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의 계획과 95%의 확인; 아! 위대한 영웅 박정희! ▣
지난 23일 수요일은 진주고 41회 산악반 남가람 산행일이었다. 그날은 문화탐방으로 시절 맞춤 억새 물결의 하늘공원 트레킹 후, 박정희 기념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박정희(朴正熙, 1917~1979)敎’ 신자(信者)인 본인이 참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날의 소회를 간단히 글로 정리해 본다.
만남 약속 시간 5분 전인데도 참가 예정 인원 10인 중 9번째로 월드컵경기장역에 도착했다. 계획을 조금 변경하여 맑은 정신에 박정희 대통령기념관부터 둘러보기로 하였다. 점수 친구가 미리 섭외한 차분하고 겸손한 정경원 학예사의 안내로, 거의 2시간 동안의 긴 시간인데도 지루하지 않게 지난 시절을 회상할 수 있었다.
대청마루에 해당할듯한 로비에는 박 대통령 얼굴이 클로즈업된 화면 앞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이 흐르게 장치하고 18년간의 업적을 연도별 시계로 만들어 전시하였다. 대통령의 애국정신과 철학이 유구하게 이어지기를 염원한 것이다.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은인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人情)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1917.11.14. 금오산 기슭 상모리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박정희는 또래보다 작은 체구였지만 대추방망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야무지고 당찬 소년이었다. 자기보다 덩치가 훨씬 큰 친구가 자기를 모욕하였을 때 끝까지 물고 늘어져, 잘못했다는 사과를 받아낼 정도였다. 대구사범학교 시절 박정희는 ‘나팔의 1인자’라고 불릴 정도로 나팔을 잘 불었다고 한다. 높게 울려 퍼져나가는 나팔 소리에 실어 가난에 찌든 자신의 불우한 상념을 날려버리고, 웅대한 미래를 향한 자신의 꿈을 이루어주십사 하늘에 호소하였을 것이다. 교사 시절 “꿈이 무엇이냐?” 묻는 제자에게 “훌륭한 장군이 될 것이다”라고 답한 박정희는 그때 이미 이순신처럼 나폴레옹처럼 나라에 몸 바치기로 굳게 마음먹었을 것이다.
도로 항만 철도 철강 정유 비료 시멘트. 국가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는 기간산업의 육성부터 시작하여 숨 가쁘게 달려온 ‘한강의 기적’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토대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개발의 마중물이 된 서독 차관의 실마리를 풀었던 백영훈, 대한민국 제1호 유치과학자이며, '포항종합제철소' 건립 제안 및 청사진을 제시한 김재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초대 소장으로 과학 입국의 초석을 다진 최형섭, 핵연료 국산화의 핵심 인물로 한국 표준형 원전 개발을 주도한 장인순 등 선진 한국의 밑거름이 된 걸출한 인재들을 이승만 대통령이 길러낸 것이다. 선견지명이 뛰어났던 이승만 대통령이 양성하고 배출한 수많은 우수한 인재들을 박정희 대통령은 적재적소에 최고의 예우로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능력을 그들이 가진 능력 이상으로 끌어냄으로써 우리나라는 반만년 동안의 가난과 실의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주변에는 조국과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한 위인들도 많이 있었다. 일처리의 철저함과 파사현정, 공명정대함에 있어 박정희 대통령과 쌍벽을 이룰 박태준, 청와대의 야당으로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영부인 육영수 여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경제에 숨통을 트이게 한 정주영, 이병철 등. 과연 이들이 박정희라는 푯대와 본보기가 없어도 그런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위대한 정치가는 국가와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하고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능력 있는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씀으로써 국가를 위해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다. (상대방의 약점이나 들추고 패거리 이익만을 위해 주절대고 물어뜯는 지금의 현실이라니. 왈 정치인이라는 지금의 이 쓰레기들을 난지도 쓰레기장에 매립하여 하늘공원 억새의 거름이나 되게 했으면 속이 다 시원하련만)
청와대 화장실 변기에 벽돌을 넣고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부채질로 업무를 보던 누구보다 검소하신 분. 서예, 음악, 미술 등에 조예가 깊어 예술적 감수성이 예민하신 분. 자기 이름 하나면 충분하다고 문중에서 지어 바치는 호나 자도 마다하고 그 흔한 명예박사학위도 거절하신 분. 자나 깨나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로 영일(寧日)이 없었던 분. 그 무엇보다도 철저한 계획하에 완벽한 일처리가 되게 하고 그것을 반드시 확인하신 분. 그래서 “5%의 계획과 95%의 확인”으로 밤낮없이 분주했고, 그래서 단신(短身)임에도 장신(長身)의 동행자들이 헉헉대며 따라다녀야 할 정도의 “박정희 속보”가 탄생한 것이다.
박정희! 그는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세계적인 영웅임을 전 세계 지성인들이 인정하고 있다. 오늘이 마침 박정희 대통령 서거 45주년이다. 대통령 각하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2024. 10.26.
최진경 재배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 역사 :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은 1997년 15대 대선 후보 김대중의 국민통합을 위한 공약에 의해 탄생했으며, 재단법인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공약 이행을 위해 김대중 정부는 1999년 건립과정에서 200억원이 넘는 국가보조금을 집행하기로 하고 서울 마포구 상암지구에 2002년까지 완공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박정희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등 재야 시민사회단체들이 컨센서스가 부족하다는 맥락에서 극렬히 반대하였고, 그 결과 착공 시점이 2002년으로 미뤄졌다. 그리고 2004년까지 모금액이 100억 원에 그치는 상황 속에서 노무현 정부는 2005년 행정자치부를 통해 국고보조금 회수를 명령, 공사를 중단시켰다. 이에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는 행정소송을 제기하였고, 2006년 1심부터 2009년 대법원 판결에 이르기까지 승소하여, 2010년 공사를 재개시켰다. 2011년 준공되었으며, 2012년에 개관했다. 도서관은 개관 후 1년이 넘도록 개방이 되지 않았지만, # 박근혜 정부 때부터 개방되었다. 2016년부터 약 3년에 걸쳐 기념관전시실과 도서관 등을 전면 보수했으며, 단체 관람할 경우, 기념관 측에서 안내 관광(guide tour)을 제공한다.
※ 출처; namu.wiki 박정희대통령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