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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를 삼킨 지팡이
출 7: 8-13. 히 9: 1-5
지난봄에 미국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의 지능지수(IQ) 점수를 조작하여 아들이 천재라고 하였습니다.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 사는 저스틴 채프먼(8)은 어머니의 서류위조로 천재로 불리며 여섯 살 때부터 대학강의까지 듣는 등 천재교육을 받았으나 끝내 정신질환증세를 나타냈습니다. 그는 여섯 살 때 지능지수(IQ) 테스트에서 298점이라는 기록적인 점수를 받았습니다. 미국의 대학입학능력시험인 SAT 수학 성적이 만점인 800점이 나왔습니다. 그에 앞서 세살 때 본 다른 지능테스트인 스탠퍼드 비넷 시험에서도 최고점수를 받았습니다. 이 같은 천재성 때문에 그는 다섯 살 때 온라인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여섯 살 때는 뉴욕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채프먼은 저스틴이 유아 때부터 조숙했으며 학구열이 높아 하루 2∼5시간밖에 자지 않고 공부만 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저스틴에게 심한 정신불안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실을 언론이 추적하면서 어머니는 아들의 IQ 테스트 결과가 조작된 것이며 SAT 수학 점수도 이웃집 아들의 점수를 도용한 것이라고 실토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들이 너무 똑똑해 그에게 천재교육을 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도록 그 같은 일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 어머니는 어린이보호 태만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금방 탄로가 날 것을 그 어머니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일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짜 천재 놀이를 한 어머니의 결과는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진짜와 가짜는 과정을 보면 구분이 안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두 번째 바로를 방문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분명한 재확인을 받고 다시 떠나 바로에게로 갑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전에는 말로만 했지만 이제는 이적으로 바로에게 나아갑니다. 말로 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이제는 이적으로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이적을 술객들도 흉내를 내지만 진짜와 가짜는 금방 차이가 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이적을 흉내낼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적과 술법은 그 근본이 다른 것입니다.
첫째, 너의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면 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이적을 보이라고 하면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지면 지팡이가 뱀이 될 것입니다. 지팡이가 뱀이 된 이적은 모세 앞에서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행했지만 이제 바로 앞에서 행하십니다. 출애굽기 4:3의 뱀은 히브리어의 나하쉬입니다. 이제 여기에 뱀이 될 것이라고 하신 뱀은 탄닌입니다. 큰 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악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아마 상당히 큰 뱀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지팡이는 모세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목자로서의 능력과 기술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장인의 양을 치는 것으로 봐서 목자로서 타고난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인간적 능력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내 것을 포기해야 하나님의 것을 얻습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하시지만 우리 손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주지 못하십니다". 가난해야 복이 있고, 손이 펴져야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부하고, 너무 차 있어 얻지 못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비행기 조종사가 낙하산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합니다. 위기 상황에 대비해 마련해 두긴 하지만 그것을 사용해야 할 기회는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지만 완전히 의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만 믿지는 못합니다. 내 것을 포기하고 던지지만 항상 조금씩은 남겨 둡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한 믿음입니다.
둘째, 애굽의 술객들도 술법으로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였습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자 박사들과 박수들도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였습니다. 박사는 점성술, 해몽, 지리학 등 폭넓은 식견을 구비한 자들로 왕의 자문역할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박사는 현자의 통칭입니다. 박수들은 애굽의 태양신 라(Ra)를 섬기던 남자 제사장입니다. 이들은 실제로 주문을 외워 마법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3:8에는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얀네는 오도하는 자이고 얌브레는 반대하는 자란 뜻입니다. 얀네와 얌브레는 박사와 박수입니다. 이들은 사람을 오도하고, 반대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점이나 미신이나 사주 팔자, 이것들이 얼마나 사람들을 오도하고, 반대하고, 어지럽게 하는지 모릅니다. 신문에 보니 개구리 소년의 시신이 있는 장소를 정확하게 맞춘 점쟁이가 있다고 합디다. 물론 있겠지요. 그런데 점쟁이가 몇 사람인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말을 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수십만 명이 한마디씩만 하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정확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굽에는 당시에 뱀에게 최면을 걸어 지팡이처럼 빳빳하게 만드는 요술이 있었다고 합니다. 뱀을 지팡이처럼 가지고 다니다 다시 움직이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속임수입니다. 결국 모든 술수는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요술이라는 것도 사람의 눈을 순간적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진리와 비진리가 혼돈된 사회입니다. 가짜와 진짜와 혼돈된 사회입니다. 얼핏 봐서는 구분이 안 되는 사회입니다. 참되게 살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사회입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이런 사회를 꼬집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어색케 하리라".
셋째, 아론의 지팡이가 술객들의 지팡이를 삼켰습니다.
두 지팡이는 하나님과 마귀를 상징합니다. 참과 거짓을 대표합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술객의 지팡이를 삼켰다는 것은 하나님이 마귀를 이기고, 참이 거짓을 능가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술객들의 지팡이는 각 사람의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술객들이 만든 뱀은 여럿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잠시 악이 선을 능가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가 여럿을 이깁니다. 생명 있는 하나가 생명 없는 다수를 이기는 것입니다. 모노 뉴쿨레오시스라는 병이 있습니다. 피에 단핵을 가지고 있는 세포들이 많아지는 전염병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입맞춤을 하면 환자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그 병에 걸리게 됩니다. 모든 병이 다 그러합니다. 감기도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옮습니다. 전 인류의 문제인 에이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쁜 한 마디가 좋은 열 마디를 다 삼켜버리고 맙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잠시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린도후서 4:8-9에서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어떤 주석가는 우리는 넉다운(knock down)은 당하지만 넉아웃(knock out)은 당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일시적으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뱀을 삼킵니다. 세상의 왕을 이깁니다. 로마서 12:21에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합니다. 선은 반드시 이깁니다. 우리가 악을 이기는 것은 선으로만 가능합니다. 악은 악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이적은 세상의 술수를 이깁니다. 하나님은 뱀을 반드시 이깁니다. 바로는 더 강퍅해져서 듣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술객들도 뱀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운이 없어 졌지만 다음에는 이기겠지"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바로는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술객들은 속이는 자요 오도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누구를 오도하고 있습니까? 자기 나라 왕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왕이 술객들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술객들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왕까지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속아서 더욱 강퍅해지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계시록에는 이기는 자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2:11에는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3:5에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합니다. 3:12에는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합니다. 이기는 자에 대한 보장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21:7에 이기는 자에게 이렇게 보증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처음에는 지는 것 같지만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승리의 묘미는 역전에 있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세상의 가짜에 속지 마세요. 세상의 가짜에 오도되지 마세요.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확실히 분별하세요. 생명이 없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에 잡아먹힙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싹이 났습니다. 싹이 났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지팡이는 싹이 납니다. 생명이 없는 지팡이는 잡아먹힙니다. 우리의 지팡이가 생명이 있고 싹이 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지팡이가 생명이 있어서 세상에서 생명이 없는 지팡이들을 삼키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생명 없는 삶을 삼키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한 주간의 삶이 승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이기는 삶을 사는 승리의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
출 7: 8-25
인간은 숙명적 존재이다(fatalistic existence). 사람은 나면서 운명을 타고난다. 백인에게서 난 사람은 백인이요, 흑인에게서 난 사람은 흑인이다. 흑인이 백인이 될 수가 없고 백인이 흑인이 될 수가 없다. 종에게서 난 사람은 종이요, 양반에게서 난 사람은 양반이다. 양반은 종이 될 수가 없고 종이 양반이 될 수도 없다.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사람은 가난하고 부한 나라에 태어난 사람은 부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은 민주주의 시민이고, 공산주의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은 공산주의 시민이 된다.
우리가 다행히 남한에서 태어났기에 민주주의 시민이 되었지, 우리가 만일 북한이나 중공에 태어났더라면 선택의 여지도 없이 공산주의 시민이 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타고난 숙명에 순응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백인은 백인으로 태어난 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흑인은 흑인으로 태어난 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양반은 양반으로 태어난 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종은 종으로 태어난 것을 만족하게 여긴다.
그러나 숙명이 격동기를 만나게 되면 타고난 불행에 대해 도전을 하게 된다. 나는 왜 흑인으로 태어났나? 나는 왜 종으로 태어났나? 나는 왜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나? 가난을 면할 길이 없나? 종의 굴레를 벗을 길이 없나?
저항이 쌓이고 쌓이면 힘을 형성하고, 힘이 강해지면 숙명의 벽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종은 종의 굴레를 벗고, 노예는 노예의 사슬을 끊는다. 갑오경장 이후 한국에는 종이 없어졌고, 미국에는 흑인 노예 해방 이후 노예가 없어졌다.
숙명의 벽은 무너뜨릴 수가 있다. 공산주의는 영원한 철의 장막으로 믿어왔다. 그러한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독,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폴란드 등 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의 숙명적인 벽을 무너뜨렸다. 역사는 이와 같이 숙명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보인 사건이 성경에는 오랜 옛날에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온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면서부터 노예가 되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로부터 학대와 천대를 받았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숙명에 순응하고 있었다.
우리는 노예이다. 영원히 노예이다. 노예로서 사는 것만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바로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이에는 말로 해결할 길이 없다.
어떤 노처녀가 시집을 가지 못해 고민하는 중에 어떤 노총각으로부터 청혼을 받았다고 한다. 다방에서 만나기로 하고 정한 시간에 처녀가 다방에 갔더니 그 다방에는 손님이라고는 아무도 없고 어떤 사람이 의자에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옷은 남루하고 신발은 떨어져 발가락이 보이고 머리는 반 대머리였다. 설마 저 남자는 아니겠지 하고 시간이 지나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코를 골던 사람이 제풀에 잠이 깨자 눈을 두리번거리다가 그 노처녀를 발견하고는 “미스 김이죠? 제가 미스터 리입니다. 대단히 반갑습니다. 뛰어난 미인이군요.” 하고 말을 걸었다.
노처녀는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미스터 리, 저는 문학과 음악을 좋아해요. 시인으로는 롱 펠로우와 키츠의 시를 좋아하고 음악은 클래식을 좋아해요. 저와 사귀려면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의 제 1악장 정도는 이해할 줄 알아야 해요.
그리고 그림은 다빈치, 조각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좋아해요. 미스터 리의 취미와 꿈은 뭐예요?” 입을 헤 벌리고 있던 노총각이 하는 말은 “그게 다 먹는 거예요?” 그 말 한마디로 끝장을 보았다고 한다. 바로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벽이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바로에게 나아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기를 원한다.”
바로는 듣지 않았다.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루도 내 보낼 수 없다.”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역만 더했다. 짚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라고 했다. 벽돌 수를 조금도 감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은 또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냈다. 똑 같은 말을 하라고 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희생을 드리기를 원한다.” 바로가 보내지 않았다. 모세와 아론은 듣지 않을 줄 알면서 또 말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로가 듣지 않을 것이다. 듣지 않더라도 가서 말해라.” 모세와 아론은 가서 뚝 같은 말을 했다. 바로는 여전히 듣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로가 이적을 보이라고 하거든 이적을 보여라. ”네 손에 든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될 것이다. 그 뱀을 잡으면 지팡이가 될 것이다.“
바로가 이렇게 배짱을 퉁기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애굽의 신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보다 우세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적을 행해 보이라고 말씀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손에 든 지팡이를 던졌다. 과연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 바로의 술객들도 지팡이를 던졌다. 그들의 지팡이도 뱀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술이었다.
다음 날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는 하숫가에서 이적의 승부를 겨루었다. 아론이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쳤다. 물이 피가 되었다. 강에 고기가 죽고 물에서 악취가 났다. 바로의 술객들도 물을 피가 되게 했다.
다음 날 아론은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지팡이를 손에 잡고 팔을 강과 운하와 물위에 폈다. 그랬더니 개구리가 애굽 땅에서 올라와 왕궁과 침실과 침상과 신하의 집과 백성들의 화덕과 떡반죽 그릇에까지 들어가 법석을 떨었다. 바로의 술객들도 그와 같이 했다.
바로의 마음은 돌 같이 굳어졌다. 이스라엘의 신이 이기나 애굽의 신이 이기나 싸워 보자고 대들었다. 이튿날 아론은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지팡이를 들어 땅에 티끌을 쳤다. 티끌이 다 이가 되었다. 사람과 짐승이 이로 인해 아우성을 쳤다.
바로의 술객들은 이를 나오게 하지 못했다. 술객들은 손을 들었다. 바로에게 말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권능이다. 우리는 그들과 같이할 수 없다.” 애굽의 신은 거짓이요, 술객들의 술법은 속임수라는 것이 드러났다.
모세와 아론은 지팡이 하나로 바로를 굴복시켰다. 애굽의 신을 쳐서 무릎을 꿇게 했다. 지팡이는 생명 없는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있으면 편리하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 지팡이다.
그러나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종의 손에 들려졌을 때 기적이 나타났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사용했을 때 이적이 나타났다. 지팡이에 신통력이 있어서 기적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지팡이를 잡은 사람의 손이 신령해서 기적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나타내 보일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의 종에게 지팡이를 들라 하면 기적이 나타나고 지팡이를 치라 하면 기적이 나타났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종으로 사명을 받으면 기적을 나타낼 수 있다. 여러분이 손에 잡은 막대기로도 기적을 나타낼 수 있고, 여러분의 손에 잡힌 펜으로도 기적을 나타낼 수 있다. 여러분의 손에 쥔 재물을 던지라 할 때 던지면 기적이 나타난다. 바치라 할 때 바치면 기적이 나타난다. 믿으시기 바란다.
문제는 지팡이를 잡은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자로 믿는가? 하나님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보냈는가?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잡은 지팡이는 기적을 나타낼 수가 있다.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가 별난 지팡이가 아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들에서 양치던 지팡이였고, 아론의 지팡이는 길 갈 때 짚던 지팡이였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손에 가진 것으로 기적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런 경험을 가진 분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 분은 형제들에게 간증하시기 바란다.
바로는 마음이 강퍅한 왕이었다. 진리에 대해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조건 배격하고 무조건 부인했다. 그는 여호와의 신이 애굽의 신을 삼키는 것을 보았다. 애굽의 술객들이 여호와의 종들을 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양심은 판정패를 시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내보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바로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첫째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이 땅에서 드리라. 너무 멀리 가지 말라. 둘째 어린아이들과 부녀들은 남겨 두고 남자만 갔다 오라. 셋째 어린아이들과 부녀들까지 가도 좋다. 양과 소는 두고 가라. 바로의 타협안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물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처음에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그러다가 멀리는 가지 말고 애굽 안에서 드리라. 그러다가 멀리 가도 좋다. 그러나 아이들과 부녀들은 두고 가라고 했다. 또 그 다음에는 다 가도 좋다. 소와 양만 두고 가라고 했다.
바로가 이렇게 한 걸음씩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계속해서 재앙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파리 재앙, 가축에 악질 재앙, 독종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 바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는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쓰러지려 할 때마다 한 걸음씩 물러섰다. 이것이 세상이 우리를 미혹하는 수단이다. 득세하면 한 걸음씩 다가서면서 위협하고 불리하면 한 걸음씩 물러가면서 타협안을 내놓는 것이 세상이다.
이러한 바로의 타협안에 대해 모세와 아론은 어떻게 대처했나? 일보도 양보하지 않았다. 한 마디도 들어주지 않았다. 바로가 한 걸음 양보한다는 것은 여간 선심이 아닌 것 같이 보인다. 그런데도 모세와 아론은 일체 타협에 응하지 않았다.
왜? 희생을 드리되 애굽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노예로 남아 있으라는 말이다. 희생을 드리되 어린아이와 부녀는 남겨 두고 남자만 가라는 말은 부녀와 아이는 노예로 삼겠다는 말이다. 다 가도 좋으나 소와 양은 두고 가라는 말은 재물은 두고 가라는 말은 재물 때문에 떠나지 못할 것이다는 생각이다.
절대로 못 간다고 한 것에 비해 감지덕지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호의도 아니고 양보도 아니다. 끝내 노예로 잡아 둘려는 심사는 변함이 없다. 출애굽은 완전히 애굽을 떠나는 것이다.
국경을 넘은 후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어른 아이 부인 노인들을 다 데리고 완전히 떠나는 것이다. 아이들을 두고 못 떠난다. 재물을 두고 못 떠난다. 세상과 마귀는 이것을 미끼로 우리를 잡아매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이와 같다. 완전히 세상을 떠나야 한다. 부모 형제 자매 일가 친척 다 같이 떠나야 한다. 가진 것 전부, 하던 일 다 짊어지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 어떠한 타협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매 주일 교회 갈 것 있나? 한 주일 건너 한번씩 가자. 아침에는 교회 가고 오후에는 골프 치러 가자. 공부하는 아이들은 집에 두고 어른만 교회 가자. 교회는 가되 십일조는 하지 말자. 신자는 되되 제직은 되지 말자.” 그럴듯한 말이다. 이러한 타협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교회에 발걸음도 못하게 한다. 그럴 때엔 어떻게 해야 할까?
모세와 아론 같이 분명히 대답해야 한다. ‘완전히 가면 가고 완전히 못 가면 안 가겠다.’ ‘바르게 믿으면 믿고 바르게 믿지 못하면 안 믿겠다.’ 온전한 대답을 들을 때까지 떼를 써야 한다.
모세와 아론은 10번이나 바로 앞에서 쫓겨났다. 마지막에는 다시는 너희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바로가 막말까지 했다. 그래도 좋다고 했다. 모세와 아론은 끝까지 달라붙어 항복을 받아냈다.
애굽은 무너뜨릴 수 없는 불신의 성이었다. 바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불신의 벽이었다. 이 성과 벽을 모세와 아론이 달라붙어 허물어 버렸다. 조상 대대로 우상을 섬겨 온 집안, 제사를 지내고 부처를 섬긴 집안, 부모 형제가 미신을 지키고 있는 가정의 불신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남편도 믿지 않고 자식도 믿지 않는데 나 혼자서 불신의 벽을 헐어 버릴 수 있을까? 있다. 하나님의 지팡이로 치면 불신과 미신의 허구가 무너진다.
불신의 벽은 기적을 보인다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는 기적을 보고 더 완고해졌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만 하면 하나님의 손이 불신의 벽을 무너뜨린다. 믿는 자의 인내와 투지력에 불신의 문은 열리고 만다.
신앙을 위해 싸우는 사람은 믿음으로 든든히 서야 한다. 한 걸음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타협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온전한 믿음을 얻기까지 버티고 나가야 한다.
모세와 아론이 끝까지 버틴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로가 좀처럼 너희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을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낼 것이다. 그 때까지 참고 싸운 결과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했다.
우리 앞에 큰 불신의 벽이 있다. 38선의 불신의 벽이 있다. 압록강 너머에 공산주의의 벽이 있다. 이 두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차라리 김일성의 종이 되고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중공에 가 사는 사촌 누이가 미국에 이민 온 오빠에게 이런 편지를 쓴 것을 읽어보았다. “오빠! 우리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어. 작년에는 자전거 한 대를 구입했고 금년에는 재봉틀까지 구입했어. 이제는 아무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고 있어.”
중공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게 살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몰라도 그런 것은 그런 대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이 굶주리고 영혼이 죽어 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누가 38선의 담을 헐까? 누가 공산주의 벽을 무너뜨릴까? 우리가 해야 한다. 공산주의의 벽안에 갇힌 사람은 공산주의의 벽을 헐어야 될 필요를 모르고 있다. 38선 이북에 있는 사람들은 38선을 헐어야 할 이유를 모르고 있다.
아론과 모세 같은 사람만 있으면 38선을 헐 수가 있다. 공산주의의 벽을 헐 수가 있다. 바로와 애굽의 불신의 벽은 공산주의 불신의 벽보다 결코 낮지 않았다. 모세와 아론이 애굽과 바로의 불신의 벽을 무너뜨린 것처럼 우리도 공산주의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하나님의 종을 통해 기적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 그들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을 것이다. 믿지 않으면 하나님이 손을 들어 쳐서 무너뜨릴 것이다. 모세와 아론과 같이 믿음에 굳게 서자. 공산주의자들은 바로보다 간교하다. 일보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어떤 타협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참고 인내해야 한다.
모세와 아론은 지팡이 하나로 기적을 나타내었지만 지팡이 하나도 가지 않고 기적을 나타낸 사람이 미국에 있다. 그 사람은 드와이트 무디이다. 20세기 미국의 복음 전도자를 빌리 그레함이라고 한다면 19세기 미국의 복음 전도자는 무디라고 할 수가 있다.
무디는 네 살 때 아버지가 경제적 파산으로 인해 세상을 떠남으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무디는 국민학교도 5학년 밖에 더 다니지 못했다. 무디는 주일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1854년 무디는 보스톤에 있는 아저씨의 신발 가게 점원으로 들어갔다. 무디는 아저씨의 권고로 교회에 출석했다. 무디는 교회에 출석하여 교회 정회원이 되겠다고 신청을 했다. 위원회는 무디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무디는 기독교 기본 교리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무디는 18세에 세례를 받았다. 무디는 그때부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성경을 배우고 기도를 하고 주일학교에 참석했다. 무디는 킴볼이란 좋은 선생을 만나 많을 것을 배웠다.
무디는 19살 때 시카고에 있는 아저씨댁에서 기술을 배웠다. 그때 무디는 신앙에 대한 불이 붙었다. 무디는 주일학교 선생이 되겠다고 요청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무디는 포기하지 않고 간청했다. 주일학교 교장은 무디의 요청을 들어주되 학생은 무디가 거리에 나가 학생을 모아와서 가르치라고 허락했다.
무디는 시카고 빈민굴에 가서 누더기를 입은 아이들 18명을 데리고 와서 주일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 술에 취한 사람,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주일학교를 키웠다. 무디의 주일학교는 마켓의 홀을 빌려 독립하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학생 1,500명의 미국 최대의 주일학교가 되었다.
무디에게는 어느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아내 에마가 유일한 생의 바퀴가 되었다. 에마는 교사로 학교에서 가르치며 농사를 지어 무디의 뒷받침을 했다. 무디는 설교가로 나섰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목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다.
1891년 10월 9일에 시카고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1,800채의 집이 불타고 300명이 죽고 피해액이 2억 달라가 되었다. 그 화재로 무디의 집도 불타고 그가 가진 모든 소유물과 YMCA 건물과 성경학교 건물이 다 불탔다.
이때 무디는 모세와 같이 시카고를 구원했다. 그는 화재로 거리에 방황하고 있는 시민들을 위해 구제 활동을 벌였다. 구제 활동은 시민들의 가슴에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는 영혼의 부흥 운동이 되었다.
교회를 다시 세웠다. 시민과 함께 시카고 재건 운동에 앞장을 섰다. 뿐만 아니라 시카고 재건 운동을 위해 수차례 영국으로 가서 집회를 인도했다. 그렇게 함으로 무디는 세계적 부흥사가 되었다.
무디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구두 수선공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고 헌신했기 때문은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낳았다. 무디에게 배운 사람들 중에 미국에 위대한 교육자 정치가가 많이 나왔다.
무디가 세상을 떠난 지(1899.12.22) 100년이 지났다. 무디의 사상과 업적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무디는 왜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았나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무디의 절친한 친구였던 토리가 남긴 말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첫째 무디는 하나님에게 완전히 굴복했다.
둘째 무디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셋째 무디는 깊이 있는 성경 연구가였다.
넷째 무디는 겸손했다.
다섯째 무디는 돈에서 해방된 사람이었다.
여섯째 무디는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열정이 있었다.
일곱째 무디는 위로부터 능력을 받았다.
무디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하던 일은 계속되고 있다. 무디 성경학교, 무디 방송국, 무디 출판사, 무디 교회, 무디 영화사가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민족을 구원할 수가 있다. 지팡이 하나 없이 구두 팔던 세일즈맨도 시민을 구하고 나라를 구했다.
우리 손에 무엇이 있는가 만져보자. 그것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기도하자.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만 마음에 들면 큰 일을 할 수가 있다. 무디는 중학교에도 다니지 못했다. 장로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목사가 하지 못하는 큰 일을 했다. 우리도 우리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헌신자가 되자. (끝)
지금 한국에는 큰 기도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금년 9월에 북경에서 열리는 아시안 게임에 전도단을 파송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86. 88 올림픽 경기를 통해 한국은 복음을 세계 여러 나라에 전파하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서울에 세계 체육인 선교회가 결정되어 북경 아시안 게임 때 중공에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88 올림픽 조직 위원장이었던 박세직 집사가 우리 나라의 올림픽 경기 시설을 무료로 빌려주는 대신 한국 기독교 선교단 3000명의 비자 발급의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 체육인 선교회는 가능하면 3000명 전도단을 버스로 평양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도록 하고 그것이 안되면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공으로 들어갈 계획이라고 한다.
38선은 영원히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일까? 중공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문일까? 동독의 벽도 무너지고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의 문도 열리는데 북한과 중공만 영원히 문을 닫아 둘 수는 없을 것이다.
벌써 김일성은 하나님의 지팡이로 몇 번 얻어맞고 타협안을 내어놓은 바 있다. 언제, 어떻게 손을 드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의 기도와 열심에 달렸다고 본다.
이스라엘 백성을 430년만에 애굽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이 북한 공산주의에 갇힌 우리 형제 자매를 희년이 되기 전에 해방시켜 줄 것을 믿고 기도하고 협력하자.(끝)
위대하신 하나님.
출 7: 8-25절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의 애굽인도 그분을 알지 못한채 죽게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의 백성을 노예로삼고 삯 없이 일을 시키고 그들의 사적인 욕구와 탐욕을 충족시키기위해, 무자비하게 다루는 그 모든 악행을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여야 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그들의 악에 대해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과 응징의 손길, 그분의 심판의 손길이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 힘할 시기가 왔던 것입니다.
1,하나님의 종은 기본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과 지시를 아는 것입니다.(8-9)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그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8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로 하여금 바로에게 가서 자유와 해방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
곧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라는 것을 선포할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도전적인 자세로 그들의 메시지가 하나님께로 왔는지 이적을 보이라는 바로의 요구는 회의적이고 조롱하는 투였습니다.
2.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 대하여 순종해야합니다.(10절),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실 때 그분은 순종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자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또한 말씀과 함께 무엇을 행할지에 대해 정확하게 지시해 주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순종을 기대하십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행하라고 명하신 대로 그들이 행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들은 순종하여 바로에게갔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
3.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입니다.(10-13절), 1)하나님의 권능이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 나타났습니다.(10절),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셨습니다. 2)왕은 그 자신의 능력을 보이심으로 맞섭니다.(11절),
3)하나님께서 아론의 지팡이로 바로의 술객들의 지팡이를 삼키게 하십니다.(12절), 4)비극적이게도 바로는 이 모든 증거를 묵살했습니다. 바로의 마음은 강퍅하여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4.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백성 보내기를 거절합니다.(14절), 심판을 불러온 비극적인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을 강퍅케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두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사자를 바로에게보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마음을 강퍅케 하고 듣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회개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풀어주어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할 수 있게 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5.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선포합니다.(15-16절), 1)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침에 바로가 나일 하숫가로 나올 때에 그를 만나라고 지시하셨습니다.(15절), 왜 바로가 아침에 나일 하수가로 나왔겠습니까? -모욕하기 위해서? -아침 산보를 위해서?
-범람의 시기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나일 강의 수위 상승여부를 점검하기 위해서? -아침예배. 곧 나일의 신인 하피나 닐루스에 대한 숭배를 의해서입니다. (힌두교도들에게 있어 갠지즈 강이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듯이 나일 강은 신성시되고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2)모세는 그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어야 했습니다.(15절), 3)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했습니다.(16절), 4)모세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데 대해 바로를 책망해야 했습니다.
6.심판의 목적은 구원의 주이시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는것입니다.(17) 바로는 거짓 신들을 숭배하였는데 더욱 잘못된 것은 바로 자신이 신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최고의 권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로는 스스로를 신으로 애굽과 그 백성을 조성하고 창건한 자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운명과 그의 백성의 운명, 그들의 삶의 안락함과 목적을 결정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는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출5:2절). 이제 하나님께서는 바로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도록 하실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자신이나 다른 어느 누구도 참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을 증명하실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오직 그분만이 구속의 하나님이시오. 진정으로 인간을 구원하고 건져내실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것. -오직 그분만이 살아 계시고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7.심판에 관한 경고와 선포가 있었습니다.(17-19절),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던 사람들의 불경건함과 불의에 대해 내려지게 되었던 심판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나일 강의 물이 피로 변할 것이었습니다.
-그 물이 오염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물고기들이 죽고 물에서 악취가 날 것이었습니다.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 큰 심판은 애굽 전역에 있는 모든 물 그원, 곧 모든 하수와 운하와 못과 호수에 미칠 것이었습니다.
8.심판의 날이 이릅니다.(20-21절), 1)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 순종합니다.(20절), 2)하나님의 심판이 즉시 임합니다.(20-21절), -나일 강이 변하여 피가 되었습니다.
-물고기가 죽었습니다. -물에서 악취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수원에 피가 있었습니다. 그 심판은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물고기가 썩어 악취가 났습니다.
9.심판에 대한 반응입니다.(22-25절),1)거짓 사자들 (술객들)이 이적을 흉내냅니다.(22절), 2)바로의 마음이 더욱 강퍅하게 되어 하나님의 심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22-23절), 3)사람들이 우물을 파서 물을 구합니다.(24절),
애굽 전역의 물이 온통 오염되었기에 그들은 신선한 물을 얻기 위해 할 수 없이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의 열매, 곧 우상 숭배의 죄와 다른 이들을 노예로 삼고 학대한 악행에 대한 결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강퍅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대 애굽 사람들에게 임했던 이 심판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모든 악행에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할렐루야!
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박봉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