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은 기회를 주시고 성공은 그것을 사용함에 달려 있다.” (MYP147) “ God gives opportunities; success depends upon the use made of them. ”(MYP, 148)
☆“현재의 생애에서 우리는 내세를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청년, 17) “In this life we are preparing for the future life. ”(MYP, 17)
☆“청년 남녀들은 그들의 청년의 힘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부름을 받았는바, 그들의 힘의 활용과 예민한 생각과 힘찬 행동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동료 인간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 복음 교역자, 65. ”(청년, 20) “Young men and women are invited to give God the strength of their youth, that through the exercise of their powers, through keen thought and vigorous action, they may bring glory to Him and salvation to their fellow-men.--"Gospel Workers," page 67.”(MYP, 20)
그토록 고생하며 유학한 것을 모름 이곳 매거진에 게재된 문서가 잘 보이지를 아니하여 아래 다시 한번 복사해 놓습니다. 가족인데도 그렇게 많이 고생하며 공부한 것을 조금은 알았지만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잘 몰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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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4. 30. 부모가 대총회에서 남미파라과이 선교사로의 부름을 받고 가게 됨으로 음악을 전공한 아들이 희망한 이태리유학의 계획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부모가 파라과이 선교사로 교포와 원주민을 위해 봉사하던중 류교수는 파라과이 위생병원 원주민 의사들과 직원으로 구성된 합창단을 조직하여 찬양지휘를 하면서 그의 소문이 교포사이에 퍼지고 당시 찬양지휘자가 없었던 감리교회에서 찬양지휘자로 초청이 와 선교목적으로 봉사하게 되면서 우리교회와 좋은 유대관계를 맺게 되고 우리의 진리를 전할 기회의 문이 열리게 되었으며 선교책자들을 많이 전하고 담임목사와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딸가진 어머니들이 몹시 탐을 내었는데 한국의 영락교회의 피아니스트의 어머니 권사가 무척 좋아해 한국에서 불러들여 교제하게 했으며 마침내 개종후 침례를 받고 1985. 8. 22. 본교회 원주민 중앙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게 될 때 부라질 선교사 최목사님의 주례에 아르헨티나 선교사 이목사님의 사회와 감리교합창단이 류교수가 작사곡한 축하를 부르는 전례 없었던 이색적 결혼식을 거행케 되었다.
이태리 유학을 소원하던 아들에게 우리 부모는 유학을 가려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가던가 결혼을 하면 유학을 포기하던가 하라고 하였더니 둘다 택한다고 하므로 그러하다면 파라과이 이주하고 남은 돈은 10,000불 밖에 없으니 이것으로 1일을 살던지, 1 달을 살던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이태리합회에 서신을 보내고 받은 추천서 1 장을 주면서 1985년 10월 9일 (수) 오후 4:15 분에 아순시온 공항을 떠나보낸 그의 유학의 길이 그렇게 고생길이 되었음을 몰랐다.
6 년간 이태리에서 2 국립음악대학원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4촌들과의 이야기 속에서 고생하며 유학한 것을 조금 알게 되었다. 당시 선교사의 급료도 얼마 되지 아니하여 그후 한번 아들의 초청을 받고 이태리 방문시 조금 도운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돕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측은하게 느껴지며 죽을 고생을 하며 공부했기에 음악의 가치를 더욱 체득한 모양이다.
보람된 한가지 일은 차차 형편이 나아지면서 한국에서 친구와 후배들을 초청하여 재미있게 살고 있었는데 1989년 방문했을 때 10여명이 되었으며 한인로마예배소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8. 10. 안식일 밤에 류교수를 소장으로 집회장소는 소장의 집으로 하고 오정현 교회서기, 재무, 조은순 안교장, 박철홍 선교회장, 손영란 도르가회장 남봉규 청년선교회장, 기타 각부서기들을 선출후 최초의 SDA 로마 한인예배소를 조직 출범시키게 된 일이다. 그곳에서 유학중 한국국립 오페라단장 일행이 이태리 여행차 로마에 왔을 때 만나서 식사를 나눈 일과 류교수의 실력을 보고 귀국하면 오페라 첫무대에 서게 하겠다는 단장의 약속대로 유학귀국후 "운명의 힘" 오페라 주연으로 무대에 서기 시작하면서 갈채를 받으며 국내 방송사들과 국제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유학중 파라과이 국영 방송국을 빌린 교민과원주민 위안의 밤 잔치 독창회 연주로 기립박수를 받으며 전국에 방영되고, 대사가 초청한 세계 대사가족 리셉션 자리에서의 세계민요 명곡 등의 독창회에서도 기립박수를 받고 대사, 영사, 참사들의 칭찬를 받으며 사례금은 파라과이 한글학회에 기증하고 이태리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 YY L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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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GREEN (저스트그린) 2015, 01/02 - 성악가 류재광 (주) Road Story, Walk Style - Outdoor Magazine
노래 한곡, 그 5분에 인생이 있다. '성악가' 류재광
글 박세환: 사진: 박시현
인터뷰 내용
음악은 우리 삶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부분인거 같다.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시간에도, 연인과 함께 사랑을 속삭일 때도, 추억을 회상할 때도 음악은 항상 그 자리에 함께 있다. 우리나라에서 안 서본 무내가 없다는, 말 그대로 국내 최정상의 길을 걸어온 성악가, 류재광 교수 프로필이 한마디로 장난이 아니다. 그를 만나 성악과 클래식 음악, 그리고 살아감에 대한 이야이르 나눴다.
성악가 류재광 프로필 ...... ...... ......
음악이 바로 인생이다 만나자마자 "음악은 무엇인가?" 라는 무식에 가까운 나의 질문에 대해 류내광 교수가 제일 먼저 던진 말은 "음악이 바로 인생이다" 라는 말이었다. " 그러면서, 음악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향을 풀어놨다. "음악 하는 사참람들은 모두 마찬가지다. 돈하고 움악 중에 택하라 그러면 모두 음악을 택한다. 음악에 모든 혼을 싣고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하는 사람들은 순수하고 솔직하고 앞뒤 잴 줄도 모른다. 내가 이걸 하면 이득이겠다. 저걸하면 손해겠다. 이런 이해타산이 없다. 있는 감정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 예술 아닌가. 그런 표현예술을 평생 머라 속에 넣고 살다보니 그런걸 거다. 흔한 예를 들어서, 누가 강압적인 자세로 "너 여기 와서 노래 한마디 해, 돈 많이 줄께" 이러면 안한다. 그렇게 강압적인 건 안한다. 강압적인 노래를 할 수 없다. 노래는 마음에서 울어나와야 한다. 내 마음이 동할 때는 돈 한푼 없어도 한다."
제대로 된 움악은 기분 좋은 상태에서만 나온다 단지 음악인들 뿐만 아니라, 미술을 하는 사람도, 그외의 다른 예술인들도 마챤가지일 것이다. 제대로 된 노래는 마움 속에서 우러나야 된다는 그의 말은 분명 누구라도 알고 있는 말이다. 그렇지만, 쉽사리 내쟅지는 못하는 말이다. 그렇게 하고 살기가 그리 녹녹치 않다는 것을 살아오면서 좋든 싫든 몸으로 이미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태리에서 이렇게 성악이 , 음악이 발전했을까 생각을 해보니 답을 알겠더라. 그들의 삶 자체가 음악아더라. 음악은 화난 상태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기분이 좋어야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기분을 항상 기쁘게, 희망적으로 유지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들을 보니까 늘 그렇게 살고 있더라. 항상 기분 좋은 상태더라." 노래를 잘 하시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언변도 상상 이상이었다. 답변이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꼬리를 물고 유학시절로 이어졌다,
돈이 없어 굶기를 밥먹듯이 했던 유학시절 "결혼해서 아내와 같이 유학을 갔다. 참 어려웠던 생각이 난다. 지금에야 우리도 물을 사먹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는 물을 사먹는다는 걸 상상 못했을 시절이다. 그런데 아태리에 갔는데, 물을 사먹더라. 문화적 괴리라고 해야하나?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이태리에서 집세랑, 먹는 거, 공부하는 거, 이리 저리 해서 합쳐보니 한달에 써야 할 경비가 200만원 정도 되더라. 그 당시 우리 나라 직장인 초봉이 20~25 만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이 200만원이라는 돈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난 돈이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유학 온 모든 사람들이 돈이 없었다. 예를 들면, 내가 물 사먹을 돈이 필요해 다른 유학생한테 물 값을 빌리면, 그 친구가 물을 사먹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태리가 성악의 본고장이다 보니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갔지만, 모두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유학을 오다보니 쉽지 않았다. 스파캐티 한봉지를 사서 자르고 잘라서 몇 번에 나눠 먹는 것은 기본이었다. 실제로 굶은 적도 많았다. 한번은 3일을 꼬박 굶은적도 있었다. 움직이면 배가 더 고파지니, 아내와 둘이 손잡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이태리에 음악 배우러 왔나, 돈 벌러 왔나 류재광 교수는 1985년에 이태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 당시는 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라 외국유학은 고사하고 와국 나가는 것 자체가 무촉 힘들 때다. 게다가 그당시는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시기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 당시의 유학하면 법 그대로 목숨 걸고 가야할 정도였다.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유학생활을 버텼을까? 아직도 그 곳 이름이 앚혀지지 않고 있다. 수비야코라는 곳이다. 새벽녘에 수바이코에 가서 줄을 서 있으면, 밭주인이 트럭을 타고 지나가면서, "너타, 너타" 이러면서 일 할 사람을 골라 간다. 그렇게 주안를 따라가면, 트럭이 도착하는 밭에 가서 알을 하게 된다. 주로 토마토 밭이나 양계장, 수박 밭이었다. 허라도 제댜로 못펴고 정말 하루 종일 일한다. 그렇게 일하고 나서 받는게 하루에 5만 리라였다. 그걸로 생활비 충당하곤 했다. 물론 다른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 이거 저거 정말 안해본 거 없는 거 같다.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여기에 공부하러 왔나, 일하러 왔나, 하나라도 더 배우려면 일단 먹고 버티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관객들과 함께 눈물 흘렸던 마이애미 공연 과거의 기억은 항상 가슴아프다. 그러면서, 당시에는 힘든 고통이었을지라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엔 추억 속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련함이 된다. 그렇게 힘든 생활 속에서도 버텼던 이유가 오로지 음악을 배우기 위하서였을" 터. 언제 가장 보람찼을까? 조심스럽게 기억에 남는 공연에 대해 물었다. "공연을 위해, 세계 여러나라 인가본 데 없이 많이 가 봤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 미국 마이애미에 갔던 거 같다. 교민을 위한 민요의 밤 행사였다. (성악가들도 민요를 부르시나요?) 성악가들이 부르는 민요도 많습니다. 뉴욕이나, LA, 워싱톤 같은 곳은 우리 교민이 많지만, 마이애미는 아시디시피 우리 교민이 많은 지역이 아닙니다. 작은 도시에 교인도 많지 않다 보니 위문공연을 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저희 공연이 그 당시 마이애미에서 열린 최초의 위문공연이라고 하더라고요.
이민 1세대 분들의 눈물 그 때 기억에 남는, 감동적이었던 것은, 제가 민요를 부르는데, 거기 이민 1 세대 분들이 앞에 앉아 계셨는데 모두 우시는 겁니다. 그 당시 공연에서는 그분들도 다 아시는 민요나 초창기 가곡을 불렀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분들이 북바쳐 우시는데 우리도 울컥하더라. 앵콜이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눈물흘리시는 그분들을 보고 우리도 같이 감정이 북받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목이 메고 또 그런 상황에서 앵콜곡을 부르다보니 목소리가 제대로 안나오고. 그런데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소통할 수 있었으니까. 그때 정말 "음악하길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어떤 상황이었을지 이민 1 세대라면 좋은 상황에서 넉넉하게 간 이민은 아닐터, 그분들이 느꼈던 감정의 북받침이 어땠을 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음악하길 잘했다 음악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그리고 음악은, 노래는 그 노래와 함께 햤던 수많은 시간과 기억들을 함께 머금고 있다. 마이애미의 교민분들처럼 한동안 놓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기억들이, 감정들이 노래와 함께 되살아나는 건 노래와 음악인이 가지고 있는 힘일 것이다. 사람들을 기분좋게 하고 다독여 줄 수 있는 노래를 언제까지나 계속하고 싶다는 류재광 교수. "음악하길 잘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어서 나도 기쁘고" 그가 남긴 맺는 말 한마디에는, 음악에 대한, 사람에 대한 그의 기록이 모두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