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18일(토) 오후 2시 도카시키 섬 ‘아리랑위령비’에서 열린 ‘한국.오키나와 희생자 합동 위령제’.
이곳으로 연행됐던 몇 분의 영정 사진이 놓이고, 술과 떡 등 몇 가지 제물이 놓이고, 추모사가 이어지고, 막바지 순서에 이르자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으셨던 박수남 감독님이 모든 힘을 쥐어 짜내 ‘봉선화’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1절에서 2절로 이어지다 다시 1절로, 끝났는가 했더니 다시 1절로... 무려 4번을 반복해 부르셨습니다.
음정과 가사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숙연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여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을 1935년생 저 할머니는 왜 그토록 애절하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 노래를 부를까... 말로 다 하지 모든 심경이 그 노래에 다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리랑 위령비는 1997년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추모제는 여러 해 만에 갖는다고 했습니다. 울창한 산속 찾는 사람도 많지 않은 산 중턱. 세월은 지났지만 그때 그 참혹했던 기억들이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에 긷들여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전날 저녁 저는 박마의 감독에게 “어머니에 이어 따님까지 이렇게 수십년 동안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쉬어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 박수남 감독님께 그 답을 넘겼습니다. 1초의 망설임없이 나온 말.
“한!, 일본 놈에 대한 한입니다!”
순간 전율을 느꼈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잘 모릅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모르니까 분노가 없지요. 일본의 차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계속 싸울수 밖에 없죠. 싸워야합니다.”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무 말도 할수 없었습니다.
위령제가 끝나고 일본군 위안소로 쓰였던 옛 터를 찾아 갔습니다. 마침 그때의 기억을 안고 계신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저는 여섯 살때였어요. 원래는 가정 집이었는데 3년 전 기와를 엊었었죠.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이 집을 빼앗아 위안소로 썼죠. 한국인 위안부 7명이 있었습니다. 열 여섯 살에서 많아야 스물 네 살 정도의 젊은 여성이었어요. 그 중 한 분이 배봉기 할머니입니다. 이 섬에 일본군 600명이 들어왔는데, 7명이 그 600명을 상대한 셈이라고 봐야죠”
오전 도카시키 섬으로 오는 배편에서 관부재판 지원회 하나후사 도시오, 하나후사 에미코 선생님과 영화 ‘허스토리’로 인해 적잖이 마음이 상했던 일 등 몇 얘기를 나눴는데, 사무실에 이금주 전시관의 하나로 ‘이금주의 방’을 만들 생각이라고 하니까 너무 반가워 하셨습니다.
“광주에 가면 이금주 회장님이랑 그 방에서 함께 묵었어요. 저희 말고도 그 방에서 신세 진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며느님이 밥상을 차려 2층으로 가지고 올라왔지요. 맛있었어요. 그때가 많이 생각나요. 회장님이 보고싶습니다.”
하나후사 에미코 선생님의 얘기였습니다. 유네스코 기록 등재를 위해 자료 협조도 요청했습니다.
“그때는 팩스로 연락했지요. 주고받은 팩스가 꽤 많아요. 수년 동안 손도 대지 못하고 박스로 쌓인 채 있는데 손 댈 엄두가 나지 않네요...”
밤 8시 30분에 시작한 교류회(하루 평가회)는 예상을 한 참 빗나갔습니다. 한 분씩 얘기듣는데 밤 12시 무렵에야 끝났습니다.
덥고 습한 날씨에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어서 어제는 그대로 떨어져 버렸고, 어제 일을 오늘에야 보고 드립니다.
(오늘은 교류회가 일찍 끝나기를 바라며 오카나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