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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僞視次(진위시차)
眞:참 진, 僞:거짓 위, 視:볼 시, 次:버금 차.
뜻: 진실과 거짓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 실제 눈으로 본 사실도 다를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고사성어속담사전(故事成語俗談辭典)
한 스님이 비탈진 계곡을 따라 걷는데 앞서 가던 여인이 발을 헛디뎌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스님은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뛰어들어 여인을 끌어안고 나왔다. 그런데 여인이 허우적거리면서 물을 잔뜩 들이켠 탓으로 기도가 막혀 숨을 쉬지 못했다.
스님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자기가 할 일을 다하지 않는 것은 수도인으로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여인을 눕혀놓고 가슴을 눌러 물을 토하게 하고, 입을 빨며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그 덕분에 여인은 ‘푸’하고 숨을 내쉬며 깨어났다.
그때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같은 절의 스님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스님이 여인을 끌어안고 희롱하다니, 여인의 몸에는 손도 대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스님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평소 정진에만 힘쓰는 줄 알았는데 저럴 수가…….’ 하고 분개했다. 그리고 사음계에 빠진 스님은 응당 징계를 받아야 한다며 그길로 달려가 주지 스님에게 고해바쳤다. 때문에 여인을 구해준 스님은 파계승으로 낙인이 찍혀 사문(寺門)에서 쫓겨났다.
스님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붙들고 나는 결백하다고 일일이 변명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스님은 이 일을 통해서 내 눈으로 직접 본 사실도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진위시차란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일을 보는 관점과 시각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晋州大捷(진주대첩)
晋:진나라 진, 州:고을 주, 大:큰 대, 捷:이길 첩.
뜻: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김시민이 크게 싸웠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는 행동을 이른
다.
문헌: 남당집(南塘集),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1554~1592)은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1791년에 판관(判官)에 이어 진주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사천(泗川), 고성(固城), 진해(鎭海) 등지에서 왜적을 맞아 격파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3천 8백여 병사로 7일간 공방전을 벌여 3만 명의 적군을 살해했으나 그래도 끊임없이 침략해오자 부득이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를 해야 했다. 그러나 끝내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진주대첩은 행주대첩(幸州大捷)과 함께 임진왜란의 삼대 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진주성은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 연안에 위치하여, 동쪽은 함안, 진해, 남쪽은 사천, 고성, 북쪽은 의령에 접하고, 서쪽은 단성, 곤양, 하동을 통하여 전라도에 이르는 요지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의 왜장 하세가와 도오고로(長谷川藤五郞.장곡천등오랑)는 우도(경상도 서역)로 침입하는 동시에, 수군을 동원하여 전라도 지역 해군의 진로를 막았다. 이에 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이 창원에서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물러서니 왜군은 함안까지 쳐들어와 조선의 방어군을 격파하고, 진주성으로 들이닥쳤다. 때는 임진년 10월 5일이었다.
당시 김시민은 과거 무과에 급제해서 훈련원 판관이었는데 병조판서에게 군사 전략에 관한 건의를 했다가 채택되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진주목사가 전쟁에서 순직하자 그를 대신하여 성을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도록 지휘하였다. 하여 그 공로로 진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김시민은 성문을 굳게 닫고 친히 병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위로하는 등 사기진작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헌신적인 지휘에 감명을 받은 병사들은 왜군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총탄이 우박처럼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나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았다. 왜군이 휴식을 취하느라 총소리가 그치자 김시민은 태연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농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러자 적은 큰 대나무를 베어다 동북쪽에 누각을 만들고 그 위로 올라가서 조총을 쏘아댔다. 이에 김시민은 불화살을 쏘아 그 누각을 불태워 버렸다.
6일째 되는 밤에 적병들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성벽으로 기어오르려 하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마른 풀에 화약을 싸서 성 밖으로 던지고, 역시 불화살을 쏘아 불을 질러 적의 접근을 막았다. 도 큰 돌을 내리굴리고 끓는 물을 끼얹기도 하니, 적병들은 이에 맞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성 북쪽으로 침범하는 적의 기마대에게도 맹렬히 화살과 돌을 쏘아 저지하니 마침내 왜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김시민은 친히 성루에 올라가 퇴군하는 적병을 향하여 화살을 쏘다가 난데없이 날아온 적의 유탄에 이마를 맞아 달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김시민, 그는 육지의 이순신이라 할 만큼 용감하게 싸워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부하 사랑하기를 아들과 같이 하니,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침내 적군을 격퇴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임진 10월의 제1차 진주 싸움이다.
해가 바뀌어 계사년(癸巳年)에 또다시 왜군이 쳐들어왔다.
왜군이 패퇴하여 영남의 바닷가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의하여 전년의 진주성 싸움에서의 수치를 씻으려고 총공세를 감행하여 온 것이다.
그 무렵 명(明)나라는 일본과 화의(和義)를 진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양쪽 모두 안병부전(按兵不戰. 군사를 한자리에 멈추고 싸우지 않음)의 태도를 취했다. 명나라의 장수 유정(劉鋌)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에게 진주성을 재침공하려는 의도를 비난하고,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도 고니시 유카니가(小西行長. 소서행장)에게 그러한 계획을 취소하여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이때 조선의 군사들은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순찰사 권율(權慄) 이하 관병과 의병이 연합하여 함안에 이르렀으나, 내습하는 적군의 규모가 너무 커 대적을 포기하고 호남으로 피해 들어갔다. 그러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나서서 전의를 다졌다.
“진주는 호남의 순치(脣齒)와 같은 땅이다. 진주 없이는 호남이 있을 수 없다. 성을 버리고 적을 피하는 것은 적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힘을 다하여 적군을 막도록 하자.”
그러나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안 사람들 중에 더러는 도망치는 자가 생겼다. 이에 김천일은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사천현감 장윤(張潤)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들어가니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이 먼저 입성해 있었다.
성내의 군사를 파악해보니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나 백성들은 6~7만 명에 달하였다. 후속 지원군으로 의병장 강희열(姜熙悅), 이잠(李潛) 등이 이어서 합세하였다.
그런데 목사 서예원(徐禮元)은 겁이 많고 병법에 밝지 못하였으므로 모든 작전에서 김천일과 손발이 서로 맞지 않았다. 때문에 군사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니 진주성은 무기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김천일은 부대를 나누어 구역별로 성을 지키게 하고, 황진, 이종인, 장윤 등에게는 지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처럼 지휘 체계가 안정되니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 죽기를 맹세하며 전의를 다졌다.
6월 스무날, 왜군의 선봉이 성 경계에 이르자 오유, 이잠 등이 적군 몇 놈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오니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이튿날, 적군 약 5만 명이 성을 에워싸고 총을 쏘아대니 탄환이 비 오듯 했다. 성이 함락될 위기에 빠지자 황진을 중심으로 군관민들이 하나로 뭉쳐 결사 항거했으나 엎친데 겹치는 격으로 연일 폭우가 쏟아져 성 한 모퉁이가 무너졌다. 적들은 그 틈을 타서 공격을 해왔고, 이에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이 싸워 보았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어서 적이 성의 동서쪽에 높은 언덕을 쌓고 그 위에 목책을 세워 총을 쏘니 황진 등이 이에 불화살을 쏘아 불살랐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강희보(姜希輔)가 전사했다. 적은 또 판 모양의 큰 궤를 만들어 쇠가죽으로 여러 겹 싸서 사륜거 위에 놓고 갑옷을 입은 자가 그것을 끌고 성으로 기어올라 공격해오자 황진이 기름을 붓고 역시 불화살을 쏘아 태워 버렸다.
그 뒤 적이 몰래 성에 구멍을 뚫으려 했으나 사력을 다하여 방어하니 적병의 죽은 자가 천여 명이나 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는 중에 황진이 적의 총탄에 맞아 죽음을 당하자 장윤이 대신 나섰으나 그 또한 전사하였다.
29일,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목사 서예원은 도망하고, 군사는 흩어졌다. 김천일은 고종후, 양산주, 최경회 등과 남강(南江)에 투신하고, 이종인, 깅희열, 이잠 등은 적진에 돌격,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또 선내에 남아 있던 백성들도 모두 학살을 당하니 그 수가 무려 6만 명에 달했다.
이 싸움은 비록 패퇴하기는 했으나 임진왜란 중 최대의 격전이자 우리 민족의 애국정신을 발휘한 빛나는 싸움이었다.
싸움이 끝나자 왜군은 촉석루에 올라 승전의 축배를 들었다. 그때 기생 논개(論介)는 적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毛谷村大助.모곡촌대조)를 유인해 갑자기 껴안고 남강 강물에 뛰어들었다.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적장을 죽게 한 것이다. 지금도 촉석루 옆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의기사(義妓祠)가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鎭火救主(진화구주)
鎭:누를 진, 火:불 화, 救:구할 구, 主:주인 주.
뜻: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하다. 전북 임실의 의로운 개에게서 유래한 말로,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여 해결함을
비유하여 쓴다.
문헌: 한국문화상징사전(韓國文化象徵辭典)
개(犬.견)는 예부터 집을 지키고, 사냥, 맹인 안내, 호신 등의 역할을 해왔다. 또 요귀나 도깨비를 물리치는 능력도 있고, 상서(祥瑞)로운 일도 있게 하고, 재난을 예방해주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황구(黃狗)는 풍년과 다산을 상징하고, 초가잡과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그 고기는 허약한 사람에게 보신(補身)의 효과가 있다고 여겨 죽어서까지 주인을 위해 헌신하는 귀한 동물로 여겨왔다. 견공(犬公)이라는 말은 개를 인간 세계에 대입하여 의인화해서 부르는 말이다.
개는 신화나 전설에도 종종 등장한다.
서양의 일식과 월식에 대한 신화에서 까막나라 왕이 불개에게 해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불개는 하늘로 달려가 해를 물었지만 너무 뜨거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왕은 그냥 돌아온 개를 책망하면서 다시 달을 물어 오라고 시켰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 달을 물었으나 달은 너무 차가워서 역시 실패하였다.
일식과 월식이 생기는 것은 불개가 해와 달을 무는 현상이라고 믿었다.
우리나라 토종개로는 삽살개와 진돗개, 풍산개 등을 들 수 있는데 모두 다 충성심이 강해 주인을 잘 따를 뿐만 아니라 적을 만나면 용맹스럽게 싸운다. 그중에 삽살개는 귀신을 쫓는 영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름도 ‘살기를 찔러 쫓는 개’, 즉 꽂는다는 삽(揷)자와 해친다는 살(煞)자를 써서 삽살개라 했다.
삽살개 중에는 검정 삽살개와 청삽살개, 황삽살개 등이 있는데 민화에 나오는 삽살개는 대부분 청삽살개다.
충성심을 보여주는 개로는 전북(全北) 임실군(任實郡)의 의견(義犬)이 유명하다.
임실군 둔남면의 오수리 마을에 김개인(金盖仁)이라는 사람이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하루는 이웃마을 잔칫집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 만취한 탓으로 둑에 누워 잠시 쉬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피우던 담뱃불이 떨어져 풀밭에 불이 붙어 불길이 번져 갔다. 이를 본 개가 맹렬히 짖어댔지만 곯아떨어진 주인은 인사불성이었다.
불길이 거세지자 개는 개울로 달려가 온몸에 물을 적셔다가 주인의 주변 풀에 물기가 베게 하기를 거듭했다.
주인이 새벽녘에 한기를 느끼고 깨어 보니 풀밭이 모두 까맣게 탔는데 자기가 누운 주변만 타지 않았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자기가 기르던 개가 온몸이 젖은 상태로 죽어 있었다.
그제야 상황을 개달은 김씨는 개의 충정에 감동하여 개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주변의 나무를 베어다가 충성된 개의 죽음을 기리는 비문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거기에 심은 나무에 뿌리가 돋고, 가지가 뻗어 큰 나무로 자랐다. 그후 사람들은 그 나무를 개의 나무라는 뜻으로 개 오(獒), 나무 수(樹), 즉 ‘오수’라고 했고, 마을 이름도 오수리라 불렀다.
개는 인간과 오랜 세월을 함께 생활해 오는 동안 정이 들어 인간과 거의 동일시되어 왔다. 그래서 자기 자식을 일러 ‘우리 강아지!’하고 부르는 애칭도 생겨났다.
설화에 나타나 있는 이른바 ‘의견(義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사한 이야기가 25개 정도 된다.
위의 경우는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으로 그만큼 지능(知能)이 있다는 것이고, 주인을 위해 희생했으니 인(仁)과 덕(德)이 있다는 말이며, 물을 묻혀 불 속에 뛰어들었으니 용(勇)과 체(體)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밖에도 호랑이와 싸워 주인을 구한 투호구주형(鬪虎救主型) 이야기, 주인이 억울하게 죽자 관청에 가 짖어서 알려 범인을 잡게 한 폐관보주형(吠官報主型) 이야기, 주인 없는 사이에 아이에게 젖을 먹여 구한 수유구아형(授乳救兒型) 이야기, 눈먼 주인에게 길을 인도한 맹인인도형(盲人引導型) 이야기 등 전해지는 이야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眞孝之道(진효지도)
眞:참 진, 孝:효도 효, 之:어조사 지, 道:길 도.
뜻: 참된 효도의 길이라는 말로, 서포 김만중에게서 유래했으며 진실되고 참된 효도가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는
말이다.
문헌: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북간집(北幹集)
조선 제19대 숙종(肅宗) 때 대사헌을 지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1692)은 평소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곤 했다. 그의 소신대로 전문을 한글로 지은 <구운몽>으로 김만중은 당시 소설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김만중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익겸(金益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청나라 태종 누르하치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사태가 위급해진 인조는 연약한 아녀자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도 뒤따르려 했다. 그런데 불과 보름도 안 되어 청군이 들이닥치자 급한 나머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은 왕명을 받들어 먼저 강화도에 가 있었는데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문 위 화약고에 불을 붙여 자결했다.
그런 와중에 만중의 어머니 윤씨는 임신한 몸으로 어린 아들 만기(萬基)를 데리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637년에 만중이 태어났다.
만중의 어머니는 증조부가 영의정을 지냈고, 조부는 선조의 부마(사위)였다.
만기와 만중의 어렸을 때 스승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소학(小學)>을 손수 베껴 아들들을 가르쳤다. 친정아버지와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니 살림살이도 직접 꾸러나가야 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베틀에 매달려 명주를 짜 그것을 내다 팔아 근근이 자식들을 키웠다.
어느 날, 소년 만중의 집에 한 도부(到付)장수가 찾아왔다. 도부장수란 물건을 짊어지고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을 이른다.
제법 글을 익힌 만중은 그 장수가 가져온 책 중에 중국의 <춘추(春秋)>라는 책을 해설한 <좌씨집선(左氏輯選)>이 탐이 났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베를 짜 어렵게 살아가는 형편에 그런 비싼 책을 사달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만중은 그 책을 몇 장 들추어보다 말고 어차피 못 살 것이라고 단념하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좌씨집선>이라고 해서 대단한 책인 줄 알았더니 별것 아니네.”
그런 만중을 눈여겨보고 있던 어머니가 물었다.
“뭐가 별것 아니라는 거냐?”
“사람들이 좌씨집선, 좌씨집선 하기에 대단한 책인가 했는데, 지금 보니 별것 아니네요.”
그러자 만중의 어머니가 엄숙하게 말했다.
“네 어찌 그 귀한 책을 하찮게 여기느냐? 내가 그토록 지성으로 글을 가르쳐 주었는데 아직껏 귀중한 것과 하찮은 것을 구별하지 못한단 말이냐?”
그러자 눈치 빠른 도부 장수가 책을 팔 욕심으로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마님, 도련님이 말은 그렇게 해도 눈빛은 몹시 탐을 내는 기색입니다. 사 주시지요.”
“아니 그렇다면 마음에도 없는 헛말을 했다는 거 아니냐?”
하고 만중을 나무라고는 도부장수에게 말했다.
“그 책 아이에게 주시오.”
“값만 맞는다면 당연히 드려야지요. 좀 귀한 거라 무명 반 필 값은 주셔야 됩니다.”
윤씨는 베틀로 가더니 짜고 있던 베의 반 필을 싹둑 잘라 도부장수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도부 장수가 돌아가자 회초리를 들고 만중을 불렀다.
“어서 종아리를 걷어라. 이 어미의 낙이 너희들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구하기 힘들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만중은 베틀 하나로 살림을 꾸려가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갖고 싶은 책을 보고도 딴 말을 한 자신의 속마음을 몰라주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어머니, 실은…….”
“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러나 이 어미는 비록 끼니를 굶더라도 네 형제가 읽어야 할 책은 다 사줄 것이다. 그러니 어미의 고생을 덜어준다는 좁은 소견으로 마음에 없는 허튼 말을 하기보다는 ‘이 책을 읽고 싶습니다. 꼭 사주십시오.’ 하는 게 효도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여라.”
만중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어머니는 내 마음을 다 읽고 계셨구나. 그러니까 작은 효성보다는 내가 넓은 길로 가는 것을 바라고 계셨던 거야.’라고 생각했다.
만중은 회초리를 드신 어머니의 눈에 물기가 배어있는 것을 보고 끝내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만중은 주야로 일하느라 힘들어 하는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일부러 어리광을 부리고 우스갯소리와 우스갯짓을 했다. 윤씨는 웬만해서 웃음을 보이는 법이 없었지만 만중이 그럴 때만큼은 숨김없이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만중은 숙종 15년인 1689년, 송시열과 함께 세자(경종.景宗) 책봉이 시기상조라고 반대를 했다가 송시열은 죽음을 당하고, 그는 남해의 외딴섬에 귀양 보내져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위리안치란 유배지의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가두어 놓은 것을 말한다.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어머니께 바치기 위해 소설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한 뒤 병사(病死)하였다. <구운몽>은 이전의 소설과 다른 새로운 형식으로 한국 고대소설 문학사의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신라의 설총(薛聰)과 고려의 승려 균여(均如), 조선의 허균(許筠) 그리고 김만중 네 사람은 대중 소설의 선각자로 역사 속에 우뚝 서 있다.
숙종 24년인 1698년 관직을 복직시키고, 효행에 대한 정문(旌門)도 세워 주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次頓順命(차돈순명)
次:버금 차, 頓:조아릴 돈, 順:좇을 순, 命:목숨 명.
어의: <차돈>이 목숨을 바치다. 신라시대 이차돈이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순교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쓰인다.
출전: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 즉 묵호자(墨胡子)에 의해서였다. 아도화상은 고구려의 승려로 아버지는 북위(北魏) 탁발왕(拓跋王) 때 사신으로 왔던 아굴마(阿堀摩)다 그가 고구려에 왔을 때 고구려의 여인 고도령(高道寧)과 통정하여 아도를 낳았다. 아도가 16세 때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위나라로 갔는데 아버지 아굴마가 만나주지 않고 도첩을 주어 현창(玄彰) 스님 문하에 들어가 법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소수림왕 4년 19세 때 고구려로 돌아왔다. 440년 어머니의 권고로 신라에 들어와 선산(善山) 지역 지주(地主) 모례(毛禮)의 집에 은거하면서 신라 최초로 도리사(桃李寺)를 짓고 눌지왕의 딸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을 고쳐 주고 흥륜사(興輪寺)를 지었다.
그러나 불교가 정식으로 공인되어 포교하기 시작한 것은 23대 법흥왕(法興王) 14년 때 이차돈(異次頓.506~527)이 순교한 뒤부터였다.
이차돈의 본명은 박염촉(朴廉觸)이고 갈문왕(葛文王)의 증손으로 법흥왕의 측근에서 불교를 선양했다.
법흥왕은 불교를 좀더 넓게 포교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무교(巫敎)에 젖어 반대하고 나섰다. 왕과 이차돈은 불교를 선양하려 했으나 따라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이차돈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불교를 전파하려고 왕에게 말했다.
“신의 죽음으로써 불법이 전파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한 왕이 대전으로 들어가 신하들에게 불교 포교의 찬성 여부를 물었으나 여전히 반대했다.
“전하! 그들은 기괴한 옷을 입고 요사스러운 말을 하니 지금 막지 않으면 훗날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이차돈이 다시 나섰다.
“그 말은 옳지 않습니다. 평범치 않은 사람이 있어야 평범치 않은 길이 있는 법이거늘 어찌 그 말을 좇겠습니까?”
사실 이 불란의 씨는 천경림(天鏡林)이라는 곳에 왕이 화백회의를 거치지 않고 절을 짓는 데서 비롯되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불교를 통해 선진 문화를 수입하고 있어 신라에서도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절을 지으면서부터 가뭄과 장마로 농사가 되지 않자 대신들이 요망한 종교를 선봉하기 때문이라고 반대했던 것이다. 왕이 어려운 처지에 있게 되자 이차돈이 모든 공사의 책임을 지고 희생을 자원하고 나선 것이다.
“나는 법을 위하여 죽거니와 불법이 진실로 숭고한 것이라면 내가 죽은 후 반드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침내 이차돈의 목을 베니 그의 목에서는 과연 놀랍게도 하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꽃비가 내렸다. 이에 반대하던 신하들이 입을 닫았고, 불교가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借斧無柄(차부무병)
借:빌릴 차, 斧:도끼 부, 無:없을 무, 柄:자루 병.
어의: 자루 없는 도끼를 빌린다는 말로,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취하기 위하여 퍼뜨린 말이다. 배우자나 어떤
일을 함께 도모할 동지를 구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출전: 한국의 인간상(韓國의 人間像), 선현위인어록(先賢偉人語錄)
신라의 대승 원효(元曉.617~686)는 제26대 진평왕 39년에 내마(奈馬) 설담날(薛談捺)의 아들로, 압량(押梁. 경산.慶山)에서 태어났다.
그는 선덕여왕 15년(646) 황룡사(皇龍寺)에 출가하여 스님이 된 후 진덕여왕 4년(650)에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당항성(唐項城. 남양.南陽)에 이르러 공동묘지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근처를 손으로 더듬어 잡히는 물을 맛있게 마셨다. 다음 날 밝은 곳에서 보니 그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인간사는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깨닫고 그냥 되돌아왔다. 즉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극락도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평화와 안정이 극락이요, 마음속의 갈등과 불안이 지옥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가 어느 날 거리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누구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시오, 그러면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이다.(雖許沒柯斧 我斫支天柱.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그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효가 너무 지나치게 수행하다가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어떻게 만들어?”
“그러게 말일세.”
그 소문은 궁궐에까지 전해졌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604~661)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여봐라! 원효대사를 공주가 거처하는 요석궁(瑤石宮)에 모시도록 하여라.”
신하들은 어리둥절하였다. 비록 과부이긴 하지만 어엿한 공주의 신분인데, 승려를 그녀의 거처에 들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지엄한 왕명인지라 그대로 따랐다.
얼마 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훗날 신라의 대학자가 된 설총(薛聰)이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원효대사의 말뜻을 무열왕은 제대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즉 도끼 구멍과 도기 자루를 남녀의 생식기로 비유한 것이니, 자루 없는 도끼는 임자 없는 여인이란 듯이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이라 함은 동량이 될 탁월한 인물을 말한 것이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신하들은 모두 무열왕의 혜안(慧眼)에 탄복하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借蟲攻敵(차충공적)
借:빌릴 차, 蟲:벌레 충, 攻:칠 공, 敵:원수 적.
어의: 벌레의 힘을 빌려 적을 공격하다. 조선 중종 때 수구파 남곤 등이 훈구파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축출하
고자 나뭇잎에 꿀로 글자를 써서 벌레로 하여금 파먹게 하여 이를 핑계로 모반, 정적을 축출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조자적공(造字敵攻)도 같은 뜻이다.
출전: 한국천년인물사(韓國千年人物史)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주역 남곤(南袞.1471~1527)은 본관이 의령(宜寧)이고, 호는 지족당(知足堂) 또는 지정(止亭)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문명을 펼쳤으며 대제학을 거쳐 1523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다. 그러나 훈구파(勳舊派)의 수장으로서 정권을 주도하기 위해 죄 없는 박경(朴耕) 등에게 모반죄를 씌워 죽이고, 그 공으로 신임을 얻어 이조판서에 올랐다.
남곤의 반대파인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개혁을 주장하며 젊고 유능한 인재를 모아 신진파(新進派)를 형성했다. 그래서 남곤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자 남곤 일파는 조광조 등을 몰아내려고 같은 파 홍경주(洪景舟)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대궐 안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들이 꿀을 바른 곳만 갉아 먹게 해서 글자가 그대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 나뭇잎을 다서 중종에게 바쳐 조광조를 제거하게 했다. ‘주초는 조(趙)자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주초위왕이란 말은 조(趙)씨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었다. 조광조의 급진정책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중종의 듯을 안 훈구세력은 조광조를 제거하는 좋은 기회로 삼은 것이다.
조광조를 몰아내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은 사림파로부터 소외된 남곤파, 공신자격을 박탈당한 심정(沈貞), 조광조의 탄핵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졌던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洪景舟) 등이었다.
이들은 조광조가 왕권을 넘보고 있다고 주장하며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상소했다.
이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중종은 사림 세력을 치죄하도록 했다. 그 결과 조광조, 김정(金淨), 김구(金絿), 김식(金湜) 등이 투옥되고 이로 인하여 기묘년에 사화가 발생했다.
조광조는 유교(儒敎)로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고 개혁을 단행하려 했으나 그들의 모략적인 나뭇잎 하나로 인하여 투옥되고 그들의 끈질긴 공격으로 마침내 사사(賜死)되었다.
남곤은 만년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로 인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자신의 저서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결국 명종 13년에 관작과 시호를 삭탈(削奪)당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搶職開眼(창직개안)
搶:빼앗을 창, 職:맡을 직, 開:열 개, 眼:눈 안.
어의: 직위를 빼앗아 눈을 뜨게 하다. 즉 높은 직위에 올라 안위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서 그 직위를 빼앗음으로
써 새롭게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출전: 한국의 인간상(韓國의 人間像)
조선 제16대 인조(仁祖) 때 최술(崔述)은 일찍 과부가 된 어머니의 엄격한 가르침과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학문 연구와 글씨 공부에 전념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호조판사 김좌명(金左明.1616~1671)은 그런 최술의 재능을 인정하여 아전으로 삼아 중요한 일을 맡겼다.
하루는 최술의 어머니가 김좌명을 찾아와 아들을 직위에서 파면해 달라고 요청했다.
“도대체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아들의 벼슬을 높여 달라고 해야 옳거늘, 그만두게 해달라니….”
“대감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일찍이 지아비를 잃고 모든 희망을 그 아이에게 걸고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아이의 학문이 나날이 진전되는 것을 보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대감께서 그 아이에게 벼슬을 내리시고 중히 써 주시니 그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오히려 저는 봉록을 받아 쌀밥을 먹게 된 지금보다 겨밥을 먹던 지난날이 더 그립습니다.”
“왜 그렇소?”
“저의 아이는 아직 학문이 짧고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대감님께서 어여삐 여기셔서 중히 써 주시니까 자기가 당연히 그만한 그릇이 되어서 그런 줄 여기는 모양입니다. 이번에 그 아이가 부잣집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처가에서 밥상을 받고는 반찬이 맛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음식 투정을 했다고 합니다. 벌써부터 이처럼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야 어찌 지난날의 가난이 의미가 있으며, 또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고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아이의 직책을 벗겨 새롭게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김좌명은 부인의 말에 크게 감복하여 최술을 면직시킨 다음 더욱 학문에 정진하도록 뒤에서 도와주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