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는 Bach
양성원 │ 첼리스트 sung-wonyang@hotmail.com
인류 역사상 영원히 남을 위대한 음악 유산인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아쉽게도 작곡가 본인의 자필악보가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오히려 다양한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이 곡을 이해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나는 18세기부터 존재하는 네 개의 다른 악보를 주의 깊게 연구한 뒤 음반을 위한 녹음을 진행했다. 그 중 둘은 바흐가 생존했을 당시 안나 막달레나 바흐와 요한 페터 켈너가 옮긴 것이고, 다른 둘은 18세기 알려지지 않은 필사가가 만든 것이다. 베렌라이터 출판사가 이 네 개의 필사본을 한데 모아 내놓았는데(신바흐 전집. 2권, 1991). 이 기념비적인 작품을 해석하는 심오하며 마법과도 같은 세계로의 여행에 길잡이가 되었다. 그 끝없이 길고 멈출 수 없는 열정의, 때론 머리카락이 쥐어 뽑히는 듯한 고민과 혼동으로 점철된.
곡 해석에 있어 언제나 첫 번째로 대두되는 문제는 아티큘레이션에 대한 것이다(음악에서 아티큘레이션이란 화자(話者)의 발음과 같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안나 막달레나의 원고는 그녀가 직접 베꼈을 남편 요한 제바스티안의 원본에 가장 근접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이 악보에 적힌 아티큘레이션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많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첫 세모음곡에 대해 안너 빌스마가 쓴 책의 제목이 왜 ‘펜싱 마스터’인지 궁금한 사람에게 나는 이 악보에 적힌 아티큘레이션을 연주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실제로 베렌라이터가 최근에 펴낸 악보(BA 5216)에 포함된 해설은,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경우 바흐가 원래 쓴 원고와 안나 막달레나가 베낀 사본이 아티큘레이션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두 눈을 의심할 만큼 현저한 차이이다). 이는 그녀가 사보한 ‘첼로 모음곡’도 그와 같은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켈너는 오늘날 학자들이 바흐 음악의 가장 중요한 필사가로 꼽는 오르가니스트로서 작곡가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었고, 그의 사본은 가장 초기에 만들어졌으나 이 역시도 내가 보기에는 의문점이 있다. 위의 두 악보 모두에 온전히 수긍이 가지 않았기에.
나는 종종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제3의 필사가의 원고를 참조했다. 일단은 그쪽이 알아보기에 훨씬 선명했다! 선율이 어느 음에서 시작해서 어느 음으로 진행하는지 보기에 수월했던 것이다. 또한 이 사본도 18세기 중반에 만들었기에 바흐와 동시대의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무척 숙련된 필사가가 바흐의 원본을 가지고 만든 것 같다. 내가 위에 언급한 혼란스러운 의문은 ‘모음곡 1번’ 프렐류드 첫 마디가 각 판본마다 얼마나 다른가만 보아도 알 수 있다(나머지 부분을 보면 내가 ‘때때로 머리카락이 쥐어 뽑히는 듯한 고민과 혼동의 여행’이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어를 더 잘 ‘발음’하기 위한 다양한 가능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지극히 매혹적이다(나는 매번 실험 세션 동안 항상 경청해주었던 아내에게 특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의문의 여지없는 권위를 가진 중재자가 없었기 때문에 각기 다른 악보에 기초한 수많은 연주 방식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토록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은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많은 음악가와 학자들에게 더 큰 흥미를 주었다.
여기에서 이 음악이 가진 불멸의 가치는 해석상의 차이점을 초월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나는 이 음악이 그토록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는 인간적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이런 걸작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그 음악 언어와 창조성을 느끼기 위해. 꼭 숙련된 아티스트나 학자, 진지한 클래식 음반 수집가가 될 필요는 없다. 방금 만난 살마일지라도 바흐에 관해 얘기하게 될 때 그가 느끼는 흥미로움의 강도에 놀라곤 한다. 우리는 언제나 이 모음곡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되고, 이 심오한 음악이 얼마나 그를 감동시켰는지 얘기하게 된다. 인터넷으로 투표를 하는 시대에 나는 한 콘서트에서 온라인 투표로 뽑힌 첫 번째 곡을 연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16~25세가 대부분이었던 투표 참가자들은 놀랍게도 ‘바흐의 첼로 모음곡 1번’을 애청곡으로 골랐던 것이다.
열한 살 때 있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무엇보다도 곡의 순도 높은 짜임새(당시에는 이런 표현을 생각하지 못했지만)가 바흐의 모음곡을 처음 공부하던 나를 감동시켰다. ‘모음곡 3번’의 ‘부레 1번’이 바로 그 곡이었다. 흐르는 듯하고, 자연스럽고 단순한 화성 진행으로 결합된 완벽한 리듬감은 첼로를 배우던 내게 이전에는 좀처럼 맛보지 못한,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 곡을 연주하고 난 뒤 어린마음에 키가 커지고 몸무게도 좀 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도 모음곡의 다른 특징들에 엃힌 매력을 계속 발견했다. 완벽한 구조적 균형감과 세련미(모음곡 1번)에서 거대함(모음곡 6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각 악장의 다양한 아름다움과 그들이 가진 환상적인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짜릿한 의욕은 깊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물론 이 곡들을 한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은 언제나 흥분을 몰고 왔다. 특히 ‘모음곡 5번’의 심오한 깊이에는 각별히 주목하게 된다. A현을 G로 낮춰 조율하는 스코르다투라를 사용한 것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놀라운 색채감의 창조와 첼로 모음곡 가운데 유일한 프렐류드와 푸가, 이를 잇는 프랑스 스타일의 쿠랑트*와 지그를 이음새 없이 하나로 묶은 솜씨에 탄복하게 된다.
분명 바흐의 모음곡은 내게 있어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변함없는 친구이다. 내가 정확히 기억할 수 없는 때부터, 나는 특히 어려운 일을 접했을 때 모음곡을 연주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훨씬 느린 템포로 곡을 연주하며 청력을 온전히 집중한다. 그 후 몇 시간이 흐르면, 어떠게든 음악은 나에게 삶과 그것이 엮고 있는 모든 일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마법을 선사한다. 나에게 이 경험은 청각이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또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콘서트 직전, 나는 종종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이 모음곡을 연주한다. 그러면 정말이지 놀랍게도 팽팽하던 긴장감이 사라지고, 무대로 나가기 전에 흥분과 기대감이 다시 솟아난다. 나는 첼리스트이건 아니건 모든 음악가들에게 이것을 경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여섯 모음곡은 실제로 모든 악기로 편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녹음을 위한 연주에서 나는 조반니 그란치노의 첼로(1697)로 연주했고, ‘일반적’인 세팅에 피에르 시몽의 활(대략 1860)을 사용했다. 피치는 440Hz에 맞췄고(이 수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442Hzr가 좀 더 표준적이다). 네 개 줄은 거트 현으로, 활은 가볍고 유연한 것을 골랐다. ‘적을수록 풍부하다’는 좋은 격언이 있는데, 나는 그런 조합이 더 많은 색채와 질감의 음영을 준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다른 판본이나 ‘관습’에 익숙한 청자와 첼리스트는 익숙지 않은 음표와 리듬 그리고 장식음을 듣게 될 것이다. 내가 앞서 언급했듯이 이 녹음을 위한 연주는 주의 깊은 연구와 내 직관과 상식이 혼합된 결과물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녹음이 2004년 전반기에 가졌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1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많은 변모를 거듭했고, 이 곡에 대한 내 해석에도 눈에 띄게 다른 변화가 생겼다. 모름지기 이것이 불멸의 걸작을 연주할 때마다 겪게 되는 현상이 아닐까?
*프랑스풍의 쿠랑트는 이탈리아풍의 코렌테보다 느리게 연주한다. 이 곡은 2/3박자의 변화가 심한 리듬 형식으로 작곡되었다. 프랑스풍의 지그는 붙점 리듬을 가지고 있으며, 이탈리아 지그보다 덜 기교적이다. 모음곡 5번은 ‘프랑스풍의 모음곡’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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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첼리스트 양성원은 세계적인 음반사 EMI의 전속 아티스트로서 세계 굴지의 공연장에서 세계 관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첼리스트이다. 또한 EMI를 통해 발매한 데뷔앨범 코다이 작품집이 세계적인 음반잡지 그라모폰의 에디터스 초이스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