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넌지시 무학 대사에게 농담을 건넸다.
“오늘 보니 대사님의 모습이 꼭 돼지와 같아 보입니다.”무학 대사는 그저 빙긋이 미소만 지었다.
얼마를 기다려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궁금한 이성계가 다시 물었다.“그래 대사는 내가 무엇처럼 보입니까?
”무학 대사는 대답했다. “부처님처럼 보입니다.”이성계는 의아했다.
“나는 대사를 ‘돼지처럼 보인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나를‘부처처럼 보인다고 합니까?”라고 되물었다.
무학대사는“돈안지유돈(豚眼只有豚)불안지유불(佛眼只有佛)입니다.”라고 말했다.
“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이다.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를 관점이라고 한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관점은 특정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관점(Point of view)과
자기의 세계관 곧 신념을 통해서 바라보는 관점 (Perspective)이 있다.
Point of View(관점)는 보는 사람의 처지와 입장, 위치와 역할, 정체성에 따른 주관적 시각을 말한다.
예를 들면 역사적 사건을 승자와 패자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기업에서 경영자와 근로자의 관점도 다르다. 세대 간의 관점도 다르다.
어떤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보수와 진보의 관점이 다르다.
Perspective(관점)의 per는 접두사through (통해서)와 spect는 specere의 look at(보다),
ive는 접미사 tending to(...하는 경향이 있다)의 합성어이다.
즉 관점이란‘...을 통해서 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개인의 신념의 틀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도, 성격도, 취향도 다르지만,
내면에 지니고 있는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라는 서로 다른 각자의 신념의 틀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세계관의 넓은 틀을 통해 그 안에서 어떤 삶을 살것인지 인생관이 결정되고,
인생관을 기반으로 중요한 삶의 가치관을 형성한다.
캐나다 리딤머 대학교의 종교학 교수인 알버트 월터스 (Albert M. Wolters, 1942~)는
세계관이란“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라고 정의했다.
신념은 한 개인이 믿음의 대상에한 확신 (conviction)이다.
따라서 개인의 근본적 신념은 삶의 원칙이고, 기준이며, 방향이다.
이는 하나의 틀(Framework) 이나 형태(Pattern)로 일관성을 갖는 경향이 있다.
관계로 이어지는 우리의 삶은 사회적 갈등을 일상처럼 겪으며 산다.
갈등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마치 서로 다른 세계를 사는 듯한 착각을 만든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전혀 다른 해석이 난무하고, 상대의 논리는 왜곡되거나 무시된다.
심리학에서 인간에게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필터(Fillter)와 편향(Bias)이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마주하는 정보를 처리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필터는 곧 관점의 틀이다.
외부의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해석하는 인지적 과정이다.
편향은 근본적인 신념에 의해 객관적인 판단을 왜곡한다.
나이가 들어 시력이 약해져서 이젠 돋보기를 써야 글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가까운 것은 단일 초점 돋보기를 쓰면 되는데 멀리 있는 것을 보기 어렵다.
다소 비싸기는 하지만 다초점안경을 쓰고 있다.
가까운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식별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을 고집하는 편향으로 인한 갈등이 생긴다.
확증편향은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인지적 필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고,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정보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데이터와 증거를 판단으로 선택해야 한다.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피드백을 반영해야 한다.
중국의 고사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그 말의 유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공자나 맹자의 글에서 비슷한 말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도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했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Seeing things from another perspective)이 역지사지이다.
갈등을 풀어내고, 협상과 협력을 지향한다면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는 역지사지가 필요하다.
대통령의 계엄을 두고 절차적 정당성과 내란 여부를 다투는 탄핵 반대와 찬성의 갈등이 극단의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를 다루는 헌법재판소나 사법기관의 수사와 소송, 재판 절차도 공정하고,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야의 입장과 신념의 틀에서 볼 때 관점이 다르고, 해석도 다를 수 있다.
옳고 그름을 다투는 것 조차 갈등을 격화시킨다. 국민을 분열로 갈라치기하는 정쟁을 멈추어야 한다.
깨지고 부서진 (Deformed) 나라를 여야가 서로의 처지를 바꾸어 직시할 때 회복(Reform)이 가능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바른 눈을 가지려면 바른 마음이 먼저 필요한 거군요~ 요즘 노안이 와서 눈이 잘 안 보여 답답했는데..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보기를 바라는 신의 뜻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그럼 보이지 않는 것 어떻게 볼 수 있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