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착한 사마리아인의 길을 함께 걸어요 나눔과 공존의 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사회 약자 외면하는 세태 만연 스스로 인생 방향 고민해 보고 ‘옳은 길’ 선택하는 노력 필요
발행일2017-08-27 [제3059호, 4면]
일러스트 조영남
■ 외로운 섬들
오늘도 전철 안에서 묵주기도를 하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조심스레 더듬어 봅니다. 무표정한 대부분의 시선은 그저 스마트폰에 집중할 뿐입니다. 자그마한 세상인 한 칸 기차 안에 무수히 많은 사람은 고립된 섬들인 듯싶습니다. 젊음을 바쳐 세상을 보듬었던 수많은 노인들이 아무런 돌봄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어갑니다. 나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젊음의 열정과 패기를 발산하지 못하고 풀이 죽어 고개를 숙입니다. 나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수백 수천 일을 길거리에서 불법해고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무리한 국책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수장당한 2014년 4월 16일에 머물러 죽음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광기 어린 군인들의 성노예가 되어 온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진 앳된 소녀들이 할머니가 되어서도 피눈물을 토해냅니다. 나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자그마한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아름다운 하나를 이룬 다도해는 저 멀리 남쪽 나라의 꿈같은 이야기일 뿐, ‘살아있는 작은 섬들’은 ‘나만 아니면 괜찮아’라고 애써 읊조리며 ‘서서히 죽어가는 외로운 섬’이 되어 세상을 표류하고 있습니다.
■ 물음을 던지지 않는 사람들
세상이 삭막해졌다고 합니다. 살아남기 위한 죽음 같은 경쟁이 이미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왜 사는가?’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참된 삶인가?’라는 물음은 이미 용도 폐기되어 쓰레기통 한구석에 버려진 듯합니다. 그저 숨 쉬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고, 숨이 멎으면 그뿐이라는 듯합니다.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을 살아내는 것도 대견합니다. 그만큼 오늘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왜 오늘이 힘든지 묻지 않습니다. 아니 물을 기력이 없습니다. ‘나’ 하나도 버겁기에 ‘너’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왜?’라는 물음을 가지는 순간 그만큼 뒤처지기 때문에, 애써 ‘왜?’를 삶에서 지워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물음을 버리는 삶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련한 자구책인지도 모릅니다.
■ ‘착한 사마리아인의 길’과 ‘카인의 길’
십인십색의 인생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9-37 참조)의 길’과 ‘카인(창세 4,1-16 참조)의 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함께합니다. 카인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자 착하고 온유한 동생 아벨을 가차 없이 죽입니다. 두 길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하지만, 극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함께’와 ‘홀로’, ‘공감’과 ‘멸시’, ‘공존’과 ‘경쟁’, ‘나눔’과 ‘독점’, ‘섬김’과 ‘억압’, ‘살림’과 ‘죽임’ ….
■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함께 걸어요!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길’과 ‘카인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선한 양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느 길을 걸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습니까? ‘카인의 길’을 강요하는 살맛 나지 않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기쁨과 희망 가득 머금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혹시 ‘카인의 길’을 걸으면서 애써 ‘착한 사마리아인의 길’을 걷고 있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잠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걸어가야만 할 길’로 힘차게 한 걸음 내딛길 바랍니다.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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