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우 여러분!
오늘부터 1년 중에 가장 거룩하다는 성삼일의 전례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마음이 너무나 불
안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의 적의와 살기가 전에 없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뭔가 큰 일이 일어날 분위기입니다. 온통 냉랭하고 적막하기만 한 밤입니다. 오직 아버지 하느
님만을 사랑하고 아버지의 그 한없는 사랑을 세상에 전하였건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비참한 죽음뿐이라
는 사실을 예수님은 뼈저리게 절감하십니다. 예수님은 다시금 마음을 모으시고,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
던 제자들과 함께 오늘 마지막 밤을 보내려고 만찬을 준비하십니다. 수년 동안 동고동락하던 제자들, 그
들과 헤어지기가 싫습니다. 가족과 재산 모두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예수
님은 뚫어지게 바라다보십니다. 이별의 만찬이 베풀어지는 자리, 제자들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냥 두고 떠나지 못하십니다. 그들에게 생명과 힘과 맑은 정신을 쏟아주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받아먹으라, 이 빵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다.??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제자
들에게 주십니다. 당신의 마음을, 당신의 정성을, 당신의 의지를, 당신의 믿음을, 당신의 지혜와 용기를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아버지의 사
랑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와 구원의 강한 약속을 하십니다. “받아마
셔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이다.??이 약속을 통해 제자들이 당신의 사랑과 힘을 온전히 믿
고 의탁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은 약속의 증표를 보여주시려고 식사 도중에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쭈그
리고 앉으셔서 굳은살이 박혀있는 지저분한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정성껏 씻기시고, 그들이 사랑과
구원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동안 자신을 따라온 제자들이 너무나 고맙고 대견할 뿐입
니다. “아버지, 세상이 저를 미워한 것처럼 이들을 또한 미워할 겁니다. 이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지켜주
시어 이들이 아버지와 저의 사랑 안에 머무르도록 해주십시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참다운 하느님을 전하고 사람들을 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에 대해 인간을 억압하는 세상의 세력들은 위기감만 느낄 뿐이었습니
다.??혹시 나의 자리가 빼앗기지 않을까, 내 권위가 실추되고 내 재산이 사라지지 않을까???위협감만 주
는 거추장스러운 예수를 세상의 세력은 이제 제거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폭력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의지는 더욱 깊어지고 더욱 확고해집니다. 세상의 세력에 굴하지 않고 꿋꿋
하고 힘차게 자신의 길을 걸어오신 예수님. 세상의 세력과는 달리 하느님과 인간을 섬기고 사랑했던 예
수님. 이런 예수님을 세상은 결국 죽음으로 몰아 부치지만, 예수님은 당당하게 이 죽음을 받아들이십니
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랑의 행위는 당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준비
하시고 맞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이 성체성사를 기념하며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님께
서 보여주신 지극한 사랑의 성사를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는 사랑의 모습...성체성사의 삶은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가운데, 주님과 우리가 하나 되
는 신비이며 우리가 본받고 따라가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서로를 잡아먹고 더 차지하려 애쓰는 이 세상
에서 당신자신을 우리의 먹이로 내어놓으신 주님의 삶은,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사랑의 소명인 것입니
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해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계십니다. 당신 제자들에게 하
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우리의 발을 친히 씻어주십니다. 당신의 사랑과 힘
을 건네시면서 제발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우리의 지저분한 발을 씻겨주고 계십니다. 이런 예수님
의 사랑 앞에 우리는 단지 자신을 내어맡기고 자신의 발을 내어놓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주
시는 그 사랑과 그 힘이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 안에 활동할 수 있게 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모두
가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의 사랑과 힘을 이웃과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시려 산골짜기로 들어갑니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그 깊은 밤, 그분의 비장한 마음이 산골짜기를 따라 퍼져나갑니다. 그분의 마음은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이 밤에도 전해져 옵니다. 그 사랑과 그 마음을 조용히 받아들이면서 우리도 예수님의 고통의
길을 함께 따라가도록 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아멘.
+ 가톨릭성가120번/ 수난의 예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