될까 겁나.”
“그게 무슨 소리야?”
혜리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결혼하며 이렇게 네 운전수 노릇이나 하면서 살게 될 거 같아.”
“내가 언제 오빠를 부려먹었다고 그래?”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 난 네가 가자는 데만 갔어. 그런데 넌 뭐야? 휴게소 한 번을 같이 안 가주잖아.”
“내가 억지로 끌고 갔어? 오빠도 다 동의해서 간 거면서 왜 내 핑계를 대?”
“그거야 네가 가고 싶다고 해서 따라가 준거지.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야.”
혜리는 기가 찬다는 듯 손부채로 얼굴을 부쳤다.
“그럼 사진 찍을 때 좋아했던 건 뭔데?”
“내가 언제?”
“보여줘?”
“됐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그렇다고 쳐. 이번 휴가, 오빠가 먼저 어디 가고 싶다고 얘기했으면 되잖아. 자기는 어디 갈 지 하나도 준비 안 해 놓고, 기껏 검색하고 안내한 나한테 뭐라고 해?”
“난 내파리에 간다고 분명히 말했어.”
“누가 거길 안 간대? 밥은 어디서 먹을 건지, 어디서 잘 건지 생각은 안 해봤으니까 그렇지.”
말문이 막혔다. 내파리에 가겠다고만 했지, 밥은 어디서 먹을지, 어디서 잘 건지 준비를 안 한 건 맞았다. 이 말싸움에서 외통수에 몰려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관두자.”
“뭘?”
나는 말없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뭘 그만두자는 건데!”
혜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혜리를 돌아 봤다. 그녀의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5년을 사귀면서 혜리와 숱하게 싸웠지만, 이 정도 말다툼으로 이렇게까지 격하게 감정을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잠깐 뜨악해서 혜리를 쳐다봤다. 혜리의 눈에서는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손가락을 굽혀 혜리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 혜리는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푹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 그만두자는 거면 마음대로 해.”
당황했다. 괜히 처음에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게 엉뚱한 오해를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게….”
“괜찮아. 이해해. 내가 놀고 있으니까… 남들 보기 창피하겠지 뭐.”
혜리가 눈물을 닦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먹먹했다. 나도 일없이 보냈던 시간이 있었다. 그땐 나도 내가 한심했다. 혜리를 보기도 미안했었다. 나는 가만히 혜리의 손을 잡았다. 혜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요새 오빠가 나 잘 안 만나주고 그래서…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나도 남들처럼…”
혜리는 끝내 울먹였다. 나는 혜리를 안아주었다.
“우리 내년에는 남들처럼 살자.”
혜리는 내 티셔츠가 축축하게 젖도록 울었다. 나는 가슴에 스미는 혜리의 따뜻한 눈물을 느끼며, 특별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딱 남들만큼만 사는 것이 왜 이다지도 피곤한 걸까 생각했다.
서울에 도착해서 혜리를 데려다 주고 곧바로 회사로 갔다. 부장의 일은 해가 져서야 끝났다. 부장은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이틀 휴가 잘 보내고 오라고 말해 주었다. 물론 형식적인 인사치례였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나에게는 이틀의 휴가가 남은 것 아니냐고. 그러니까, 혜리와 함께 남들이 다 간다는 곳을 들러야 하는 휴가가 아니라 온전히 나만을 위한 휴가를 보낼 수 있는 날이 이틀이나 있는 것이었다.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곧바로 내파리로 향했다. 어차피 휴가 때 쓸 짐이야 차에 그대로 실려 있던 터였다. 나는 반드시 오후가 되기 전에 내파리에 도착해서 나무 향을 맡으며 낮잠을 자겠노라 다짐했다. 점심때는 그 어떤 프로그램에도 나오지 않았고, 그 누구도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을 법한 분식집으로 갔다. 차는 실종되지 않았고, 가격은 적당했다. 나는 조미료로 적당히 맛을 냈기 때문에 음, 하는 감탄사가 나올 리 없는 김치찌개를 먹었다. 한 끼를 먹는데 4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확실히 남들이 다 가는 데를 가지 않으면, 뭔가 조금 덜 피곤했다. 어쩐지 이 김치찌개는 내가 바라는 완전한 휴가를 위한 전조처럼 느껴졌다.
내파리로 가는 길은 뻥 뚫려 있었다. 엑셀레이터를 밟는 대로 차가 뻗어 나갔다. 운전하는 맛이 났다. 소녀시대 노래도 틀었다. 혜리는 소녀시대가 걸치는 모든 종류의 옷을 좋아했지만 내가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볼륨을 한껏 높였다. 이것이 ‘자유’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운전하는 맛은 내파리 초입에 들어서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차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이 시골 마을에 왜 차들이 늘어나는 것일까. 차의 속도가 줄어드는 만큼 불안감도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내파리라는 글자가 씌어진 입석을 넘어서면서 차가 멈춰 섰다. 비슷비슷한 차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겨우 내파리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이 시골마을의 주차장은 여러 대의 관광버스가 줄을 지어 들어 설 만큼 광활했다. 아이들은 주차장에서부터 괴성을 지르면서 뛰어다니고 있었고 어른들은 먹을 것과 텐트를 이고지고 뒤따랐다. 흡사, 기대감과 설렘에 부푼, 피난민 행렬 같았다. 모두들 얼음 바람이 사시사철 분다는 청정계곡을 향해 꾸역꾸역 올라가고 있었다. 이미 내가 예상한 휴가에서 한참 빗나가고 있었지만, 이왕 온 김에 나도 그 행렬에 동참했다. 그리고 그 행렬 속에서 딱 나만큼 피곤한 얼굴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당신도 피곤하군요.’
‘피곤하면 내파리죠.’
‘그래요.’
‘그래요.’
‘…….’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에 들어서자, 과연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부는 길 양 옆으로 텐트와 돗자리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노래방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노랫가락이 내파리의 차가운 계곡 바람을 타고 내려와 내 귀를 파고들었다. 한적한 시골이라던 내파리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그저 그런 피서지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들었다. 나는 망연자실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 혜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평소라면 혼자 휴가 온 것을 숨기기 위해 뭐라도 둘러댔을 테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내파리”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내파리?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데? 거기 한적한 시골이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볼 땐 분명히 한적한 곳이었는데… 이럴 수가 있어?”
나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뭐가?”
“내파리는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라며? 그런 곳을 오빠는 어떻게 알았어?”
“그거야… 텔레비전하고 인터넷에서 봤으니까….”
“그럼 텔레비전하고 인터넷에서 내파리를 본 사람이 오빠뿐이겠어? 적어도 수십만명은 봤겠지.”
“아!”
뭔가 깨달음이 왔지만, 늦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혜리는 항상 나보다 반 발짝 정도씩 빠르다.
“이번 한 번은 혼자 간 거 용서할게. 오빠도 피곤했을 거야. 빨리 올라와. 내일 호텔 수영장 예약해 놨어.”
호텔 수영장이라… 혜리가 해마다 예약하는 호텔 수영장에서는 누구도 수영을 하지 않는다. 대신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과 삼각 수영복을 입은 남자들이 클럽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맥주를 마시거나 햄버거를 먹으면서 셀카를 찍었다. 혜리 역시 새로 산 비키니를 입고 셀카를 찍을 터였다. 순간 휴가 첫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직 시간은 남았다. 내파리까지 와서 나만의 특별한 휴가를 누리지도 못하고 되돌아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시원한 얼음 바람이 불어오는 계곡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기 어디쯤에는 분명히 아무도 없는 내파리 다운 내파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특별한 휴가를 보내겠다는 오기 때문이었을까, 2시간 동안 피곤한 줄도 모르고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얼음 바람이 나오는 산등성이를 넘어서자 거짓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빽빽한 나무 사이로 짐승들이나 다닐 법한 오솔길 하나가 나 있었다. 더 걸어가자니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모험심이랄까 오기랄까 그런 것들이 치밀어 올라 발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솔길의 끝자락에 이르자 세찬 물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생각했던 내파리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이 차올랐다. 나는 심호흡을 내쉰 다음, 오솔길의 끝자락을 돌아섰다. 그러자 깨끗한 자갈 밭 너머, 자그마한 폭포가 있는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게다가 계곡 근처 버드나무 아래에는 텐트치기 좋은 평평한 바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꿈에 그리던 광경과 조우했다는 경외감이 들었다.
계곡 옆 바위에 텐트를 치고, 버드나무 사이로 해먹도 연결했다. 마침내 내가 그리던 완벽하고도 특별한 휴가의 그림이 완성된 것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혜리에게 보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와 버린 탓인지 수신 안테나가 뜨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오히려 전화 때문에 휴가를 방해 받을 일이 없으니 더 좋은 거라고 위로했다.
해먹에서 혼곤하게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텐트에서 책을 읽었다. 물소리도 들었고 맑은 물에서 노니는 물고기도 봤다. 바람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시간을 죽여보기도 했다. 홀로 보내는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해가 질 무렵에는 무료해서 하품이 나왔다. 하지만 낮잠을 잔 덕분인지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고, 그래서 또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못 견디게 심심하고 싶었는데 막상 심심하고 보니 혜리가 그리웠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여전히 수신 안테나는 보이지 않았다.
산속의 밤은 무서운 속도로 찾아왔다.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깜깜해 졌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계곡은 어둠에 푹 잠겼다. 하늘의 별빛은 내 주위를 둘러싼 어둠을 깨는 데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 여름인데도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허여멀건한 것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스쳤다. 오싹했다. 나는 배낭을 뒤적여 렌턴을 켰다. 텐트 안을 밝힐 만큼의 환한 불빛이 내 주위를 감쌌다. 그러나 이내 켜 놓은 불빛 주위로 모기들이 몰려들었다. 거대한 풀벌레가 렌턴을 향해 날아와 대가리를 부딪치기도 했다. 거대한 자연이 나를 습격하는 것만 같았다. 다급하게 텐트 입구를 잠갔다. 자연은 사라지고, 인공의 구조물이 나를 감쌌다. 한숨을 내쉬며 침낭에 누웠다. 문득 누구든 사람이 보고 싶었다. 날이 밝자마자 여기를 나가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새소리에 잠을 깼다. 텐트 주위가 환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푸르스름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자연은 평온했다. 대단한 재난을 이기고 살아남은 기분이었다. 시계를 봤다. 오전 5시였다. 지금 출발하면 그럭저럭 점심 무렵에는 혜리가 예약해 놓았다는 호텔 수영장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텐트를 걷으려고 지주대를 뽑다가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해가 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만의 특별한 휴가를 보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텐트를 걷어버리면 어제의 휴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나는 나만의 휴가가 특별했음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텐트 속에 누워있는 나, 해먹에 누워 책을 읽는 나, 폭포를 배경으로 선 나, 커피를 마시며 사색을 즐기는 나, 텐트를 걷어놓고 아쉬운 표정을 짓는 나… 수십장의 사진이 핸드폰에 쌓였다. 뭐랄까 충족감 같은 것이 생겨났다.
오솔길을 벗어나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수신 안테나가 떠 있었다. 혜리에게서 온 부재 중 전화도 여러 통이었다. 나는 혜리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내가 찍어놓은 셀카들부터 먼저 페이스북에 올리기 시작했다. 아직 새벽 7시였다. 어차피 혜리가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올려놓은 사진들을 죽 연결해 놓고 보니 자연에 안겨 휴식을 취하는 나의 모습이 제법 산악인처럼 보였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혜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혜리 목소리가 떨렸다. 책망하기는커녕 어제 연락이 안 돼서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갑자기 콧날이 시큰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혜리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나는 무조건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혼자 가는 휴가는 이번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혜리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점심때 호텔 수영장에서 보자는 말로 용서를 대신해 주었다.
혜리가 새로 산 비키니는 호텔 수영장에서 보호색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유니폼처럼 똑같은 비키니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썬크림이 둥둥 떠 있는 수영장을 반 바퀴나 돈 끝에 썬배드에 누워있는 혜리를 발견했다. 혜리는 나를 보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혜리 곁으로 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썬크림 향이 짙게 묻어났다. 혜리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나를 밀쳐 냈다.
나는 혜리 옆에 누웠다. 클럽 음악이 시끄러웠지만 스르르 눈이 감겼다. 비로소 안락했다. 혜리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는 눈을 부비며 혜리를 돌아보았다. 혜리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들이밀었다. 보니 내 페이스북의 화면이 떠 있었다. 내파리에서 찍은 사진들 아래 42개의 ‘좋아요’가 클릭되어 있었다. 평소에 비하면 꽤 많은 양이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 캠핑을 하다니 너무 멋있다는 댓글도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내파리, 이런 곳인 줄 몰랐네. 멋있다.”
“완벽했지.”
“다음에는 나도 데려가.”
나는 대답대신 혜리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혜리는 내게서 손을 빼더니 자신의 핸드폰을 뒤져 또 다른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혜리의 페이스북 계정에 있는 것들이었다. 혜리와 함께 갔던 중식당, 함께 머물렀던 디저트 카페, 함께 잤던 펜션에서 나는 한결같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엊그제 싸울 때 혜리가 했던 말대로 나는 정말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행복한 커플이었고, 우리의 휴가는 근사하다 못해 화려해 보였다. ‘좋아요’와 부럽다는 댓글이 모든 사진마다 수십개씩 달려 있었다. 생경한 기분으로 멀뚱멀뚱 페이스북의 사진들을 쳐다보는 내게 혜리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파고들었다.
“이번 휴가 행복했어.”
나는 다시 눈을 감고 나른하게 말했다.
“그럼 좋았지.”
나만의 특별한 휴가는 지금 완성되고 있었다.
배상민 / 『자음과 모음』으로 등단했으며 소설집 『조공원정대』 가 있다. 장편소설 「페이크픽션」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