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6/미담?]세 누나와 형이 나와 블러드blood가 달라?
최근 오랜 친구의 23살 아들로부터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었다. 아들이 고교 3학년때 그의 엄마가 수년간 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대학 입학을 앞둔 시기여서 충격이 무척 컸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충격이 있었다. 그에게는 누나 3명과 그 아래 열두 살 위의 형이 있었다. 그 아들은 열아홉 살 때까지 살아오면서, 그들이(네 명) 자기와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였다는 것을 단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을 알고 난 후 몇 년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긴가민가’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것이다. 결코 거짓말같지 않은, 진솔한 고백에 나조차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세상에 그럴 수가? 믿기 어려웠다.
나름 ‘정리’를 해보았다.
친구는 1982년 겨울 결혼하여 딸 셋을 내리 낳았고 뒤를 이어 아들까지 4남매를 둔 가장이었다. 큰딸이 중학생 때였다고 했던가. 그해 부인이 뜻하지 않은 일로 숨졌다. 30대 후반에 졸지에 홀아비가 된 것이다. 천성이 말수도 적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지만, 부지런하고 손재주만큼은 따라올 자가 별로 없을 정도로 좋았다. 심성 착하기는 말도 못한다. 세상에 어느 여자가 자식 넷 딸린 가난한 농사꾼에게 시집을 오겠는가, 한없이 막막했는데, 몇 년이 안돼 천사같은 여인이 뜻을 같이 했다. 재혼 5년만에 임신까지 했으니 친구가 44살 때였다. 늦둥이라면 늦둥이. 이제 5남매의 가장이 된 것이다. 친구는 이미 딸 셋과 아들도 결혼시켰으니. 비록 부인 두 명을 앞서 보냈으나 복이 많다면 많은 셈이다. 더구나 늦둥이가 자신의 농업을 잇겠다고 하니 말이다. 여인은 전처 소생의 여고생 큰딸에게 이복동생을 낳을까 말까를 물었다한다. 그렇게 낳은 아들이 바로 이 아들이다. 전처 소생 4남매를, 진짜로 친자식처럼 사랑했기에, 그들 모두 친엄마로 생각하고 ‘엄마’ ‘엄마’하며 무척 따랐다고 한다. 특히, 친엄마 기억이 거의 없는 아들(이복형)이 유난히 따랐기에, 농촌생활에 너무 적응이 어려워 가출을 결샘했다가도 여러 번 주저앉았다고 한다.
형제간에 수십 년 동안 매일매일을 살면서 여러 문제로크고작은 다툼이 있게 마련이거늘, 어떻게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새 엄마’가 낳은 동생을 20여년을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한결같이 변함없이 대했을까? 얼마든지, 어느 때든지 ‘출생의 비밀’이 무의식적으로도 밝혀지기는 너무 쉬운 일이 아니었을까? 그 누나와 형의 ‘속내’를 아름답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엄마도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친아들에게 그 사실을 어떻게 말하지 않은 것일까? 내 친구인 그 아버지도 전처 소생인 자식들에게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고, 늦둥이에게도 내색 한번 하지 않았을까? 너무 궁금했는데,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일부러 식구들이 그 아들 앞에서 ‘쉬쉬’하지도 않은 듯하다. 하지만 어떻게 약속이나 한 듯, 그런 표시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6명(부모, 이복형제 4명)을 비롯한 주위의 친척들(고모 등 아빠의 형제들) 모두 너무너무 ‘훌륭한 사람’들이지 않은가. 이런 일이 어디 흔한 일일까?
그 아들의 고백이다. “진짜 몰랐는데요. 엄마 장례 치르고 얼마 안돼 어느 자리에선가 어떤 누나가 ‘우리는 서로 엄마가 다르다’고 해 처음 알았어요. 제 첫 마디가 ‘누나와 내가 블러드(blood)가 다르단 말야? 말도 안돼’였어요. 그후 1년 정도는 실화實話일까? 싶어서 자주 고민이 되더라구요. 그럴 때마다 그런 느낌과 생각을 컴퓨터에 마구마구 털어놓기는 했어요. 누나 세 명과 형 그리고 엄마, 아빠가 한번도 해준 적이 없는 얘기를 듣고 놀라긴 놀랐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그 사실을 알고 나서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요. 단지, 엄마가 좀 짜-안한 생각은 들어요. 제 성격이 원래 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거든요.”
그 아들하고 이런 얘기가 시작된 것은, 그가 아버지의 직업(농업)을 이으려고 한국농수산대학을 입학하여 졸업한 것이 신통하여 몇 마디 물어봤기 때문이다. 친구와는 같은 동네이고 초등학교(초등학교)를 5년 동안 같이 다닌 동창이기에 서로 집안내력도 잘 아는, 60년이 넘은 꾀복쟁이 친구이다(나이는 한 살 많음). 당연히 그의 늦둥이 아들도 나의 아들처럼 생각되고, 더구나 젊기에 한없이 예쁘게 여겼다. 심지어 저런 아들이 한 명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니. 어떻게 농수산대학을 갈 생각을 했는지, 참 신통한 녀석이다. 전공도 '과수果樹학과'는 아빠에게 얼마든지 배울 수 있으니 ‘조경학과’를 선택했는데, 3년 동안 어려웠다고 한다.
하여 내가 말했다. “네가 진로를 농업으로 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excellent choic)’이야. 이제 두고 봐라. 농업은 ‘오래된 미래’라는 것을 차차 알게 될 거다. 청년들이 농업에 뛰어들어야 해.” “예. 열심히 해봐야지요” 젊은이답지 않게 대답도 선선했다. “그래. 오늘 내가 쓸데없는 것을 물어본 것은 아니지? 언젠가 네 엄마 납골묘 앞에 네 고등학교 학생증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불쑥 생각이 나서 물어본 거야. 괜찮지?” “예” 그 아들과 대화는 여기에서 끝이 났지만, 여운은 오래 갔다. 정말 여운餘韻이 오래 갈만한 얘기이지 않은가. 요즘 세상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가족’이 있다는 것은 ‘세상은 역시 살만한 곳’이라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하여 그 대화의 후기를 남기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