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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9. 묵상글 ( 연중 제5주간 목요일. - 혼자 있으면. 등 )
* 맨 아래 cpbc TV. 매일미사.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사무국장)님
강론을 안내합니다. < oneness에 대한 말씀, 저에게는 많이 다가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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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9. 연중 제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혼자 있으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겠다."
오늘 창세기는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다 좋다고 하신 하느님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즉시 떠오르는 것이 요즘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서
혼족이니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말이 유행이고,
방송도 이런 세태를 반영하여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엔터테인먼트 식으로 방영하기도 합니다.
젊은 사람 중에 그런 프로를 보고 즐기는 사람이 많나 봅니다.
또 즉시 떠오르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고립의 정신’을 크게 걱정한 내용입니다.
물론 혼자 사는 사람이 다 ‘고립의 정신’의 소유자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혼자 살지만, 고립을 살지 않고
가족에게 매이기보다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런 경우 그것은 고립의 정신을 사는 것이 아닐뿐더러
혼자 살 줄 모르고 의존적으로 사는 사람보다 훨씬 잘 산다고 해야겠지요.
의존적인 행복은 의존적인 불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말이 있듯이 혼자서도 잘하는 것은
이런 의존적인 불행과 미성숙을 넘어서는 행복한 성장의 표시이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보기에 좋지 않은 ‘혼자’는 고독이 아니라 고립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립 특히 고립의 정신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혼자’를 말하는 것이고,
부담감이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공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할 것이 무언인지.
사람을 두려워할 것인지 아무도 없는 것을 두려워할 것인지.
가끔 죽음 이후를 생각할 때 저는 하느님도 안 계시고 아무도 없는
저 캄캄한 우주 공간을 생각하고 저 혼자 떠도는 것을 상상합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있으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러다 누구 하나를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사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고 외톨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사랑이라는 것을 놓치는 순간 사람이 두려워질 것이고,
반대로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사랑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다시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공존을 선택할 것인가? 고립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두려움을 선택할 것인가?
같이 있을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혼자 있는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
혼자 있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혼자 있으면 기뻐할 일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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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9.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을 배줄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이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개”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도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드러난 일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주님!
거절당하고 무시당했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때가, 부르심의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그 순간이, 당신께서 저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믿음과 사랑을 더 깊게 끌어당기심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의 자비를 믿고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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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9.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
‘가톨릭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시너지 리더십’이라는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사 진형기교수는 “신자는 신부의 손님이다. 그리고 신부는 신자를 다스릴 수 없다. 다스리려 하면 실패한다.”라고 말씀하시며 신자들에게 대접받고 사는 성직자의 현실을 지적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말씀과 실행, 이론과 실제가 일치된 리더, 후계자와 인재 양성에 중심을 둔 리더, 서비스 마인드가 충만하신 리더, 팀웍을 중요시한 리더, 현실을 통찰하고 비전을 세우신 리더, 관계를 중시한 리더, 관용과 용서로 실패를 재기의 기회로 삼도록 격려하는 리더, 모든 사람을 소속감을 가지게 하는 리더, 고난을 극복하면서 자신을 성숙시키는 리더, 사람들의 경제 생활을 보살피신 리더, 소외된 자들을 정성껏 끝까지 돌보신 리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행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열매가 맺어지도록 하는 리더’로 소개하셨습니다. 그중에 몇을 닮았는가 생각하니 부끄러움만 큽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하고 끈질긴 믿음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국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불신과 시기로 배척하고 있으므로, 믿음을 가진 이방인에게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원칙만 고수하시는 완고한 분이 아니라 열려있는 분이십니다.
이교도 여인은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시험이었습니다. 여인은 복음의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간절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놀라운 믿음을 보시고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마침내 여인의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소외된 사람을 끝까지 돌보시는 리더’로서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인생여정 안에서 이러저러한 어려움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쩌면 좋은 일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난관들 안에서 주님께서는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함께하시어 기운을 북돋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앞에 있는 ‘험한 산을 치워주지는 않으시지만, 그 산을 넘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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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9.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인 경우가 있습니다. 성실해서 인 경우도 있습니다. 운이 좋아서 인 경우도 있겠습니다. 제가 볼 때는 ‘우선순위’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한산에 가기로 했으면 북한산에 대한 자료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설악산에 대한 자료를 본다면 시간을 많이 내서 일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이 오면 당황하게 됩니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 명예, 권력’이 우선순위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 영원한 생명, 이웃사랑’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의 모범이 되신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인으로 품에 올린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능력, 재능, 업적이 뛰어나서 신앙의 모범이 되고, 성인품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하느님의 영광, 영원한 생명, 이웃사랑을 삶의 우선순위에 놓았던 분들입니다.
요즘 우리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과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빛을 만드시고, 해와 달 그리고 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바다와 육지를 만드시고, 그 위에 많은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을 다스리기 위해서 하느님을 닮은 ‘모상’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호하고, 돌볼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사람에게는 ‘짝’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생명이 아닌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사람에게서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짝을 보고 사람은 이렇게 감탄하였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부부가 되었고,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천사보다 못하게 만드셨지만 존귀함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전에 감동적인 신문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6년 동안이나 간호해서 의식을 되살려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의사들도 회복할 수 없다고 포기한 남편을 기적적으로 소생시켰습니다. 그녀는 항상 "그는 환자가 아니다. 내 남편이다."라고 스스로 다짐하였으며 하루에도 수십 차례 의식 없는 남편과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남편을 아기처럼 껴안고 뽀뽀도 하였으며 남편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이 그 남편은 6년 만에 부활하여 첫마디를 "아멘"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남편들을, 아내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모든 부부는 분명히 결혼식에서 '비가 오나 바람 부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병들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항상 사랑할 것을 맹세'한 신랑 신부였습니다. 그 자매님에게 우선순위는 ‘남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남편은 이 세상에서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니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처럼 지혜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저처럼 사제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 여인에게 우선순위는 병중에 있는 ‘딸’이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능력, 지혜, 업적, 지위를 모두 모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과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가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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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9.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다음의 상식 퀴즈를 맞혀보세요.
1) 영국은 섬나라인가?
2) 한국 전쟁이 일어난 연도는?
3) 태양계의 행성을 순서대로 말해보라.
요즘 유행하는 상식 퀴즈라고 합니다. 대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첫 번째 문제의 정답률은 30%, 두 번째 문제의 정답률은 23%, 마지막 문제의 정답률은 14%였습니다.
‘아니, 이 정도도 몰라? 지성인이라고 하는 대학생의 상식 수준이 이것밖에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굳이 알 필요가 뭐 있어?’라고 말입니다. 상식이 부족하다고 또 무식하다고 말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사는 데 지장이 없다면 굳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요즘 아이돌 가수를 잘 모릅니다. BTS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지만, 솔직히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몇 명으로 구성된 그룹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세대가 볼 때, 너무나도 무식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다지 좋아하는 취향도 아니고,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와 공통 주제로 소통하기는 힘들겠지만, 오십 넘어 그들과 굳이 이런 내용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지식의 전달이 아닌, 지혜의 전달이기 때문입니다.
상식 부족이라는 이유로 남을 평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보다 그 모습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가장 중요한 것을 전달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이교도였습니다. 선민의식이 강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교도는 구원으로부터 제외된 사람들이라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것은 당시 유다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지요.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왜 차별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정말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옳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드러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도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상식을 내세워 자기 생각만 옳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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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이지 않고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다(데모필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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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9.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과 신뢰
-영적탄력의 원천-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
수도사제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자주 사용되었고 앞으로도 자주 사용될 강론 주제중 둘은 주님의 전사와 영적탄력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전사요 믿음의 탄력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믿음의 전사로서 참 좋은 믿음의 탄력을 위해 간절하고 끊임없는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제가 믿음의 탄력에 자주 인용했던 몇가지 사례를 다시 나눕니다. 수십년전 읽은 내용인데 참 많이도 나눴습니다. 어느 구도자가 수도원을 찾아 노수도자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었을 때의 평범하나 진솔한 답변입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평생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에 덧붙여 자주 단골로 인용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한다. 평생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 이래야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로서 한결같이 탄력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가면 육신의 탄력은 저절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혼의 탄력, 믿음의 탄력은 떨어지면 안된다. 끝까지 믿음의 탄력을 유지해야 믿음의 전사로서 죽는 그날까지 영적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는 말마디입니다. 영적탄력, 믿음의 탄력을 위해 자주 사용하는 용수철과 팬티끈의 비유입니다. 좋은 용수철은 탄력이 좋습니다. 누르면 즉시 원래상태로 돌아옵니다. 잡초雜草들의 탄력 또한 좋습니다. 아무리 밟혀도 즉시 일어납니다. 여기서 생활력 강한 민초民草란 말도 유래합니다. 칠전팔기七顚八起, 백절불굴百折不屈, 모두 영적탄력 좋은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또 재미있는 팬티끈과 팬티천의 비유입니다. 좀 저속하다 싶은 비유나 실감있게 와닿습니다. 지금이야 팬티끈이 끊어지거나 느슨해 지는 일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를 들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팬티천이 아무리 좋고 튼튼해도 팬티끈이 끊어지거나 느슨해져 탄력을 잃어 신축성이 없으면 그 좋은 팬티도 더 이상 입을 수 없다. 마찬가지 아무리 육신이 아름답고 건강해도 영혼이 병들어 건강하지 못하면 육신도 오래 못가 노쇠나 병고로 무너진다.
그러나 탄력 좋은 팬티끈이라면 팬티천이 아무리 낡고 떨어져도 끝까지 입을 수 있는 것처럼. 참으로 믿음의 탄력 좋은 영혼이라면 아무리 낡고 병든 육신이라도 끝까지 이끌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야지 영혼이 육신한테 끌려가선 안된다. 이래서 영적 탄력을 위한 평생 믿음의 훈련이 그처럼 중요한 것이다.”
이래서 탄력좋은 믿음을 위해 참 좋은 평생 훈련이 우리가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전사로서 탄력 좋은 믿음을 위해 우선적 조건이 하느님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과 신뢰입니다. 참으로 날로 깊어가는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영적탄력 좋은 주님의 전사로 만듭니다.
저는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인간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더불어 창세기 저자의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깨닫습니다. 다음 묘사가 바로 이를 입증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아무리 애완견이 반려견이, 반려식물이 좋다한들 어찌 좋은 현모양처의 아내와 비교할 수 있을런지요! 협력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대상은 좋은 아내뿐일 것입니다. 바로 여기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을 만나게 되고 이런 사랑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뿐이 없습니다. 다음 묘사에서 우리는 참 섬세하고 정성스러운 하느님 사랑을 만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신다음, 그의 갈빗대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협력자의 아내는 실로 사람과 한몸임을 알려주는 진실자체의 설화입니다. 바로 부부일치의 황홀한 체험의 고백같은, 참으로 진짜 협력자를 만난 사람의 부르짖는 환호에 하느님은 얼마나 기뻐하셨겠는지요! 사람의 환호와 이어지는 묘사도 깊고 아름다운 감동적인 진리를 보여줍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사람과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참으로 순결무구한 부부관계를 말해 줍니다. 부부관계는 물론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참 좋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 였을 것이며 부부의 주님 향한 믿음의 탄력, 영적탄력도 참 좋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최상의 행복한 부부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이런저런 사유로 혼자 살아가는 이들이 때로 많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혼자 살다보면 저절로 이기적 괴물이나 폐인이 될 가능성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전의 일상적인 혼인에 평범한 부부생활이 요즘은 특별한 것이 되어 가는 추세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늘 창세기의 이런 부부일치를 이뤄주신 하느님은 얼마나 섬세하고 자상한 배려와 존중의 멋진 분이신지 저절로 감사, 감동,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좋은 하느님을 체험할수록 사랑과 신뢰도 더해가면서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관계에 영적탄력도 자연스럽게 뒤따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교도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부인의 믿음의 탄력이 참 놀랍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 주십사고 간청하는 부인입니다. 다음 주님과 부인과의 실감나는 대화를 다시 나눕니다. 그대로 주님과의 줄다리기 싸움같은 기도를 상징하는 예화입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얼마나 수모스런 자존심 상하는 몰인정한 말씀인지요! 그러나 참으로 겸손한 부인은 이런 자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참 좋은 믿음의 탄력을 지닌 부인은 즉시 반격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더불어 주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가 있었기에 이런 겸손한 답변입니다.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 믿음의 기도인지요! 참으로 감동적인 믿음이요, 말그대로 믿음의 승리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믿음의 전사, 이교도 부인입니다. 말문이 막힌 예수님의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마침내 자기와의 싸움, 주님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참으로 겸손한 믿음의 탄력 좋은 믿음의 전사, 이교도 부인입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신뢰와 사랑이, 그리고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궁극의 영적승리로 이끈 참 좋은 영적탄력의 원천이었음을 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와 더불어 우리 모두 영적 탄력 좋은 믿음의 전사, 주님의 전사로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주님은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번영을 보리라.”(시편128,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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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9.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이 한 이야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여인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페니키아 출신으로 마귀 들린 딸을 두고 있다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우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여인 혼자서 들어오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지 않은 이상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묵고 계신 곳에 들어와서 주님께 청하기까지 누구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즉 이 여인이 누구인지 그 집에 머무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은 사회적 신분이 낮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여인이 주님께 강아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습니다.
만약 우리였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화를 내면서 자신을 무시했다고 소리치며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 속 페니키아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더욱 겸손한 자세로 이야기합니다.
주님, 강아지들도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겸손인가요? 이 얼마나 용감한 희생인가요? 이 얼마나 깊은 믿음인가요?
복음 속 여인의 겸손과 믿음이 그녀의 딸을 주님의 은총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얻게 하였습니다.
겸손과 믿음, 우리가 주님 앞에 이것을 드릴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새 생명의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늦을지도….
아시겠지만 이곳 갑곶순교성지 지하에는 천국의 문이라 불리는 봉안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와 함께 세상을 사셨고 우리보다 먼저 하늘로 올라가신 분들이 계십니다.
헤어짐과 떠남의 순간에는 ‘후회’라는 글자가 남는다는 것을 이곳 봉안당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떠나는 사람도, 떠나보내는 사람도 ‘후회’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떠나보내는 처지일지 모르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떠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정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말하지 않으면 늦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요.
그러니 지금 말하세요.
사랑해요. 고마워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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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9.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이여 그분께>
그대가
그분에게
가기에 앞서
그분께서는
그대에게
가시며
그분은
제 자리에
머물지 않고
몸소 오시어
그대 앞에
계시니
벗이여
믿음으로
그분 앞으로
주저함 없이
한걸음에
가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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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9. 연중 제5주간 목요일. cpbc TV. 매일미사.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 집전
https://youtu.be/1WZJGaFW-50 ( 36분 11초 )
cpbcTV가톨릭콘텐츠의모든것
2023. 2. 9.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사무국장)
*** 신부님 강론은 9분 9초부터 15분 15초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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