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끝없는 군중집회로 집단 최면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이야기
<3회> 공포 정치와 군중 집회를 결합하다
키 크고 핸섬한 푸른 눈의 키란(Keiran)은 러시아 혁명사 ‘오타쿠’다. 고교 시절 그는 구소련을 상징하는 “망치와 낫” 문양 아래 CCCP(소련공산당)이란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즐겨 입고 다녔다. 대학에 들어와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의 ‘수용소군도’를 정독하면서 그는 스탈린 정권의 폭력성에 눈을 떴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러시아 현대사를 전공하고 있다. 옌안 시절 마오쩌둥의 정풍운동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키란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1940년대 초반이면 스탈린의 대숙청(1936-1938)이 이미 끝난 시점인데, 혹시 마오는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통제를 모방하지는 않았나요?
그 당시 공산권 전역에서 스탈린이 누렸던 절대의 권위를 모른다면 결코 던질 수 없는 예리한 질문이다.
◇소련의 고문취조·사상검증 기법 전수받아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아 정풍운동을 기획한 제1의 인물은 바로 캉성(康生, 1898-1975)이었다. 1936년 캉성은 모스크바에서 소련 비밀경찰(NKVD)과 긴밀한 협조 아래 수백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서 숙청했던 인물이다. 스탈린 시대 소련경찰의 축적된 비밀정찰, 고문 취조 및 사상검증의 기법이 캉성을 통해 그대로 중국공산당에 전해졌다. 이 역시 스탈린의 기획으로 보인다. 1937년 11월 바로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활약하던 왕밍(王明, 1904-1974)과 캉성을 전용 비행기에 태워서 옌안에 급파했기 때문이다.
옌안에 도착 한 후, 캉성은 곧 왕밍을 저버리고 절대 권력으로 떠오르는 마오쩌둥의 편에 선다. 캉성의 예측대로 모스크바도 마오쩌둥을 중국공산당의 최고영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1938년부터 소련의 지식계에선 게릴라 혁명투사 마오쩌둥을 칭송하고 숭배하는 사회분위기가 나타났을 정도였다.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축약본도 그 즈음 모스크바에서 출판되었다.
마오에게 캉성은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캉성은 누구보다도 모스크바 유학파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모스크바의 정치상황에 밝았으며,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마오처럼 캉성도 서예와 시작(詩作)에 깊은 조예가 있어 둘 사이엔 넓은 공감대가 있었다.
캉성은 또 1930년대 상하이 은막의 스타 장칭(江靑, 1914-1992)을 마오에게 연결한 인물이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이 장칭의 방종한 행실을 들춰내자 캉성은 장칭의 방패막이가 되어줬다. 결국 1939년 11월 19일 마오쩌둥은 세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 1910-1984)을 버리고 장칭과 네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놀랍게도 캉성과 장칭은 1930년대 초반 밀애를 나눴던 애인 사이로 알려져 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캉성은 절대군주를 포섭하기 위해 미인계를 쓴 간교한 인물이다.
지금 캉성과 장칭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까닭이 있다. 장칭은 이후 문화혁명 4인방 중의 우두머리로 맹활약했으며, 캉성 역시 마오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문화혁명을 주동했던 핵심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문혁 당시 장칭과 캉성은 마오쩌둥에 고삐 잡혀 달려가는 쌍두마차의 두 말과도 같았다. 마오의 분신(分身)으로서 캉성은 스탈린식 공포통치의 상징이었으며, 장칭은 대중선동의 구심이었다.
◇ 마오쩌둥, 스탈린 저작 부지런히 읽어 1935년 1월 대장정(大長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불과 한 달 보름 전 공산당군은 후난(湖南)성 상강(湘江) 유역에서 국민당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려 4만의 병력이 궤멸되었다. 마오쩌둥은 꾀이저우(貴州)성 북부 준이(遵義)회의에서 모스크바 유학파 리더 보구(博古, 1907-1946)에 전패의 책임을 물어 논쟁에서 승리한 후, 이른바 '28 볼셰비키'를 제치고 당권을 장악한다.
1936년 겨울 옌안에 입성한 공산당군은 바닥부터 혁명의 진지를 다시 건설해야만 했다. 마오쩌둥은 토굴에 칩거하면서 원대한 공산혁명의 청사진을 그렸다. 그가 꿈꿨던 혁명을 이루기 위해선 다섯 가지 조건이 필수적이었다. 1) 강력한 군사력, 2) 소련과의 연대, 3) 대중조직의 확대, 4) 이념의 통일, 그리고 5) 절대적 리더십이었다. 장제스와의 투쟁을 통해서 마오쩌둥은 깨달았다. 혁명은 낭만적 모험이 아니라 목숨을 건 전쟁이다. 혁명전쟁의 승리를 위해선 전 당원을 결속할 수 있는 완벽한 이념이 요구됐으며, 무엇보다 절대적 리더십이 필요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스탈린은 캉성을 마오쩌둥에 파견했다. 스탈린은 옌안 시절 마오를 “동굴의 공산주의자”라 불렀다. 기껏 게릴라전사라 낮춰 봤다는 이야기다. 캉성은 스탈린식 공포정치를 체득한 인물이다. 스탈린은 그런 캉성을 마오 곁에 붙임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이 잔혹한 사회개조의 실험임을 일깨우려 했던 듯하다. 스탈린의 의도대로 캉성은 옌안에 몰려든 꿈 많은 청년당원들을 겁박하고, 고문하고, 조련하고, 개조했다.
물론 최종책임자는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스탈린의 저작을 부지런히 읽었다. 대공포의 실상에 대해서도 그는 소상히 알고 있었다. 1930년대 그가 남긴 혁명저작을 읽어보면, “대원수 스탈린”에 그의 존경과 흠모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마오는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스탈린의 통치술을 답습했다. 요컨대 마오와 캉성의 조화로운 결합은 스탈린주의가 중국 땅에서 토착화했음을 보여준다.
이 그림 속에서는 스탈린과 마오의 상하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림 속의 마오는 왼손에 레닌의 저서를 들고 있다. (PUBLIC DOMAIN)
◇“군중집회는 혁명의 연속”
정풍운동을 통해서 마오는 인신구속, 강제구금, 고문취조, 수면박탈 등 스탈린식 공포로 당원들을 감시하고 처벌했다. 아울러 마오는 군중집회를 일상적으로 개최해서 선전선동과 집단최면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군중노선과 군중집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군중노선이란, 군중의 요구와 제안을 수용하는 민중주의적 정책수립을 의미한다. 군중집회란, 관판대회 혹은 관제집회를 의미한다. 시간, 장소, 목적 및 세세한 구호는 물론, 운집하는 군중의 규모 역시 정부가 알아서 정했다.
1950년 12월-1951년 10월, "진압반혁명운동"(진반운동)의 한 장면.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한 후, 중국 전역에선 반혁명분자를 색출하는 대규모 정치 캠페인이 벌어졌다. 미국과의 전쟁은 마오에게 내부결속을 다지고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절호의 기회였다.(PUBLIC DOMAIN)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군중집회의 연속이었다. 매번 중요한 정책이 입안되면, 중공정부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통해서 그 정책을 선전하고 또 합리화했다. 군중집회야 말로 사상을 개조하고 인격을 교정하는 가장 요긴한 집체적 최면 의식이었다. 그는 군중집회를 “혁명의 연속”이라 생각했다. 그는 오직 대규모 집회를 통해서만 군중의 계급의식을 벼리고 혁명정신을 고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집회에 불려나간 인민은 정부의 요구대로 사회주의 건설의 당위를 부르짖고, 집산화의 깃발을 흔들고, 반혁명세력을 비판하고 투쟁해야만 했다. 인민은 일찌감치 집회와 시위의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였지만, 거의 매일 같이 집회에 참여해야만 했다. 집회에 나서지 않는 인민은 적인(敵人, 인민의 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군중집회는 곧 집체적 정신무장의 의식(儀式)이자 강제적 사상개조의 과정이었다.
요컨대 문화혁명(1966-1976)은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마오쩌둥의 군중집회의 결합이었다. 날마다 개최되는 군중집회에서 성난 인민은 스탈린식 테러리즘으로 적인(敵人)을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마오가 직접 제창한 “인민민주독재”가 인민의 광장에서 광적으로 펼쳐졌다. 중국 헌법 총강 제1조에 명시된 바로 그 “인민민주독재”이다.
1950년대 초반 진압반혁명운동의 한 장면. "견결히 반혁명분자를 진압하라!" 학생들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에 이어 마오쩌둥과 맨 뒤에 김일성의 사진까지 들고 행진하고 있다. 당시는 200여만의 중공군이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을 치르고 있었다.(PUBLIC DO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