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이 가르치는 슬픔과 온유
갈릴리호수 근처의 언덕에 있는 팔복교회제단의 십자가 앞에는 중세 때 사용한 악보가 하나 펼쳐져 있다.
음표의 머리는 있는데 꼬리는 없는 악보다.
예수의 ‘산상수훈’에 음을 단 악보였다.
‘팔복’이 하나씩 시작될 때마다 라틴어로 대문자 ‘B’를 달아놓았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그 자체가 노래였다.
우리의 고집을 허물고, 잘남을 허물고, 착각을 허물면서 잦아드는 음표들.
그 음표안에 깃든 온유한 폭풍. 그게 ‘산상수훈’이다.
그래서 여덟 개의 ‘B’로 가득한 악보가 여덟 개의 ‘B’로 가득한 삶을 노래한다.
산상수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마음을 노래한다.
하나님 나라를 가득 채우는 신의 속성을 노래한다.
그 속성이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
예수는 그 속에 깃드는 여덟 가지 방법을 일러준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 5:4)
인간은 삶의 희로애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아무리 백만장자라 해도, 제아무리 절대 권력자라 해도 이를 피할 수는 없다.
막상 마주하면 감당하기 벅찬 일, 그것이 바로 ‘애(哀)’. 슬픔이다.
예수는 달리 말한다.
슬퍼하는 사람들, ‘애’를 품은 사람들. 그들이 행복할 거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슬픔은 늘 ‘상실’을 전제로 한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무언가를 놓쳤을 때, 누군가와 이별할 때 슬픔이 밀려온다.
그래서 슬픔의 바닥에는 상실의 강이 흐른다.
예수는 그런 ‘상실감’을 소중히 여겼다.
왜 그랬을까.
무언가를 잃어버릴 때 우리의 무릎이 꺾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릎이 꺾일 때 우리 안에 구멍이 뚫린다.
슬픔의 구멍, 상실의 구멍이다.
위로는 어디를 통해서 올까. 그 구멍을 통해서 온다.
신의 속성은 인간과 세상과 우주에 대한 ‘평형수’이다.
내가 무릎을 꿇을 때, 나의 고집이 무릎을 꿇을 때, 나의 에고가 무릎을 꿇을 때 뚫리는 구멍을 타고 ‘평형수’가 밀려온다.
그게 위로다. ‘하나님 나라’에서 밀려오는 근원적인 위로다.
자신의 무릎을 꺾은 이에게는 위로가 찾아온다.
에고를 빳빳이 세운 채 스스로 무릎을 꺾지 않은 이에게는 위로가 찾아가지 않는다.
그의 내면에 슬픔의 구멍, 상실의 구멍이 뚫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하지 않았을까.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슬퍼하는 사람들이라 말한 이들의 슬픔은 어떤 슬픔인가.
“마태복음에선 ‘펜툰테스(Penthoun-tes)’라고 썼다.
이건 상실의 슬픔이다. 사별 등 매우 소중한 걸 잃은 극심한 슬픔을 뜻한다.
누가복음에선 ‘클라이온테스(Klaiontes)’란 말을 썼다.
그건 땅을 치면서 우는 걸 뜻한다.”
예수는 무슨 단어를 썼나.
히브리어로는 ‘사파드(Sapad)’다. 애통해하면서 우는 걸 뜻한다.
예수님은 이 말을 썼을 것이다.
슬픔은 감정이고, 우는 건 표출이다. 사파드에는 이 두 의미가 통합돼 있다.
이상하다.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한가.
그 답이 ‘위로’에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성서를 기록할 때 수동태를 많이 썼다.
‘하나님’이란 주어를 생략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 구절의 ‘위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된다.
슬프다고 다 위로를 받는 건 아니지 않나.
“이런 말이 있다. ‘슬픔은 비와 같다. 장미꽃을 피울 수도 있고, 진흙탕을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슬픔도 선택의 문제다.”
우리의 일상에 극심한 슬픔이 닥칠 때는 어찌해야 하나.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다.
우리가 명심할 건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는 거다.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위로가 말이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난다.
고통이 와도, 슬픔이 와도 두렵지만은 않게 된다.
그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 줄 아니까.”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난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 5:5)
온유하지 않은 이들은 누구일까. 고집이 센 사람들이다.
이번에 예수는 ‘고집’을 겨냥한다.
고집이 뭘까. 내가 세운 ‘잣대의 성벽’이다.
사람들은 내 땅을 지키기 위해 성벽을 쌓는다.
그 성벽이 자신을 적으로부터 지켜줄 거라 믿는다.
그래서 아군에게는 성문을 열고, 적군에게는 성문을 닫는다.
그래야 내 땅이 지켜지니까.
‘예수의 눈’으로 보면 다르다.
그건 성벽이 아니라 ‘감옥’이다.
신의 속성은 이 우주에 가득하다.
이를 외면한 채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다.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이처럼 역설적이고 파격적이고 혁명적이다.
예수는 말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 5:6)
예수가 말한 의로움이란 뭘까.
언뜻 생각하면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
선교를 하다 목숨을 잃은 초대교회의 사도들,
지금도 오지로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교사들.
그들이 바로 의로움에 주린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예수가 말한 의로움은 약간 달랐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크고 위태로운 행위를 가리킨 건 아니었다.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체다카(Tzedakah)’이다.
‘어떤 기준에 부합되다’라는 뜻이다.
예수는 무엇에 부합될 때 의롭다고 했을까.
또 무엇에 목마를 때 의롭다고 했을까.
‘우리의 삶이, 우리의 마음이 무엇에 부합될 때 진정한 행복감을 얻을까?’
답은 하나였다.
산상수훈의 팔복을 관통하며 예수가 강조하는 단 한 가지. 다름 아닌 ‘신의 속성’이다.
그것과 부합될 때 비로소 우리는 흡족해진다.
다른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의로운 사람일까.
하나님의 마음, 신의 속성을 갈구하고 목말라하는 사람이다.
그에 부합하는 사람들, 예수는 그들을 향해 “의로운 사람들!”이라 불렀다.
그러니 거창하게 목숨을 걸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내 안의 고집을 하나 꺾을 때, 내 안의 집착을 하나 내려놓을 때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된다.
예수는 그런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여라. 하나님의 마음에 주리고, 신의 속성에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함’을 얻을 것이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한 마디로 길이다.
어떤 길일까.
우리의 마음이 하늘나라의 마음을 닮아가게 하는 구체적인 길이다.
고 차동엽 신부는 “성서에는 두 기둥이 있다. 하나는 주님의기도(주기도문)이고, 또 하나는 산상수훈이다”고 했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산상수훈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큽니다.
왜냐고요? 그 속에 아주 구체적인 길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가 던진 한 마디는 이랬다.
행복하여라!
우리는 대부분 에고를 중심으로 보고, 듣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게 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의 마음’을 ‘하나님 나라의 마음’으로 바꾸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지적하며 하나님 나라의 마음을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왜냐고요?
나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의 마음을 닮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될 테니까요.
〈백성호의 예수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