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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서원지(荷江書院誌, 1977년)에서 세 분의 《荷江書院重建記》를 옮깁니다. 創建과 重修와 重建은 다른 말입니다.
세 분 모두 이 세상 분들이 아니고, 김용숙翁은 2000년초 무렵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으나 무슨 생각에 잠겨 있으셨는지, 전혀 아는체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호창翁은 소태면 동막리 분이시고 국회의원을 지냈다가 몇 해전 작고한 분이 아드님이라고 합니다. 많은 비문(碑文)과 글을 남기셨는데 충주향교에서 활동하신 분이니 관련자료가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홍승기翁은 아래 모현정기(Ⅰ)에서 소개하였습니다. 하강서원지外에 별다른 글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모현정기》나《하강서원중건기》는 누군가 대필(代筆)해 준 것으로 판단됩니다. 읽기도 어려운데, 한문 古文으로 글을 짓는 일이 쉬운게 아닙니다. 글을 짓는데 많은 도움을 준 분이 松齋 李鎬昌翁일 겁니다. 두 분은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호창翁의 글에 나오는 단어가 나옵니다.
『 荷江書院誌, 1977년』 ,p46 ~ p48에서 인용.
荷江書院重建記 (李浩昌)
蘂城之北、荷潭之上、雲山重疊、江河彎廻、其高尚雅趣、可以爲藏修、講肄之所、迺(乃)者、慕堂洪文敬先生、祠宇舊基、在此一隅、窃惟、先生、以清秀之質、純粹之德、有鼓物之妙、化人之術、學焉而明其理、行焉而 測其道、有孝悌致身之實、而盡忠竭力、爲人龜鑑、立朝事業、爲一代 名臣、於是、李文成夫子、稱道其德學無量 實 我朝五百年學聖之功、尊王之義、君臣父子之倫、盡備、爲東方開運之一大盛際、則先生之澤厚功深、亦與參並臻、正祖丙午、遠近士林、靡不用力、建院於此、以伸慕賢追遠之情、而行俎豆之禮、兼爲學者肄業講道之所、至于 高宗辛未、朝令撤院、即地設壇、只使齋任、不廢春秋之香火、于今、勢拘形隔、不得重建、流駛光陰、已至百餘載之久、其雲孫之痛、志士之恨、日深一日、今茲本孫、殫誠竭力、鄕中士林、奮然相應、起工未幾、院宇翼然、非但此院之爲幸、鄕黨文化之光、豈其尠哉、嗚呼、挽近運否、淫邪熾、而吾道衰、聖道墜、而彛倫斁、際此、慕賢一事、無地可尋、 而當此時、成此役、豈不誠壯哉、若使伊人、痛淫邪之害正、盡心張目、 以明先生所爲明其理者、痛鬼恠(怪)之禍人、以遵先生所爲盡其倫者、 而盡之、果如是、則先生之靈、必莞爾而隲佑、帝庭斡旋回泰之新基、 安知非一聲雷響、自我西郊、流動天地之間、儒風作、民俗定、而昭泉 陽道、不遠可復也哉、是所區區所望者、而晨夕無間者也、功旣訖、尸之者、先生之十一世孫承箕、累請其記事、顧雖人微文拙、誼不可辭、 略記其事、並識所感如此云爾
歲甲寅 槐月 上澣 牙城 李鎬昌 謹書
荷江書院重建記(金容肅)
蘂城之北、荷江書院者、迺慕堂洪文敬先生妥靈之所也、恭惟先生、
以絶人之資、高世之德、有道學文章之盛、孝友敦睦之實、而爲國血誠、立朝事業、卓如山斗、炳如日星、蔚然爲一代之名臣、遺風餘澤、垂之無窮、故 正祖丙午、遠近搢紳、以崇德報功之美意、異口同贊、起 院於此、一以伸慕賢之情、一以行俎豆之禮、使爲士者、盡其藏修講肄之方、而不幸、曁于 高宗辛未、朝令撤廢之後、雖卽其地、封壇 而無闕、春秋之享然、天時人事、石火催忙、於焉爲百有餘寒暑于茲、 而力綿勢碍、不遑重建、尚在寂寥、言念及此、可勝歎哉、今玆本孫、殫竭慕先之誠、鄕中章甫、奮發衛道之志、一唱更張之擧、衆皆樂從、有 如雷動風隨之勢、起工未幾、院宇門墻、靡不煥然一新、非徒本院之幸、莫過於此、抑亦斯文世道之光、顧不大歟、鳴呼 目下天地飜覆、山 川移易、先天物色、蕭索殆盡、華焉夷矣、人焉獸矣(原文에 矣자가 빠져 채워 넣음) 而慕賢等事、都無影子矣、能以此時、成此巨役、豈不誠生光宇宙、增氣百倍者哉、盖設院
本意、講學明道、實爲之主、而先賢香火、乃其餘事也、萬一賴此先生之院、而有所觀感、聳然興起、使世之侮辱聖賢、蔑棄禮義之輩、知所 愧、而痛加反省、皆知聖賢之必可尊、禮義之不可棄、而儒風振作、民俗丕變、則陽道之復、指日可期、而熈運之回、亦自非難矣、是所區區 無疆之祝也
歲舍甲寅槐夏 後學 光山 金容肅 謹記
荷江書院重建記(洪承箕)
人之於祖、猶木之本乎根、水之本乎源、根固而葉茂、源深而流長、理之然也、惟我豊山之洪、子姓蕃衍、稱東方之巨族、莫不由祖先、積累之厚蔭、凡在後承、尊慕敬愛之心、隨感隨見、久遠不忘者、自是彛所同也、竊念、文敬公慕堂先祖、荷江書院時値、高宗初年間、毁撤、 講堂猶存、爲後昆者、實爲千秋之恨、歲在甲寅春、當地儒林諸彥、紹述先賢之德、重建書院、謀議詢同、其意誠且勤矣、吾之諸宗、有所興 感于中者、不能終默、貢
薄誠微力、俾補一部經費、不幾月、而竣其功、 以無替祖先之遺、而永示來後之楷範也、則吾洪之昌、未艾也、安得 不翹首而待也、是役之成、娛乎中、而悅乎顔、庻(庶)永世不朽、猥爲之書、 如此云爾
甲寅槐夏 十一代孫 忠州 承箕 謹記
<표점>
荷江書院重建記 (이호창)
蘂城之北、荷潭之上、雲山重疊、江河彎廻。其高尚雅趣、可以爲藏修、講肄之所。迺者、慕堂洪文敬先生、祠宇舊基、在此一隅。窃惟、先生、以清秀之質、純粹之德、有鼓物之妙、化人之術。學焉而明其理、行焉而測其道。有孝悌致身之實、而盡忠竭力、爲人龜鑑。立朝事業、爲一代名臣。於是、李文成夫子、稱道其德學無量。實我朝五百年學聖之功、尊王之義、君臣父子之倫、盡備、爲東方開運之一大盛際。則先生之澤厚功深、亦與參並臻。
正祖丙午、遠近士林、靡不用力、建院於此、以伸慕賢追遠之情、而行俎豆之禮、兼爲學者肄業講道之所。至于高宗辛未、朝令撤院、即地設壇、只使齋任、不廢春秋之香火。于今、勢拘形隔、不得重建、流駛光陰、已至百餘載之久。其雲孫之痛、志士之恨、日深一日。
今茲本孫、殫誠竭力、鄕中士林、奮然相應。起工未幾、院宇翼然。非但此院之爲幸、鄕黨文化之光、豈其尠哉。鳴呼、挽近運否、淫邪熾、而吾道衰、聖道墜、而彛倫斁。際此、慕賢一事、無地可尋。而當此時、成此役、豈不誠壯哉。
若使伊人、痛淫邪之害正、盡心張目、以明先生所爲明其理者;痛鬼恠之禍人、以遵先生所爲盡其倫者、而盡之。果如是、則先生之靈、必莞爾而隲佑。帝庭斡旋回泰之新基、安知非一聲雷響、自我西郊、流動天地之間、儒風作、民俗定、而昭泉陽道、不遠可復也哉。是所區區所望者、而晨夕無間者也。
功旣訖、尸之者、先生之十一世孫承箕、累請其記事。顧雖人微文拙、誼不可辭。略記其事、並識所感如此云爾。
歲甲寅槐月上澣,牙城李鎬昌謹書。
荷江書院重建記 (김용숙)
蘂城之北、荷江書院者、迺慕堂洪文敬先生妥靈之所也。恭惟先生、以絶人之資、高世之德、有道學文章之盛、孝友敦睦之實。而爲國血誠、立朝事業、卓如山斗、炳如日星、蔚然爲一代之名臣。遺風餘澤、垂之無窮。
故正祖丙午、遠近搢紳、以崇德報功之美意、異口同贊、起院於此。一以伸慕賢之情、一以行俎豆之禮、使爲士者、盡其藏修講肄之方。而不幸、曁于高宗辛未、朝令撤廢之後、雖卽其地、封壇而無闕、春秋之享。然天時人事、石火催忙、於焉爲百有餘寒暑于茲。而力綿勢碍、不遑重建、尚在寂寥。言念及此、可勝歎哉。
今玆本孫、殫竭慕先之誠、鄕中章甫、奮發衛道之志。一唱更張之擧、衆皆樂從、有如雷動風隨之勢。起工未幾、院宇門墻、靡不煥然一新。非徒本院之幸、莫過於此、抑亦斯文世道之光、顧不大歟。
鳴呼、目下天地飜覆、山川移易、先天物色、蕭索殆盡。華焉夷矣、人焉獸矣、而慕賢等事、都無影子矣。能以此時、成此巨役、豈不誠生光宇宙、增氣百倍者哉。
盖設院本意、講學明道、實爲之主、而先賢香火、乃其餘事也。萬一賴此先生之院、而有所觀感、聳然興起、使世之侮辱聖賢、蔑棄禮義之輩、知所愧、而痛加反省。皆知聖賢之必可尊、禮義之不可棄、而儒風振作、民俗丕變、則陽道之復、指日可期、而熈運之回、亦自非難矣。是所區區無疆之祝也。
歲舍 甲寅 槐夏,後學 光山 金容肅 謹記。
荷江書院重建記 (홍승기)
人之於祖、猶木之本乎根、水之本乎源。根固而葉茂、源深而流長、理之然也。惟我豊山之洪、子姓蕃衍、稱東方之巨族。莫不由祖先、積累之厚蔭。凡在後承、尊慕敬愛之心、隨感隨見、久遠不忘者、自是彛所同也。
竊念、文敬公慕堂先祖、荷江書院、時値高宗初年間、毁撤、講堂猶存。爲後昆者、實爲千秋之恨。歲在甲寅春、當地儒林諸彥、紹述先賢之德、重建書院、謀議詢同。其意誠且勤矣。
吾之諸宗、有所興感于中者、不能終默。貢薄誠微力、俾補一部經費。不幾月、而竣其功、以無替祖先之遺、而永示來後之楷範也。則吾洪之昌、未艾也。安得不翹首而待也。
是役之成、娛乎中、而悅乎顔、庻(庶)永世不朽。猥爲之書、如此云爾。
甲寅 槐夏,十一代孫 忠州 承箕 謹記。
<번역>
하강서원 중건기 (이호창 記)
예성(蘂城, 忠州의 古號)의 북쪽, 하담(荷潭)의 위에 구름과 산이 겹겹이 쌓이고 강하(江河)가 굽어 도니, 그 고상한 아취는 학문을 닦고 익히는 곳으로 삼을 만하다. 이에 모당(慕堂) 홍문경(洪文敬) 선생의 옛 사우(祠宇) 터가 이 한 모퉁이에 있으니, 가만히 생각건대 선생은 청수(淸秀)한 자질과 순취(純粹)한 덕으로써 만물을 고무하는 묘함과 사람을 교화하는 술책이 있으셨다. 학문을 함에는 그 리(理)를 밝히셨고, 행함에는 그 도(道)를 헤아리셨다. 효제(孝悌)로써 몸을 바친 실천이 있으셨고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람들의 귀감이 되셨으니, 조정에 서서 세우신 사업은 일대의 명신(名臣)이셨다. 이에 이문성(李文成, 이이) 부자(夫子)께서 그 덕과 학문이 헤아릴 수 없다고 칭찬하며 말하셨다(稱道). 실로 우리 왕조 5백 년 동안 성학(聖學)을 일으킨 공과 왕을 존숭하는 의리, 군신 부자간의 인륜이 온전히 갖추어져 동방의 운수를 열어젖힌 일대 융성한 시기였으니, 선생의 은택이 두텁고 공이 깊음 또한 이에 참여하여 나란히 이르렀다.
정조 병오년(1786)에 원근의 사림이 힘을 쓰지 않음이 없이 이곳에 서원을 세워, 현인을 사모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정을 펴고 제사 지내는 예(禮)를 행하였으며, 아울러 학자들이 학업을 익히고 도를 강론하는 곳으로 삼았다. 고종 신미년(1871)에 이르러 조정의 명령으로 서원이 철폐되자 그 땅에 단(壇)을 설치하고 다만 재임(齋任)만 두어 춘추의 향화를 폐하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형세에 구애되고 지형에 막혀 중건하지 못하여, 흘러가는 광음이 이미 백여 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렀다. 그 먼 후손들의 아픔과 뜻있는 선비들의 한탄이 날로 깊어만 갔다.
이제 이 본손(本孫)이 정성을 쏟고 힘을 다하니 향중(鄕中)의 사림이 떨쳐 일어나 서로 응하였다.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원 건물이 날개 펴듯 우뚝 섰으니, 비단 이 서원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향당(鄕黨) 문화의 빛남이 어찌 적다 하겠는가. 아아, 근래에 운수가 막히고 음사(淫邪)가 치성하여 우리의 도가 쇠하고 성인의 도가 떨어져 상도(常道)와 인륜이 무너졌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현인을 사모하는 한 가지 일조차 발붙일 곳을 찾을 수 없거늘, 이 시기를 당하여 이 역사를 이루었으니 어찌 참으로 장하지 않겠는가.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음사가 바른 것을 해치는 것을 아프게 여겨 마음을 다하고 눈을 크게 떠서 선생께서 그 리(理)를 밝히신 바를 밝히게 하고, 괴이함이 사람을 재앙으로 빠뜨리는 것을 아프게 여겨 선생께서 그 인륜을 다하신 바를 좇아 다하게 한다면, 과연 이와 같다면 선생의 신령께서 반드시 빙그레(莞爾) 웃으시며 묵묵히 도우실 것이다. 조정에서 기틀을 돌려 태평함을 회복하는 새로운 터전이, 어찌 한 소리 천둥 번개가 우리 서쪽 교외로부터 일어나 천지 사이에 유동(流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풍(儒風)이 일고 민속이 안정되어 소천(昭泉)의 양도(陽道)를 머지않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올바르고 밝은 유학의 도리(陽道)를 머지않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나의 구구한 바람이자 밤낮으로 중단없는 축원(祝願)이다.
공사가 이미 끝나고 이를 주관한 자는 선생의 11세손 승기(承箕)인데, 여러 번 그 기록을 청하였다. 돌이켜보건대 비록 사람이 미천하고 글이 졸렬하나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대략 그 사실을 기록하고 아울러 느끼는 바를 이와 같이 적는다.
갑인년(1974) 괴월(槐月, 음력 4월) 상순, 아성(牙城) 이호창(李鎬昌) 삼가 씀.
하강서원 중건기 (김용숙 記)
예성(蘂城, 忠州의 古號)의 북쪽에 있는 하강서원(荷江書院)은 바로 모당(慕堂) 홍문경(洪文敬) 선생의 신령을 안탁(安妥)한 곳이다. 공경히 생각건대 선생은 남보다 뛰어난 자질과 세상에 높은 덕으로써 도학과 문장의 성함이 있으셨고 효우와 돈목의 실천이 있으셨다. 그리고 나라를 위한 혈성과 조정에 서서 세우신 사업은 높기가 산두(山斗, 泰山과 北斗七星)와 같고 밝기가 일성(日星)과 같아, 울연히 일대의 명신이 되시니 끼치신 풍모와 남기신 은택이 무궁함에 드리웠다.
그러므로 정조 병오년(1786)에 원근의 벼슬아치들이 덕을 숭상하고 공에 보답하는 아름다운 뜻으로써 입을 모아 함께 찬동하여 이곳에 서원을 일으켰다. 하나는 현인을 사모하는 정을 펴기 위함이요, 하나는 제사 지내는 예를 행하기 위함이니, 선비 된 자들로 하여금 학문을 닦고 익히는 방법을 다하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 고종 신미년(1871)에 이르러 조정의 명령으로 철폐된 후에, 비록 그 땅에 단을 봉하여 춘추의 제사에 궐함이 없게 하였으나,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석화(石火)처럼 재촉하고 바빠 어느덧 이곳에 백여 년의 한서(寒暑)가 흘렀다. 그러나 힘이 미약하고 형세에 막혀 중건할 겨를이 없이 여전히 적료함에 머물러 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어찌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이제 이 본손이 선조를 사모하는 정성을 다하고 향중의 장보(章甫, 유생)들이 도를 지키려는 뜻을 분발하였다. 한 차례 갱장(更張)하는 거사를 부르짖으니 무리가 모두 즐거이 따르니, 마치 우레가 치고 바람이 따르는 듯한 형세였다.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원의 건물과 문과 담장이 환연히 일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비단 본 서원의 다행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문(斯文)과 세도(世道)의 빛남이 도리어 크지 않겠는가.
아아, 눈앞에 천지가 번복되고 산천이 바뀌어, 선천(先天)의 물색은 쓸쓸히 거의 다하였다. 중화가 오랑캐가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었으니, 현인을 사모하는 등의 일은 도무지 그림자조차 없도다. 능히 이러한 때를 당하여 이 큰 역사를 이루었으니, 어찌 참으로 우주에 빛을 내고 기운을 백배나 더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서원을 설립한 본뜻은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밝히는 것이 실로 주(主)가 되고, 선현에게 향화(香火)를 올리는 것은 곧 그 여사(餘事)이다. 만일 이 선생의 서원에 힘입어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솟구치듯 흥기하여, 세상의 성현을 모욕하고 예의를 업신여겨 버리는 무리들로 하여금 부끄러워할 바를 알게 하고 통렬히 반성을 더하게 한다면, 모두 성현은 반드시 존숭해야 하고 예의는 버릴 수 없음을 알게 되어 유풍이 진작되고 민속이 크게 변할 것이니, 양도의 회복을 날을 지적하여 기대할 수 있고 희운(熙運, 태평한 운수)의 돌아옴 또한 스스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구구한 끝없는 축원이다.
세사(歲舍) 갑인년(1974) 초여름, 후학 광산(光山) 김용숙(金容肅) 삼가 기록함.
하강서원 중건기 (홍승기 記)
사람이 선조에 대해서는 마치 나무가 뿌리에 근본하고 물이 수원에 근본함과 같다. 뿌리가 견고해야 잎이 무성하고 수원이 깊어야 흐름이 긴 법이니,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 오직 우리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자손이 번연(蕃衍)하여 동방의 거족(巨族)이라 일컬어지니, 선조께서 쌓으신 두터운 음덕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무릇 후손된 처지에 존숭하고 사모하며 경애하는 마음이 느낌을 따라 나타나 오랫동안 잊지 못하는 것은 본래 떳떳한 인륜에 다 같은 바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문경공(文敬公) 모당(慕堂) 선조의 하강서원이 고종 초년간을 만나 훼철되고 강당만 겨우 남아 있었으니, 후손된 자에게는 실로 천추의 한이었다. 갑인년(1974) 봄에 이 땅의 유림 제언(諸彦)들이 선현의 덕을 이어받아 서원을 중건하고자 모의하고 의견을 물으니, 그 뜻이 성실하고 또한 부지런하였다.
우리 여러 종친들이 마음속으로 감동하여 일어난 바가 있어 끝내 침묵할 수 없었다. 엷은 정성과 미약한 힘을 바쳐 일부 경비를 보태게 하였으니, 몇 달이 되지 않아 그 공사를 마치어 선조께서 남기신 유업을 바꾸지 않고 영원히 후래(後來)의 본보기로 보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홍씨의 번창함이 그치지 않을 것이니, 어찌 머리를 들고 기다리지 않겠는가.
이 역사의 완성이 마음속으로 즐겁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니, 바라건대 영세토록 불후(不朽)하기를 바라며 외람되이 이와 같이 글을 쓴다.
갑인년(1974) 초여름, 11대손 충주(忠州) 승기(承箕) 삼가 기록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