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눈 떠보니 후진국…‘잼버리 트라우마’ 어쩔 것인가
2023. 8. 11. 14:24
https://v.daum.net/v/20230811140516278
12일 막을 내리는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는 긴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 세상에, 영국 청소년들이 폭염보다 화장실이 더 끔찍하다고 사흘 만에 캠핑장을 뛰쳐나가다니.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참석한 영국 대원들이 이달 6일 열악한 행사장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철수를 준비하는 모습. 부안=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매트 하이드 영국 스카우트대장이 BBC방송에 대고 “수천 수만 명이 쓰는 화장실을 규칙적으로 치우지 않는다고 전에도, 중간에도, 수없이 조직위에 얘기했는데, 해결하겠다고 약속하고도 그대로여서 실망했다”고 한 것도 한국의 수준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대통령이 주요국가 7개국(G7) 회의에 초대됐다고 우리나라가 선진국인 듯 잘난 척 할 일이 아니었다. 화장실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새만금 잼버리 조직위원장인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고, 세계적 행사엔 위원장이 많을수록 좋다고 믿었는지 그 조직위원장을 다섯 명이나 앉히는 인사였으며, 그러고도 할 일을 못한 무책임한 태도였다. 그래서 화장실보다 부끄러운 국제 망신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 “전임 정부 탓” 지긋지긋하다
새만금 잼버리 주무 부처는 대한민국 여가부다. 그 놈의 “전임 정부 탓” 듣자고 국민이 정권 교체한 게 아니다(남녀차별하는 건 아니지만 남 탓을 입에 올린 자들은 주로 남자였는데 참으로 남자답지 못한 짓이라고 본다). 2017년 8월 1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2023년 개최지로 새만금이 선정되자 정현백 당시 여가부 장관은 말했다. “앞으로 우리 정부는 지속적인 민관 협력을 통해 2023년 새만금 세계잼버리의 성공적 개최를 준비하겠다”고. 그럼 다음 정권 여가부 장관이 준비 잘하면 될 일이었다.
우리 국민도 당연히 현 정부 여가부 장관이 잘하고 있을 줄 알았다. 1년 전 2022년 8월 18일 국회에서 야당 이원택 의원이 “배수 시설이나, 화장실, 급수대 등 시설들이 늦어지고 있다”고 지적하자 현 정부 여가부 장관 김현숙이 “거의 완료 됐다”고 큰소리친 건 하도 많이 보도돼 온 국민이 다 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지난해 9월 21일 처음 잼버리 행사 준비현장에 방문해 브리핑을 듣고 있다. 사진 여성가족부
사실 그때까지 김현숙은 현장에 가보지도 않았다(주무장관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처사다). 다음 달인 9월 21일 처음 현장에 행차하신 장관의 보도자료를 지금 보니 가관이다. “전북도, 부안군, 조직위 관계자들과 함께 잼버리 시설 조성과 영내·외 프로그램 준비 상황 등을 ‘세심히 살펴’ 보며 논의했고, 새만금 세계잼버리가 열리는 8.84㎢(약 267만 평)의 부지는 지난해 (즉 2021년) 9월 매립 준공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새빨간 거짓말 보도자료를 잘도 만드는 대한민국 공무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 무식하면 용감하다
단언컨대 김현숙은 세심히 살펴보지 않았다. 수만 개의 텐트가 들어설 갯벌 매립공사가 끝난 것이 2022년 12월이니 현장 점검 때는 공사 중이었을 거다. 김현숙이 제 정신이면 “큰일 났다. 이런 상태로 텐트 칠 수 있겠냐”며 국무총리실이든, 대통령실이든 달려가 비상벨을 울렸어야 했다. 그러나 보도자료 사진을 보면 그는 평화롭게 조감도를 보며 브리핑을 받을 뿐이었다(개발연대로 불리는 1970년대 박정희 시대 관료들의 ‘브리핑 행정’, 그 권위주의적 형식주의적 유산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도 한심하다).
그리고는 10월 국정감사에서 이원택이 또 “잼버리 개막일이 10개월 남았는데 잘 진행될 것 같냐”고 묻자 김현숙은 “물론이다” “태풍, 폭염에 대한 대책도 다 세워놓았다”고 자신 있게(심지어 가볍게) 답했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건가, 국민을 개돼지로 아는 건가. 그러고 보면 윤석열 정부의 장관들 발언은 하나같이 자신만만하고도 가볍기 짝이 없다. 원희룡, 한동훈, 이상민 등등. 대통령 총애가 하늘을 찔러 절대 경질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인가.
이원택 더불어민주당 의원. 동아일보DB
이원택은 “두고 보시라. 역사가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국회 속기록에 기록해 두었다. 역사까지 갈 것도 없다. 이미 김현숙은 전 국민 앞에 죄인이다. 윤 대통령은 여가부 장관을 당장 문책 경질해야 마땅하겠으나 실은 매우 복잡할 듯하다.
● 대통령은 왜 다섯 명이 아닌가
잼버리 책임자가 김현숙 한 사람이 아니어서다. 아무래도 김현숙으로는 못 미더웠던지 2월 28일 공동위원장으로 기존 2명(김현숙과 김윤덕 민주당 의원) 체제에서 행정안전부 장관·문화체육관광부 장관·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가 추가 선임돼 5명 공동위원장 체제가 됐다.
‘책임 총량의 법칙’이 있다. 무릇 책임이란 한 사람에게 맡겨야 죽으나 사나 혼자 짊어지고 가는 법이다. 여럿이 나눠지면 누구의 책임도 아닌, 무책임이 돼 버린다. 책임자가 많을수록 좋다면 대통령도 다섯 명씩 뽑지 왜 한 명만 뽑겠나(국민은 대통령을 분명 한 사람만 뽑았는데 VIP1과 VIP2가 있다는 소리가 용산에 떠돈다고는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달 2일 오후 전라북도 부안군 새만금에서 개최된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개영식에 참석해 환영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은 “엄연히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지라 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말한 바 있다. 김현숙에게 법적 책임을 딱딱 묻는다면, 온 국민 ‘국제 망신’을 시켰다는 게 과연 문책 사유가 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문책을 하려면 다섯 명의 공동위원장을 똑같이 하든가, 적어도 세 장관에게는 같은 처분을 내려야지 여가부 장관만 경질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공동위원장을 다섯 명이나 앉힌 용감한 인사 그 자체가 더 큰 문제는 아닌가?
● 문 정권-전북, 사기극 벌였다
전현 정부의 상호 비판보다 가슴 아픈 것은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는 호남 비판이다. 물론 새만금 안에 이미 매립된 괜찮은 장소가 있음에도 굳이 그 뻘밭을 행사장으로 정한 전북도의 시커먼 속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잼버리를 구실로 공항이나 온갖 사업 예산을 따내고도 모자라 매립을 앞당기겠다고 일부러 그런 부지를 택했다는 데는, 국민적 분노와 배신감이 치솟을 판이다.
오죽하면 한겨레신문에 이런 글이 실렸을까. “왜 수풀 우거진 곳들 놔두고 허허벌판 매립지에서 잼버리를 열까? 잼버리의 성공이 아니라 그 핑계로 갯벌을 없애는 게 진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왜 이렇게 매립에 목을 맬까? 그래야 토건자본에 돈이 되기 때문이다. 농지관리기금 1845억 원이 그렇게 편법 전용돼 토건자본의 이윤이 됐다. 모두 우리 세금이다. 바로 이런 게 카르텔이다.”(8월 9일자 사회학자 조형근).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말을 김나희 새만금신공항백지화공동행동 홍보국장이 용감하게 동아일보에 해주었다. 전임 문재인 정권과 전북도가 청소년을 희생양 삼아 전 세계를 상대로 사기극을 벌였던 것이라고.
● “국가를 못 믿겠다” 서바이벌 가치관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책이 있다.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이 2021년 내놨을 때만 해도 한국은 경제규모 세계 9위였다(GDP 기준). 이젠 아니다.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BTS는 한국어로 부른 노래로 빌보드 1위를 거뜬히 해내지만 정치인은 그런 BTS를 감히 모란봉악단처럼 동원하려 들었다.
그래서 궁금한 거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훨씬 잘 살게 됐는데 왜 눈 떠보니 후진국이 된 것일까. 생활 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 더 이성적 합리적이 되고, 타인에 대한 신뢰와 관용도 높아진다고들 생각한다. 꼭 그렇진 않다는 게 2023년 세계 가치관 조사에서 드러났다. 이 가치관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안전’에 대한 판단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안한 것이다.
‘월드 밸류서베이’에서 발표한 2023년 가치관 지도. 세로축은 아래로 갈수록 종교에 대한 헌신, 부모에 대한 공경심, 국가에 대한 강한 자부심, 권위주의, 낙태에 대한 반대를 드러낸다. 가로축은 왼쪽으로 갈수록 경제적 물질적 안전 중시, 타인과 국가에 대한 불신, 동성애 반대, “나는 매우 불행하다”는 표현이다. 아래 그림은 1996년의 가치관 지도.
한국은 어느 쪽에 있는지 봐주시기 바란다. 유교권 중에서도 옛 공산권과 더 가깝지, 일본과도 멀고 유럽과는 더 멀다. 세로축으로 보면 중국보다 왼쪽이다. 1996년과 비교하면 중국보다 훨씬 왼쪽으로 가버렸다. 집단주의나 행복도, 불안 정도가 거의 러시아나 가나 수준이다. 정권만 바뀌면 적폐청산이다, 부역자 색출이다 해가며 지금까지 배워왔던 역사와 가치관이 뒤바뀔 판이니 어떻게 불안하지 않을 수 있나. 그러니 타인을, 정부를, 미래를 못 믿는다는 얘기다. 그래서 아기도 안 낳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서럽고 불쌍하다.
● ‘신뢰 자본’이 답이긴 하지만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신뢰 자본’이라는 답은 나와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게 바로 그것인데 그걸 살리기 위해선 사회 지도층이 앞장서야 한다. 그런데 어쩌랴. 새만금 잼버리가 보여줬듯, 김현숙처럼 공부 잘해 고위공직자가 된 엘리트들은 무능하고 무책임하게 잼버리를 망쳐 신뢰 자본을 잡아 먹었다.
이들 사회 엘리트가 신뢰 자본을 깨뜨렸을 땐 허리가 부러지게 벌을 줘야 사회가 달라진다는 주장도 나와 있다. 이(빨) 없으면잇몸으로 사는 법. 책임의식 없는 정치 권력을 겪으면서 국민도 내 새끼만 챙기며 이성 아닌 감성, 아니 본능과 눈치만 발달시켰다.
어쩌면 새만금 잼버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같은 위기일 수 있다. ‘마지막잎새’처럼 지켜볼 일이다. 이 정부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