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감사 제목과 헌금 사람은 원하든 원치 않든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러한 이치는 동일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목회자가 교우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있는가 하면, 교우들로부터 목회자가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반면에 교우들간에도 상호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지난 4월 첫주일 헌금기도를 하려고 감사헌금 봉투를 살피는데 “오십일 동안 기도하게 해주시사 감사함니다.”라는 제목의 감사헌금을 발견했습니다. 아마도 작정기도를 마치고 감사의 예물을 드린가 보다 싶은 마음으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아내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무명으로 헌금을 드린 분의 사연을 간접적으로 들었노라며, 친 언니분이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데 얼마 전에 동생댁을 다녀 가실 때 언니로부터 신앙적 도전을 크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언니분의 모습은 할머니 집사님에게 크나큰 울림을 던져주었던가 봅니다. 그러기에 50일 동안 작정 기도를 이어왔었고, 마치면서 감사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러한 사연을 전해 들으며 새삼 한사람의 선한 영향력을 생각하게 됩니다. 삶의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이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적 열심을 회복하고 기도생활에 열심을 내도록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이는 참 귀한 신앙인입니다. 비록 거창한 타이틀이나 직함이 없을지라도 내 주변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에게라도 선한 영향력과 신앙인의 바른 모습과 가치를 통해서 감화를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큰 사람입니다. 자신의 종들이 땀 흘리며 힘들게 판 우물을 강탈해 가는 이들에게 순순히 내어 주기를 반복했던 이삭이야기를 창세기 26장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밥그릇조차 지키지 못하는 바보처럼 손해보고 양보하는 이삭의 삶은, 영악해야 하며 고양이 눈알처럼 반짝거리며 살아가기를 요구받는 현대인들의 관점으로 보면 참 모자라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창세기 26장 26절 이하를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나옵니다.
어리숙하고 바보같이 자신의 우물을 내어주기를 반복했던 이삭을 찾아온 블레셋왕 아비멜렉의 고백입니다. 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세기 26:26-29)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바보처럼 손해보며 살아왔는데, 이방 왕 블레셋 왕은“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기독 신앙을 일컬어 신비라고 정의합니다. 신비의 극치는 성육신 사건이지요.
초라한 구유에서 나신 아기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 기독교 신앙은 역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역설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한복음 10:17)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나 얻기 위하여 버리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삶을 통해 체득하지 않으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용사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우직하지만, 곁에 있는 한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므로 깊은 신앙적 맛과 향을 내는 이들이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고난주간입니다.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