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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논술 경시대회 수상 작품. 2001. 7. 28일 시행]
<영문 제시문 6번 번역문>
사용하는 교과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받아들일 과거를 가장 체계적으로 안내해 준다. 따라서, 교과서는 역사 연구의 가장 훌륭한 업적을 반영하고 있는 믿을 만한 여러 설명을 학생들에게 해주고 있다.
역사책은 하나의 사회가 자기의 과거에 대한 이해의 저장소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과 시민 지식의 핵으로서 표현해야할 것을 전달 해준다. 그것들은 지역적, 국가적, 전세계적인 시민의식에 관한 아이디어를 학생들에게 전해주어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21세기가 밝아오는 이즈음에 우리는 지난 세기에 인류에 의하여 저질러진 실수 즉, 식민주의와 전쟁과 같은 잔혹 행위를 상기해야 한다. 인류애가 지배하는 새로운 지구촌을 건설하기 위한 화해와 새로운 방향 설정이 우리가 당면한 과업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가 우리의 세계를 좀 더 민주적이고, 평화롭고, 공평하게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지식과 가치를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모든 국가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때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가르칠 때에는 학생들이 그런 문제를 조사하고 뒤돌아보는데 도움을 주는 상대적이면서도 국제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교훈은 화해를 위한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대상
김혜영(수험번호 0237 /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관하여 논쟁이 치열하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강한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추진되고 있는 이 역사교과서 발간 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본질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실증주의가 아닌 현재주의의 입장에 서있다 하더라도, 과연 그 교과서는 현재의 시각으로부터 합당하게 해석된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현재주의 사관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볼 때, 대답은 '아니오'이다.
무엇보다 이들의 변명은 현재주의와 역사왜곡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설득력을 잃고 있다. 역사가의 주관에 의해 선택되고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된 사실이 역사라고 해서 그 선택과 해석을 자의적으로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주관적인 작업은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범세계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예전에는 반란으로 규정되었던 동학농민운동을 민중운동으로 재해석하는 것처럼, 현재주의란 동시대인들이 현재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지, 자국의 편익을 위해 임의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가 과거의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으며 비난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독일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독일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쟁 도발, 약소국 침략, 인권 탄압 및 대량학살 등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과거의 행위를 반성하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각시키는 교육으로 유명하다. 독일이라고 전범국가라는 국가 이미지와 막대한 배상금이 달가울리 없지만, 그들은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과오를 인정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백년도 못 되어서 철면피를 쓰고 진실을 외면, 은폐하려 하고 있다. 이는 정당한 역사기술이라고 볼 수 없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그것이 '교과서'라는 점이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한 극우 단체가,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고 만든 부조리한 역사는 하나의 설화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제대로 인정받기 어려운, 정당성이 결여된 학설을 토대로 한 이야기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21세기의 주역인 학생들에게 교과서로 제공한다는 것은 청소년에게 거짓된 교육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진실이 어찌됐든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보고 듣고, 불리한 것은 감추고 조작하는 교육을 받고 자란 학생들이 어떤 사회인이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점차 국경의 개념이 사라져가는 지구촌 시대에 이웃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러나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부당한 상황에 대하여 보다 많은 사람이 진상을 알고, 그들의 주장이 타당치 못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역사라는 개념을 교묘하게 곡해시켜 후세대와 세계인들을 기만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비판할 때, 어불성설의 역사 왜곡이 저지되고 국제사회의 정의와 이성이 지켜질 수 있을 것이다.
금상
김민정(수험번호 0093 / 숙명여자고등학교)
현재주의적 역사관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E. H.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하였다. 이는 역사기술에서의 사관개입을 중시한 대표적인 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점은 곧 실증주의적 역사관과의 차이점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역사학에서 현재주의적 역사관이 더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까닭은, 현재주의적 역사관이 중요시하는, 역사연구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상호작용을 통해 현재에 의미있는 과거의 사실을 능동적으로 찾아 연구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역사 연구에 있어 실증주의적 역사관에 입각한 역사기술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데 있다.
그러나 제시문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역사상의 사실을 결정할 때 해석이 필수적이라 해서' 어느 해석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현재주의적 역사관은 현재에 가치있는 과거를 선택해 해석하는 '사관'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지 '우리가 사실을 왜곡하여 그것을 미리 생각해 둔 관념의 틀에 맞추어도 좋다거나, 또는 거기에 맞지 않는 사실은 무시해도 좋다고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주의적 역사관은 사관이 들어가는 만큼, 객관적이고 실증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그들의 역사교과서를 현재주의적 입장에서 변명할 자격이 없다.
일본이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일으켰던 일본은 한때 세계적인 경제대국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경제 침체와 과거 전체주의 사고방식과는 너무도 다른 새로운 세대들의 개인주의적 가치관,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아노미 상태는 현재 일본에게 큰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육의 무서운 힘을 인식하고 있는 일본이 그런 국가적 어려움을 왜곡된 역사 교육에서 만들어지는 자신감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음을 짐작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도구'가 아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정체감을 가지게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역사 교육이 중시되고 있다는 점을 그러한 방향으로 악용하는 일은 당연히 옳지 못한 일인 것이다.
오히려 일본은 과거의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에서 그들이 원하는 교육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새로운 지구촌 사회의 건립은 가장 시급한 문제이고,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는 올바른 역사 교육일 것이다.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그리고 정의가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역사적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세계와의 화해로 나아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그 나라의 미래를 만든다. 젊은 세대들은 역사교과서를 통해 과거를 배우고, 그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과거를 조미료 삼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신빙성 없는 비뚤어진 교과서는 비뚤어진 청소년을 낳을 것이고, 비뚤어진 사고방식만 하는 그들은 곧 비뚤어진 미래를 만들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올바로 된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서현(수험번호 0612 / 서현고등학교)
현대 산업사회는 이미 탈산업 사회, 즉 정보화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사회 변동의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이 시대에 우리가 오래 전 흘러간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구세대의 답습을 피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함이다. 이를 세계적으로 볼 때에는 인류가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는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각국은 자국 및 세계의 역사를 올바로 규명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최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우리나라의 여론 역시 이러한 점을 반영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보는 각도에 따라 산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현재주의적 관점마저 오해하고 있다. 물론 역사를 기술할 때 반드시 기존의 인과관계에 맞추어 보아야 한다는 폐쇄적인 역사관을 견지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분명 아니다. 역사의 흐름이란 단순한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류가 얽혀서 이루는 본류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하나의 사건에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없다면 역사적 사실들은 역사가에 의해 발견되어 해석되지 못한 채 사장될 것이다. 또한 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사실만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개인의 흥미 본위로 만들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인과관계의 요소가 될 수 없는 빈약한 것들을 가지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이 일본의 역사 기술 태도를 두둔해주지는 못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선택된 역사의 기술이라는 의미가 역사를 왜곡하거나, 열강의 합의에 의해 조작되어도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왜곡된 현재주의적 관점은 산을 보는 각도에 따라 산의 모양이 달아진다는 설명으로서 옹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보기 좋도록 없는 것을 꾸며내고 보이는 것을 지워버리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확보해야 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일본의 역사기술은 정당화될 수 없다. 더욱이 한일 양극간의 갈등에 골이 패이고 국제적인 여론 또한 일본의 책임을 묻고 있는 가운데 일본 당국이 보여준 전범에 대한 신사참배라든가 국제 여론 무시의 태도는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의미가 온고지신에 따른 인류의 미래 조망에 있다면, 일본의 역사가들은 좀더 넓은 시각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독일 역시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국가로서 지난 나치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일본이 그러한 국제시류와 어긋나는 길을 택한다면 국제적인 지탄을 받음과 동시에 그 교과서를 배우는 일본내의 청소년들에게도 세계화에 걸맞는 시야를 확보해 주지 못하는 곤란을 겪을 것이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다는 등의 이유로 진실을 위조하기보다는 개방적인 시각을 통해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역사는 그 의미가 시대를 거쳐 재발견되고 재해석될 수는 있지만 그 누구도 주관적으로 재창조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가들은 이점을 숙고하여 역사적인 이유로 관계가 좋지 못했던 여러 국가들과의 화해의 날을 앞당기는데 힘써야 한다.
이지선(수험번호 0695 / 경북외국어고등학교)
최근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의 내용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그들은 한반도 주권 강탈을 한국 병합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그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등 한반도 침탈을 자신들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기술해 놓았다.
이는, 한 나라의 역사란 주변 나라와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과 그 시대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회적 산물임을 망각한 자세라 볼 수 있으며 국제 사회 속에서의 상대적인 관점을 무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일본의 현재주의적 역사 기술이 과연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사실, 역사 해석에는 두 가지 중요 방법이 있다. 사실 그 자체로서의 역사를 중시하는 실증주의적 역사관과 현재의 시각으로부터 해석된 역사를 중시하는 현재주의적 입장이 그것이다.
전자는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현재로 옮겨놓고 과거의 사실 그 자체 즉, 객관적 사료만이 순수한 역사로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후자는 역사란, 현대의 시각으로 해석된 결과라 주장하며, 관점이 없는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 사실이 해석되어 질 때 비로소 그 사료는 생명을 얻어 역사로 기술된다고 한다.
후자의 현재주의적 역사관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그들의 눈으로 현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충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뿌리가 썩은 꽃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해서 우리는 그 꽃을 진정으로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물론 관점이 없는 역사란 있을 수가 없으며 경험에 의한 사실 그 자체도 현재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선택적 사료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물체를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고 객관적인 모양이 없다거나 무한한 모양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시각에 맞게 역사를 요리하되 재료는 면밀하고 객관적으로 고찰하여 진실된 영양가가 결핍되어 있지 않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
또한 21세기 지구촌 시대에서는 그 역사가 각국의 이해와 맞물리기 때문에 역사는 과거의 그 사회의 이해의 저장소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입장 조정을 위한 새로운 매개체가 되어야 하고, 상대적이고 국제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주의적 입장으로 그들만의 역사를 바라본 일본의 입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역사는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울러 미래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게 되는 학생들은 지역과 세계 그리고 지구촌 관계를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모습을 만들어 나간다. 이런 학생들이 이, 삼십 년 후 한 나라를 이끌어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일본은 사실에 입각한, 껍데기뿐이 아닌 투명한 사료의 알맹이를 바탕으로 역사를 자신만의 입장에서만이 아닌 지구촌 전체로 바라볼 불 아는 큰 눈을 키워야 할 것이다.
은상
권유선(수험번호 0043 / 창덕여자고등학교)
역사는 한민족 혹은 국가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살아왔던 모습이요, 흥망의 과정이다. 따라서 역사에는 국가, 민족의 혼이 담겨있으며, 그것은 국가, 민족의 오늘을 살아가는 단결의 원천이고 힘이며, 미래로 가는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다. 때문에 그 역사를 올바로 해석하고 현재와 미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후세들에게 교육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요즘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과서 왜곡의 움직임은 반드시 규탄받아야 하며, 또 고쳐져야 한다. 그들은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한다는 현재주의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여러 식민지를 지배하면서 자행했던 많은 만행들을 합리화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축소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을 자신들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현재주의적 역사관의 관점에서 보아도 문제가 있다.
우선, 역사는 현재주의적 관점에서 보든,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보든 과거의 사실을 말한다. 하지만, 일본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역사의 이 기본적인 의미에서조차 벗어나 있다. 그들은 어떤 사실 A와 사실 B를 놓고, 그 두 사건을 연결하는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은폐해 버리거나 축소해버린다. 예를 들어 그들은 20세기 초의 제국주의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던 시대상황과,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라는 두 사건을 놓고 그 둘을 연결하는 시점에 발생했던 불법적인 행위와 만행을 적당히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해석대로라면 역사는 이미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독자들의 흥미에 맞게 사실을 각색해 놓은 한 편의 소설일 뿐이다. 따라서 그 어떤 관점에도 맞지 않으며 역사의 본질마저 망각한 그들의 논리는 수정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그들은 현재주의적 역사관에서 말하는 시각과 관점에 대해 잘못 해석하고 있다. 역사가 만약, 과거의 사실만을 되풀이해 강조하여 현재와 미래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역사다. 따라서 현재와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역사가의 관점과 시각이 존재하는 해석도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관점, 시가이란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다른 사건을 파악해 나가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어떤 사건 하나만을 중시, 다른 사건들을 모두 배제하거나 큰 사건에 맞춰 변형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의 은폐와 왜곡은 많은 객관적 증거의 수집을 통해 역사를 현재에 도움되는 방향으로 인식하려는 현재주의적 역사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이 올바른 현대주의적 역사관에 입각, 역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만행을 숨기거나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객관적 과오를 인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는 그런 행위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려는 자세, 의지가 필요하다.
지난 20세기는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로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21세기 인류는 평화와 공존이라는 목표 아래 지구촌의 공동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난날 역사적 과오에 대한 가해국의 정당한 사과와 보상이 필요하다. 이것만이 각 국가들 간의 진정한 이해와 동조를 얻어낼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은 교과서 왜곡같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김신원(수험번호 0135 /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옛 잔해를 발견한 탐험가는 성서보다 호메로스를 더 믿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의 잔해를 찾기 위해 아라랏트산을 여러 번 수색했고, 기원전 3, 4천년까지 소급하는 역청이 발라진 나무조각을 발견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그 증거를 찾으려고 부단히 애썼다는 점이다. 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역사가들은 자신의 역사관을 뒷받침해줄 증거로의 '사실'을 복원하기 위해 고심하고,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 그 목적이 이와 같이 자신의 관점의 입증에 있든, 역사에 있어서 '객관적 사실'은 공통적으로 바탕에 깔리는 개념이다.
바탕에 깔리는, 혹은 기본적으로,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개념은 항상 핵심적이다. 그것이 바로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서의 사실이 바로 그러하다. 믿을만하고 납득할만한 증거로서의 객관적 사실은 그것이 뒷받침하고 있는 주장 혹은 관점을 믿을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과 그 해석으로서의 역사는 마치 그름을 해석하는 것과도 같다. 그림을 보고서 내리는 평이나 그에 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고, 그 다양성 또한 인정되지만 그것이 인정되는 데에는 완성된 한 장의 그림과, 그 평을 내린 이가 그 그림을 빠짐 없이 보았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먼저, 납득하고 신뢰할만한 객관적 사실과 증거의 부재에 그 문제점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관점의 다양성이 인정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그 관점이 객관적이고 신뢰할만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중 등 각국이 제시하는 사실들은 고려하지 않은 채 관점을 지켜나가기에 유리한 사실들만 언급하는 것은 이미 그 관점을 신뢰하기에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한 더 나아가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집필태도와 관점이다. 거듭 말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인정될 때 그 관점의 다양성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다양성 역시 일정 한계를 넘겨서는 안된다. 그 한계라는 것은 윤리적 기준, 더 구체화시키자면 공동의 이익과 평화, 발전을 추구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교과서의 집필관점은 국제사회의 흐름, 과거의 치욕적인 역사조차 인정하고 그에 대해 반성하고 인류의 평화를 실현시키고자 협력하려는 흐름에 반하는 것으로, 인정과 반성이 아닌 정당화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통한 국민의 특정의식 고취와 그를 통한 국제사회에서의 활로의 모색은 문제될 것이 없겠으나 그를 위해 취한 태도부터 국제사회의 흐름에 반하는 것으로, 국제적인 화해와 공동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스스로의 주장에 객관적 사실이 결핍되었음에 따라 관점과 근거들을 재고해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의 부재와 국제사회의 흐름에 반하는 역사적 관점과 교과서의 고수는 한 국가-국제사회에서의 한 성원-으로서 뿐 아니라 학자로서 역사가의 본분까지 망각한 것으로 그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박영주(수험번호 0315 / 풍문여자고등학교)
우리나라와 일본은 삼국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화, 경제, 정치 등 여러 면에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최근 일본의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들의 역사기술에 있어서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전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오늘,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실증주의와 현재주의 두 가지로 나뉜다.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과거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유물로서 말하게 하라.'는 말처럼 사실만을 말하기에는 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역사는 필연적으로 선택적이며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된다.
여기서 범할 수 있는 오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선택적이라 해서 어떠한 관념을 위해 사실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 한반도가 군사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과 영국, 미국, 러시아 3국이 자신이 지배하고 싶지 않지만 다른 나라가 차지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두 가지 사실을 들어 '신흥국 일본의 등장은 3국에게 좋은 상황이었다'라는 선택된 관념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한국인들이 스스로의 통치를 원했다는 사실과 가장 주요한 당사자들의 의견이 무시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관념에 맞지 않기 때문에 철저히 버려진 것이다.
둘째, 주관이 개입된다고 해서 바른 해석과 모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정책'은 그들의 주관일 뿐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인 우리나라나 중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군사적 힘에 눌린 억지스런 욕심에 대한 희생이 있었을 뿐이다. 진정한 '안정'이란, 평화롭게 공전한다는 의미인 것을 자신들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다른 국가를 침탈한 것을 '안정'이란 단어로 표현했다. 그것은 그들의 주관이 지나치다 못해 이기적인 해석인 것이다. 또한 국제 관계에 따른 합법적 절차는 강대국들과 일본의 절차였을 뿐 우리와 일본의 합법적 절차는 아니었다. 힘의 외교에 의한 불평등한 절차란 표현이 알맞은 것이다. 엄연히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들은 거짓의 길을 택했다.
모든 나라의 역사에는 아름답지 못한 과거가 있다. 우리나라는 힘에 억눌려 온 민족이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했던 과거가 있었고, 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조국을 아직도 통일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일본인들, 그들도 남을 억누르려하던 힘들과 잔혹함의 과거를 바로 인식해야겠다. 진정한 화해와 평화는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본모습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평화와 공존은 자신의 과거를 아는 것이 첫걸음이다. 교과서는 새 시대를 살아갈 다음 세대의 기본을 일구어내는 중요한 책이다. 비단, 과거의 특정 사실들을 담아내는 저장소일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 지식을 담아야 한다. 바른 지식과 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식인들이 바른 소리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화해할 그 날을 기대해 본다.
이재언(수험번호 0672 / 배재고등학교)
일본 역사가들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독일이 나치와 유대인 학살에 관하여 비교적 사실적인 역사 기술로 그들의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는 반면에, 일본은 그들의 동아시아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왜곡·미화시키면서,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관한 아시아 각국의 시정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새 교과서는 우리 나름대로의 현재주의적 역사 해석의 결과이며, 역사 교육은 일본 국내의 일이므로 전면 수정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현재주의적 역사관은 <사실>이라는 든든한 뿌리 위에 세워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주장하는 현재주의적 역사관은 그 바탕인 <면밀하고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 고찰>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수많은 사건들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선별하여, 사실과 역사가의 역사적 관점을 조화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이 없는 사실은 역사가 아니라 과거의 기록에 불과하며, 반대로 사실적이지 못한-왜곡된-해석은 픽션인 것이다.
일본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역사 해석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즉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한다 하더라도, 그 이전에 <객관적 사실로서의 역사>를 밑바탕으로 하지 않은 채 그들의 <관점>만을 중시하여 마침내는 <객관적 사실>마저 왜곡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한일 합병 당시 우리 민족 거의 모두가 일제에 분연히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부 반대파의 심한 저항'이라고 왜곡시켜 표현한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사실>왜곡을 알 수 있다.
또한 모든 사물의 모습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서 그 사물의 모습이 무한한 것은 아니듯이, 역사를 기록할 때 해석이 필수적이라고 해서 어떤 해석이나 모두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한일 관계 및 일본의 침략 전쟁에 관한 평가 역시 어떤 해석이든지 모두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역사 해석은 또 다른 제국주의적 교육일 뿐이며, 결국에는 올바른 역사 교육과는 거리가 먼 <장님 코끼리 만지는> 교육적 과오일 수밖에 없다.
역사는 과거를 현재에 비춰 보고 그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학문이다. 더구나 역사교육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올바른 가치관확립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그러므로 역사 교과서는 올바른 사실과 역사 의식으로 청소년들이 그리는 미래의 청사진에 이바지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비단 일본만이 아니라, 20세기의 초반은 제국주의와 전쟁, 살육으로 점철된 <악마의 시대>였다. 역사는 이러한 인류의 과오를 올바로 뉘우치고, 그를 바탕으로 평화롭고 정의가 넘치는 세계를 만들 의무를 안고 있다. 모든 나라에 불운했던 시대가 있는 것처럼, 우리와 일본의 불운했던 과거 역시 올바른 관점으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현 일본 역사 교과서의 시정은 반드시 필요하며, 우리도 일본을 거울삼아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역사의 정립을 통해서 우리는 아·태 시대의 주역으로, 일본과의 과거사를 초월한 진정한 동반자로써 글로벌 시대의 선진 국가로 도약할 수 있으며, 일본 또한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장유정(수험번호 0763 / 광남고등학교)
2002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급속히 진전되었던 한·일간의 우호 관계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로 인해 다시 냉각되고 있다. 정부는 일본측에 교과서의 수정을 요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고 국민들과 시민 단체 역시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현재주의적 역사관이라는 방패를 내세워서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제적 협력 관계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일본의 태도가 정당한 것인지 논의해 보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역사를 보는 상반된 두 가지의 관점에 대해 알아보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크게 객관적인 입장과 주관적인 입장이 있다. 전자는 랑케의 말 "단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서 극명히 드러나듯이, 역사란 역사가의 해석이나 주관을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만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를 실증주의적 역사관이라 한다. 그에 반해 후자는 역사가의 주관에 의한 해석을 중요시하는 입장으로 해석주의적 역사관이라 한다. 해석주의적 역사관에 따르면, 사실은 과거에 속해 있고 역사가는 현재에 속해 있으니 서로간의 상호작용은 필연적인 것이며, 역사는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일본이 가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 바로 이 해석주의적 입장이다. 일본은 그들의 역사 교과서가 현재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선택되고 해석되어진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언뜻 보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해석주의적 관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해석주의적 관점이란 자신의 역사관과 관계가 있는 증거를 입수해 그 증거를 객관적으로 고찰한 후 타당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주관적인 해석을 내려야 하는 것인데, 일본은 주관적인 해석을 내리기 위해 객관적 사실마저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들의 잘못은 숨기고 부당한 행위는 정당한 행위인 것처럼 포장함으로써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역사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과거의 업적은 본받고, 지난날의 과오는 거울로 삼아 두 번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데 있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를 배우고 자라난 일본의 학생들은 역사와 현실을 올바르게 볼 수 없을 것이며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제국주의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인류는 전지구적인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본은 결국 스스로를 망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진정한 해석주의적 관점에 따라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야 한다. 일본이 그들의 역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때야 비로소 한·일 양국 간의 벽은 허물어질 것이고,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며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홍은파(수험번호 0966 / 예일여자고등학교)
최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와 중국측은 일본에 강력한 항의를 하고, 예정했던 문화개방을 보류하는 등의 강경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우리의 교과서 시정 요구에 대해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고 '단순한 역사적 시각의 차이인데 과민반응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이 50년이 갓 지났고, 과거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의 침략적·파괴적 행위와 정복욕이 다시금 우려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교과서 왜곡은 단순한 관점의 차이일 수 없으며, 다분히 극우적 의도를 띨 가능성을 갖는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은 아니다 역사가에 의해 선택·정리·배열되며, 그 과정에서 특정한 관점이 도입된다. 이러한 관점의 다양성은 단순한 사실에 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우리의 시각이 배타적, 자기중심적으로 고정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소설이 아니며, 역사적 사실들은 이야기의 소재거리가 아니다. 역사에서의 관점은 주관적 해석의 토대가 아닌 객관적 고찰의 동기로서, 면밀한 사실 탐구에 목적을 두어야 하며, 다양성 부여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을 위험성을 띠게 된다.
또한 역사는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일본의 역사왜곡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현재 일본의 국내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최근 경제적 위기 등으로 침체된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키고, 과거 사실의 재해석, 즉 왜곡을 통한 구심점 마련에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극우파인 고이즈미 총리가 선출되고,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여 침략의 야욕이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도 그와 맥락을 같이한다. 즉, 일본의 역사 왜곡은 역사가 개인, 혹은 소수의 관념차이이기 보다는, 처음부터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의 수단이 된 역사는 그 본래적 의미를 잃었다는 점에서 더 이상 역사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왜곡이 '교과서'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역사는, 특히 역사교과서는 후세대에게 과거를 가르치는 것이다. 후세는 특정한 관점이 개입된 교과서를 통해 과거를 보고, 그를 기반으로 역사의식을 갖게 된다. 미래를 이끌어 갈 그들은 '파괴적 조사'에 대한 조작된 자부심을 갖게 되고, 역시 파괴적 미래를 꿈꾸며, 정복의 욕심까지 물려받게 된다. 세계의 평화와 공존이 필요한 미래에 그러한 발상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무모한 시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반성이자 청산이다. 인간의 손에 의해 일어나 사건들을 인간의 손으로 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새기고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역사는 가치관 정립에 큰 몫을 한다는 점에서 미래를 전망하는 망원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여서는 안되며, 건전하고 보편적인 관점에서의 서술, 순수한 학문 탐구적 자세에서의 기술일 때 그 의미를 가지며, 그 기치를 발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