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사과에도 일종의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하지 않은 일엔 기꺼이 사과하려고 하지만,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선 그 이상으로 사과하길 꺼린다는 것입니다. 대통령하고 가까운 사람과 관련될수록 더욱 그렇다고 하는데 그게 마냥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 숙여야 할 일로 커진다는 것입니다.
사견 아니냐고? 관련 연구가 제법 있다고 합니다. 8년 전 ‘위기관리 시 대통령의 사과 유형에 관한 연구’(이정진)란 논문에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대통령은 사태가 심각해도 위기의 본질이 자신과 측근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때는 유사(類似) 사과를 선택하려 하고, 지지도가 높은 때보다는 지지도가 낮고 여론의 비난이 심할 때 책임을 인정하는 경향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의 사과가 사안의 성격과 상황, 지지율의 함수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례는 많다고 합니다. 우선 YS(김영삼)와 아들 현철씨 건인데, 정권 초부터 암암리에 제기되던 김씨의 국정개입 논란이 1997년 1월 한보 비리 몸통설과 만나면서 끓어올랐습니다. 한보 부도 직후 야당에서 “한보의 천문학적인 대출에 민주계의 젊은 부통령이 개입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습니다.
YS는 “엉뚱하게 현철이 얘기가 왜 나오느냐”고 펄쩍 뛰었지만, 국민적 반감은 폭발 국면으로 치달았습니다. YS는 검찰총장까지 교체해 가며 수사를 지시했고, 결국 검찰이 별건으로 찾아낸 게 YS 대선자금 중 일부가 다른 사람 명의로 예치된 거여서(조세포탈죄), YS는 “아들의 허물이 곧 아버지의 허물”이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DJ는 2002년 두 아들(홍업·홍걸)의 금품수수 의혹이 터져 나오자 1차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사과했고, 혐의가 짙어지자 2차로 청와대 비서실장이 대독하는 사과문을 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둘 다 구속된 후엔 직접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낀다” “국민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이라고 말했습니다. 56일간 세 차례 고개를 숙인 셈이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사과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말 첫 보도 이후 대통령실의 침묵(내지 방치) 속에서 퍼지던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논란이 임계점을 넘어 대통령과 여권 2인자가 충돌하는 사안으로 커졌기 때문입니다.
윤 대통령이 주저하는 사이 김 여사의 처신 문제였던 게 대통령의 국정수행 방식(또는 판단력)에 대한 문제가 되었고, 국민을 가장 앞세워야 할 대통령이 가족을 앞세우느라 국민과 맞서는 모양새가 됐습니다.
지지율이 내려갔고, ‘설명’이면 됐던 사안이 사과해야 할, 어쩌면 그 이상의 조치가 필요한 사안으로 커졌으니 윤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것》이 중앙일보. 고정애의 「시시각각」에서 지적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아직 윤석열 대통령은 사과를 꺼내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말수가 적은 편이 아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이야기하기를 즐기고 자기주장도 강하다. 이재명 대표도 마찬가지다. 다변에 달변이다. 한때 ‘사이다’란 별명까지 얻었다.
그런 두 사람이 요즘 국민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국민이 궁금해 하는 답, 듣고 싶은 말을 피하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동문서답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이 나오면 엉뚱한 답을 하거나 화살을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 ‘민주당이 탄핵을 너무 남발하는 거 아니냐’는 질문에 “표를 얻기 위한 정책 남발은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민주당의 탄핵 남발을 물었는데 정부의 정책 남발로 답했다.
‘검사 탄핵은 이 대표 본인 방탄용 아니냐’고 기자들이 재차 묻자 “국민의힘에 기후에너지부는 어떻게 할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 ‘용퇴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정부가 전세 사기 피해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이낙연 전 총리의 신당 창당 관련 질문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했다.
이 대표의 동문서답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경기지사 시절 부인 김혜경씨가 문재인·노무현 전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방한 글을 작성한 ‘혜경궁 김씨’라는 의혹이 제기되자 “부정부패에나 관심 가져 달라”고 답했다. 그러다 김혜경씨 법인카드 부정 사용 의혹이 터지자 “김건희씨 수사부터 제대로 하라”고 했다.
대장동 의혹은 ‘윤석열 게이트’라고 하고, 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을 물으면 “국민의힘 의원 수사는 어떻게 돼가느냐”고 반문했다. ‘당신이 잘못한 것 아니냐’고 묻는데 ‘저 사람은 잘못 없느냐’고 되묻는다. 이 대표의 무고죄 전과가 그냥 생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윤 대통령은 평소 거침없는 화법으로 유명하지만, 김건희 여사와 처가 문제가 나오면 입을 닫는다. 작년 7월 장모가 법정 구속됐을 때 윤 대통령은 침묵했다. 곧이어 처남이 기소됐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 김 여사 명품 가방 의혹도 두 달이 넘도록 아무 말이 없다.
윤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김 여사의 허위 경력 논란이 불거지자 팩트 체크가 먼저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여론이 나빠지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논란을 야기하게 된 것 자체만으로 공정과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명품 가방 문제는 친북 목사와 친야 성향 유튜브 매체가 짜고 벌인 함정 몰래카메라란 사실을 국민이 다 안다. 솔직하게 설명하고 겸허히 사과하면 국민이 납득하지 않을 리 없다. 임기가 3년 넘게 남은 대통령의 리더십이 더 이상 손상되는 것은 국민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동문서답과 묵묵부답은 둘 다 문제를 회피하고 싶은 데서 나오는 행동이다. 동문서답은 상대를 무시하고 화제를 적극적으로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거짓이 보태질 수도 있다. 묵묵부답은 소극적으로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은 아니지만 뭔가를 감추고 싶은 것이다. 이 대표의 동문서답은 국민에게 모멸감을 주고, 대통령의 묵묵부답은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지금 우리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상당 부분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 대표는 국민 무서운 줄 알아야 하고, 윤 대통령은 자신을 뽑아준 국민을 믿어야 한다.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정치인은 유리한 이슈에 올라탈 때보다 불리한 입장에 처했을 때 진가가 드러난다. 국민은 궁금한 말, 듣고 싶은 말을 윤 대통령과 이 대표에게서 직접 듣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을 대신 해줄 누군가를 찾아 나설 것이다.>조선일보. 황대진 기자 논설위원
출처 : 조선일보. 오피니언 태평로, 대통령은 묵묵부답, 이 대표는 동문서답
“묵묵부답(黙黙不答)”, ‘묻는 말에 잠자코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할 말이 없는 것인지,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묻는 사람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결국 무답(無答)입니다.
“동문서답東問西答)”,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대답’을 뜻하는 말입니다. 질문의 내용을 이해 못해서 엉뚱한 대답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질문 내용을 뻔히 알면서도 엉뚱한 대답을 하는 밉상들을 봅니다. 이건 오답(誤答)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묵언수행(默言修行)을 할 리는 만무한데 왜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하는지 국민들이 답답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오래 끌면 결국 호미가 가래가 되고 가래 대신 굴삭기로도 막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이재명 대표의 가장 큰 특징이 ‘사이다’라고 하더니 이젠 김빠진 사이다가 된 것 같습니다. 아니 그 사이다가 쉰 것 같습니다. 말장난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것에 재미가 들렸는지 모르지만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둡다는 말 실감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무답을 보는 심정이나, 교활한 사람을 야당 대표로 세우고 오답이나 듣는 국민들이 다 보살일 리는 없을 겁니다. 무답, 오답 둘 다 곧 심판의 날을 맞게 될 것 같습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