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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5
#주기도문 #유혹
13 우리를 試驗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惡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權勢와 榮光이 아버지께 永遠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 sed libera nos a malo. Quia tuum est regnum, et potestas, et gloria in saecula saeculorum. Amen.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돈과 권력과 음욕을 탐하여 용이 세운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절하며 큰 음녀 바벨론과 교류하는 목사들은 아마도 목회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회를 시작할 때에는 분명 나름대로 거룩한 소명을 받았다 여기고 엄숙하고 진지하게 사역에 임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를 시작한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그 목사들이 복음사역보다 돈과 권력과 음욕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 것은 자기자신들이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과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과 음욕에 빠진 목사들은 이미 성령을 완전하게 소멸시킨 상태여서 자기들의 목사라는 직분과 그동안 해온 목회사역을 구원의 조건과 공로로 굳게 여기고 있는데다가, 자기들이 이미 심각한 시험과 죄에 빠져있는지도 모르고 인정하지도 않으므로 두번다시 회개할 필요성도 절박성도 이유도 의지도 기회도 갖지 못하게 되어 영원히 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 목사가 돈을 탐한다는 것은 교회를 이용해서 영리사업을 벌이는 것,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하는 것, 교회 재정을 개인 재산으로 빼돌리는 것, 부동산 알박기로 터무니없는 보상금을 받아내는 것, 교회가 위기에 처해있어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온갖 혜택을 곶감 빼먹듯이 취하다가 떠나버리는 것, 오로지 생계를 목적으로만 목회하는 것 등을 가리킨다. 목사가 권력을 탐한다고 하는 것은 세속 정치 활동과 집회에 참여하는 것, 대선이나 총선 시기에 정치인을 예배에 초청하고 소개하는 것, 정치이념만으로 국가 지도자나 정부를 판단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하와는 남편인 아담보다 앞서고자 하는 교만과 허영 때문에 범죄하였으므로 하와의 후손인 모든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앞서려 하거나 지나친 사치와 허영의 유혹과 시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여성 신자들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이러한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간구해야 한다. 아담은 하와에 대한 육적인 애정 때문에 범죄하였고 이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이 생겼으므로 아담의 후예인 모든 남자들은 여자에 대한 음욕의 유혹과 시험에서 평생동안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남자 신자들은 음욕의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간구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성경을 얼마나 바르게 알고 믿고 있는지, 계명을 행함으로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나타내고 있는지, 주님께 얼마나 참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드높이는 것으로 시작했으므로 기도의 마무리도 이것으로 맺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당하다.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容恕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容恕하시려니와
For if you forgive others their trespasses, your heavenly Father will also forgive you,
Si enim dimiseritis hominibus peccata eorum : dimittet et vobis Pater vester cælestis delicta vestra.
Ἐὰν γὰρ ἀφῆτε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τὰ παραπτώματα αὐτῶν, ἀφήσει καὶ ὑμῖν ὁ Πατὴρ ὑμῶν ὁ οὐράνιος·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容恕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容恕하지 아니하시리라
but if you do not forgive others their trespasses, neither will your Father forgive your trespasses.
Si autem non dimiseritis hominibus : nec Pater vester dimittet vobis peccata vestra.
ἐὰν δὲ μὴ ἀφῆτε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οὐδὲ ὁ Πατὴρ ὑμῶν ἀφήσει τὰ παραπτώματα ὑμῶν.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주님께로부터 죄 용서를 받기 위한 공로나 조건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즉, 성도들이 주님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따라 선을 헹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성도들의 죄를 먼저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이다. 성도가 모든 선행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신앙 수준에 따라서 날마다 조금씩 범위가 커가는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이 저지른 모든 잘못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신앙 수준에 맞게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만큼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용서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완벽한 용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크게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20191025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2장.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일곱째 날에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은 알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일할 때와 더불어 쉬어야 할 때가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쉬실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아니, 도리어 하나님께서 단 한순간이라도 쉬신다면 우주 만물은 바로 소멸된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라도 단 한순간도 쉬지 않으시고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시고 움직이시며 계획하신 바대로 완벽하게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계명의 제 4계명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제 4계명은 너무도 잘 알다시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당신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되고 순종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련하고 완악한 우리 형편과 수준을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하나 일일이 설명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신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제정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게 지어진 때에 제정된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영광과 찬양을 받으신다. 따라서 우리는 주일을 지키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 이외의 잠다한 것으로 분주할 필요가 없다. 그저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서 예배의 질서를 따라 잠잠하고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성도 간의 교제를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정신을 사납게 하는 왁자지껄한 이벤트는 아무리 인간 보기에 좋아보여도 주일에는 피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영혼이 더욱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으며 그분의 위대하심을 묵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다나 마리아나 둘 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분주함보다는 마리아의 잠잠함을 더 칭찬하셨다. 따라서 교회는 성도들이 주일에 마르다의 분주함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예배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교회 봉사자들은 특히 주일애 자기들의 봉사의 진정한 목적이 희석 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제 4계명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중간중간 휴식을 취함으로써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에 퍼지게 하면서 이 안식일 제도도 전 세계적으로 심어놓게 하셨다. 만약에 복음이 퍼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인간 사회는 애굽의 핍박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쉬지도 못하고 고역에 시달리기만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복음을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주일을 제도적으로 지킴으로써 어느 정도 인권이 보장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제도는 지금 대부분의 국가에서 거의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 주일 제도의 참된 의미를 점점 상실해 가고 있다. 사업주들은 하루라도 쉬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직원들이 일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도저히 주일을 지킬 수 없을 정도의 업무량을 부과하고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무능하다 낙인찍고 평가에 반영하여 불이익을 준다. 그러다보니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직장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휴일에도 강제 출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이 악순환이 계속 되어 과로와 사고가 겹쳐 생명에 위협을 주기도 한다. 반면에 어딘가에 고용되어 일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경제적 만족과 충족을 위해 스스로 안식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입시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학업을 위해서 자녀들의 안식을 빼앗는다. 학생들은 학업과 취업을 위해서 스스로 안식을 포기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비신자들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서도 너무나 흔히 만연되어 있어서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무덤덤해졌다. 그렇게 안식을 소홀히 하게 되면 결국 개인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간성이 말살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 사업주는 자기만 신앙 생활을 누리지 말고 마땅히 직원들에게도 주일을 비롯한 적절한 휴식을 보장해줘야 한다. 학생 자녀를 둔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아무리 자녀들의 학업이 중요하고 코 앞에 닥쳤다 하더라도 그들의 주일과 안식을 강탈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 청년들은 요즘 같이 점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앞날도 막막한 때에 학업과 취업과 아르바이트 등을 병행하느라 힘든 현실이라고 해도 주일까지 내어줄 정도로 합리화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내가 주일을 철저히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즉각적인 큰 보상을 바란다거나 율법주의적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너그러우셔서 우리의 티끌만한 신앙으로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주일을 지켰으니 이만큼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실 때도 있으시다. 그러나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되며 도리어 주일을 지키면 당연히 손해가 발생하고 그 불이익을 신앙을 위한 댓가 또는 고난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사업주는 주일에 업무를 하지 않으면 그만큼 경쟁 업체에 뒤처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사업주의 사명인 것이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주일에 자녀를 학원이 아니라 교회에 데려오게 되면 그만큼 뒤처지게 될까 염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녀가 커서도 신앙을 유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것을 바라보고 지금의 조바심을 견뎌내야 한다. 그리스도인 청년들은 주일만큼은 타협하지 않으면 학업에서나 취업에서나 경제력에서나 잠시 어려워지게 되는 것을 참아내도록 해야 한다. 내가 주일을 지켰으니 경쟁 업체에 뒤쳐지지 않게 해달라거나, 자너들이 시험을 잘보고 좋은 학교에 가게 해달라거나, 학점도 잘 받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게 해달라거나 하는 요구는 정말로 어지간하면 하지 않도록 하자. 도리어 그러한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며 주일을 지킬 수 있게 역사하신 그리스도께 감사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안식일은 지금의 토요일인데, 왜 오늘날 교회는 주일을 지키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차로 토요일을 진정한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는 교파도 있다. 물론 오늘날 교회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안식일만큼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을 사도들과 초대 교회들이 기념하여 지킨 정황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새롭게 복음 시대를 여신 것은 태초의 하나님의 창조 사역보다 결코 작지 않다. 이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와의 결별의 의미도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부터 지금까지 인류 역사적으로도 교회가 주일이라 지키는 일요일을 각 나라마다 표준 공휴일로 지정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셨다. 그러므로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을 교회의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매우 보편적이며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일 체제를 무시하고 굳이 토요일이나 아니면 다른 날을 안식일로 지킨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럴 경우 얼마나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야 할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하나님께서 다른 날이 아니라 굳이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신데는 숫자의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0부터 9 또는 1부터 10까지의 숫자들은 7을 제외하고는 다들 나름의 특징과 의미가 있다. 특히나 6이란 숫자는 완전수라 불릴만큼 오묘하고 완벽하며 아름답다. 그러나 그만큼 교만하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특별히 이 6이란 숫자를 인간 또는 짐승의 수라고도 한다. 그런데 7이란 숫자에는 과연 어떤 특징이 있는가. 처음도 아니고 끝도 아니며 중간도 아니다. 6과는 달리 수리적인 어떤 법칙도 없다. 아무런 조화가 없기 때문에 아름답지도 않다. 만약에 숫자로 구성된 학급이 있다면 7이란 숫자는 철저하게 외톨이였을 것이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이 아름답지도 조화롭지도 않은 7이란 숫자를 당신의 수로 거룩하게 하신 것 같다. 이는 약하고 비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유사하며 그들을 당신의 복음으로 크게 들어 쓰시는 그리스도의 성품과도 유사하다. 그래서 7이란 숫자는 과거 유대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고대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도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7이란 숫자를 응용한 사례가 있다. 이 7이란 숫자는 마치 그리스도인과 같다. 그 자체로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아무런 매력도 낼 수 없는 비천한 존재다. 그러나 그런 질그릇 같은 비천한 이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으로 내주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7과 같은 자들이므로 주변의 다른 7과 같은 사람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는 것이다.
#20211025
#여호수아 #Joshua 1:1-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다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는 먼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할 것을 명령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오래전부터 약속하셨지만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부여하셨다. 이는 여호와께서 마치 책임을 회피하시려고 이스라엘에게 의무를 지우신 것이 아니라 그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이스라엘이 배제되지 않도록 동참시키시는 것이고 여호수아는 그 일에 가장 앞장서게 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이 육적으로는 버겁고 고된 것이나 영적으로는 여호와의 큰 일에 동참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었다. 다음으로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를 격려하시는데 이는 그의 육신의 연약함을 고려하시고 긍휼히 여기신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지극히 온유했던 선대 지도자 모세를 본받아서 스스로 백성의 지도자가 될 마음은 없이 단지 자기가 존경해 마지않는 모세를 평생동안 수종드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모세의 뒤를 잇는 지도자로 세우셨기 때문에 여호수아로서는 아무리 여호와의 뜻에 순종한다 하더라도 본성적인 부담감과 두려움까지 떨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런 여호수아의 본성적인 연약함을 보시고 당신께서 항상 함께 하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격려하신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여호와의 율법을 제대로 지켜 순종할 것을 제시하신다. 사람의 관점으로는 어떤 큰 일을 맡게 된 책임자가 걱정하지 않으려면 그 일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전략전술을 여호와께로부터 받는 것이 안심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지만, 여호와께서는 단지 당신의 율법만을 잘 지켜 행하는 것만이 두려움 없이 강하고 담대하게 형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말씀하신다. 여호수아는 자기 스스로의 능력과 의지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수도 여호와의 율법을 다 지켜 행할수도 없었으나, 여호와께서 그를 세우시면서 백성을 지도하고 율법을 지켜 행할 능력과 의지도 더불어 주셨다. 따라서 이를 마치 여호수아가 여호와께로부터 아무런 능력을 받지 않고서도 자기자신의 의지로써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와 직분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의 냐라가 임하시오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려고 교회에 세우신 지도자이므로 스스로 천거해서 교회의 직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여호수아처럼 교회의 선한 직분자들에게 지명이나 추천을 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정당하게 세움받은 직분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성경과 성령으로써 교회에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맡은 이들이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사역을 최선을 다해 이행해야 한다. 교회 직분자들이 교회를 섬기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직분으로 교회에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원리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철저하게 지키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벗어난 방식으로 아무리 큰 성과와 업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는 아무런 선한 의미가 될 수 없다. 정당한 방식으로 교회에서 직분을 수행하면서 가로막히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불법적인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멈춰서서 주님의 뜻을 간구해야 한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군사들이 흩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가 번제를 드리는 망령된 짓을 하였고, 여호와께서 꿈으로나 우림으로나 아무런 말씀도 안해주신다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낙원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던 사무엘의 영을 불러올리는 짓을 저질렀다. 반면에 다윗은 약탈을 당해 함께 한 무리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 군급한 상황에서도 여호와께 어떻게 해야할지를 먼저 간구하였다. 직분자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 중 하나는 교회의 어떤 문제를 정당하게 대처하는 중에 어찌어찌 주변의 예상치 못한 도움으로 해결되는 경우에 그 도움의 정당성을 따져보지 않고 성급하게 주님의 도우심으로 단정해버리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도움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정당하지 않은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직분자는 그런 도움을 받게 되는 순간에도 그것이 과연 성경과 성령에 합당한 것인지를 반드시 분별해야만 한다. 금전적인 도움이라면 그 돈이 과연 정당한 소득으로 발생한 것인지, 도움을 주는 자의 생계에 부담이 될 정도로 지나친 금액은 아닌지 등을 살펴봐야 한다. 사회법적인 절차에 대한 도움이라면 그 절차가 위법이나 편법이나 지나친 특혜는 아닌지를 따져봐야 한다. 이를 분별하고 제어하는 능력은 성경에 대한 지혜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며 성령께서 그 상황에서 적용할 말씀을 떠오르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은 비단 교회 직분자에게만 적용이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각자가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듯이, 그리스도인도 각자의 삶에서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명령을 이행해야만 한다. 여호수아가 두려워말고 강하고 담대하라는 격려를 받았듯이, 모든 성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붙들어주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어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두려워말고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듯이, 모든 성도는 끊임없이 성경을 배우고 익혀서 자신의 삶에서 실천해 나가야만 한다. 아무리 급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더라도 불법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각오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뜻과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불법적인 도움을 주님의 도우심으로 미화해서는 안되고 성경에 의거하여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20201025
#민수기 #Numbers 1:1-16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다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4 각 지파의 각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을 너희와 함께 하게 하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각 지파별로 20세 이상으로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남자의 수를 집계하라고 명령하신다. 20세 이상이라 함은 더이상 부모의 양육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행할 수 있는 성인의 연령 기준을 의미한다. 싸움에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비단 국방의 의무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일정한 의무와 책임을 질 수 있는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을 갖춰야 함을 의미한다. 여자가 아닌 남자의 수를 세어야 하는 것은, 가정이나 사회가 감당해야 할 위기나 위험이나 과제들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우선적으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지시하신 것은 건강한 신체와 올바른 정신을 갖춘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의 수를 계수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인 남자의 수만 세었다고 해서 여자나 아이들이나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을 낮은 자들로 취급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가치를 따라 나누신 것이 아니라 다만 분담해야 할 역할에 따라 분류하신 것 뿐이다.
아담과 하와는 성장 없이 성인으로 지어졌다. 그 이후에는 아기로 태어나서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부모의 양육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언제를 성인으로 보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가인과 아벨은 아마도 아담과 하와로부터 성인이라는 표를 받은 후에 여호와께 각자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떠난 후 아담은 103세에 셋을 낳았으므로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린 때는 아마도 1백세가 되지 않은 나이였을 것이다. 이후 노아 시대까지 초고대인들은 거의 1천년에 육박하는 연령을 살았는데 몇 세 부터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수 백 살에 누구를 낳고 낳고 라는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나이에 낳은 자녀가 첫 아이인지도 불분명하다. 노아의 홍수 이후로는 (기후 변화 요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인간의 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져서 오늘날 인류와 비슷하거나 좀 더 많은 정도가 되었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에서도 40세 정도에 아내들을 맞아들였다. 야곱은 40세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면서 가급적 빨리 라헬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7년이 지난 47세에 두 아내를 맞아들인다.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 제사장의 딸과 결혼한다. 이처럼 아담 이후로부터 요셉 까지는 제사나 혼인 등으로 성인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연령을 추정할 뿐이다.
여호와께서 성인 연령으로 지정하신 20세는 경험적으로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효하다. 문명 사회에서는 대체로 이 나이부터 성인으로 취급하였고 문명을 접하지 않은 원시 사회에서도 이 나이를 넘어서까지 성인식을 미루지는 않는다. 이는 생리학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동기에서 바로 성인기로 넘어가지 않고 그 중간에 소위 사춘기 시절이 있어서 신체와 정신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사춘기 시기에는 부모 조차도 조심스러울만큼 한껏 예민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럭비공과도 같아서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이런 상태로 수 년 간 지낸 후에 신체적으로는 성장을 완성하게 되고 정신적으로는 푹풍이 지나간 후의 잠잠함 처럼 진정되고 성숙해지기는데 그 연령이 대체로 20세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어느 사회건 20세가 되면 과도기적인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잘 통과했다는 의미로 드디어 성인으로 대우해 주는 것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그동안 부모나 사회로부터 허락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자유롭게 누릴 권리와 권한이 확대되는 것과 동시에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건장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을 가진 성인은 그만큼 외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춘만큼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사회적 의무를 감당할 책임이 있다. 여호와께서 싸움에 임할 성인 남자를 계수하라 하신 것은 자기들보다 더 연약한 그릇인 여성들과 어린 자들과 노인들과 장애인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래서 가정의 대소사는 가장인 아버지를 필두로 해서 아들들이 먼저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고 국방의 의무도 우선적으로 남성들에게 지우는 것이다. 이는 여성들을 전적으로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결정과 책임이 우선적으로 남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도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로 마귀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20세 이상의 성도들이 많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쓰임받을만한 장성한 성도들은 점점 줄어가고 보호받아야 할 고연령 신자들만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젊은 성인 신자들이 급감하고 있는 교회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갈렙이 85세에 정복전쟁에 나선 일화를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여호와께서 섭리하신 특별한 기사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보편적으로는 적용할 수 없다. 설령 갈렙은 지도자이기 때문에 85세라는 고령에도 싸움에 나설 수 있었다 치더라도 실제로 전투를 담당한 자들은 20세 이상의 젊은 남성들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교회에 20세 이상의 젊은 신자들이 없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봤을 때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다. 만약에 그런 고령화 된 교회가 진정으로 회생하기를 원한다면 대다수를 차지하는 고령자 교인들이 스스로 누리던 교회에서의 권리들을 내려놓고 젊은이들과 교회 학교를 위해서 여생을 바친다는 각오로 헌신하는 수밖에는 없다.
5 너희와 함께 설 사람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르우벤 지파에서는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요
6 시므온 지파에서는 수리삿대의 아들 슬루미엘이요
7 유다 지파에서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
8 잇사갈 지파에서는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요
9 스불론 지파에서는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요
10 요셉의 자손들 중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요 므낫세 지파에서는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이요
11 베냐민 지파에서는 기드오니의 아들 아비단이요
12 단 지파에서는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이요
13 아셀 지파에서는 오그란의 아들 바기엘이요
14 갓 지파에서는 드우엘의 아들 엘리아삽이요
15 납달리 지파에서는 에난의 아들 아히라이니라 하시니
16 그들은 회중에서 부름을 받은 자요 그 조상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이스라엘 종족들의 우두머리라
모세와 아론은 자기들이 직접 백성의 수를 세지 않고 각 지파별로 우두머리를 세워서 그들이 자기 지파의 20세 이상 남자를 계수하게 한다. 그들은 자기 지파의 의견대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모세가 호명하여 지정한 것인데, 이는 아마도 여호와께로부터 지시를 받아 세운 것이 유력해 보인다. 즉,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여호와께서 직접 세우신 지파의 대표로서, 다른 20세 이상의 남성들보다 신체와 정신이 탁월했을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인간 사회를 섭리하실 때는 직접 나서시기보다는 대행자를 세우셔서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하시고 그들로 사회를 이끌어가게 하신다. 따라서 어떤 사회건간에 자기가 속한 곳의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필수 덕목이다. 사도가 언급했듯이, 교회 밖 세상의 지도자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선과 의를 행하는 군주건 악과 불의를 행하는 군주건 간에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은 복음 안에서 그들에게 순종해야만 한다. 중세시대 신앙개혁가 칼빈 선생은 개혁신앙 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던 원수 같은 프랑스 왕에 대해서도 일잘 비난이나 저주하지 않고 지극한 공경심으로 자기의 저서인 그리스도교 강요를 헌사와 함께 바쳤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목사들의 반정부 행태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행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각 지파들의 우두머리들은 물론 남들보다 탁월한 외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어도 모세를 통해 여호와께서 세우신 자들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 우두머리들은 자기들의 지위를 악용해서 끊임없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함으로써 여호와를 거역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우두머리들로 인해서 가나안 땅은 악평을 받게 되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돌아다녀야 하는 징벌을 받게 되었다. 그 우두머리들로 인해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지도자들이 반역을 일으켰고 그들로 인해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 하였다가 전염병과 불뱀 등의 징벌을 당해 죽기도 하였던 것이다. 우두머리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우두머리들만 화를 당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동조한 자들까지 여호와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 범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죄로 인해서 그들을 따르는 다른 많은 교인들까지 멸망의 심판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법을 저지르는 목사에게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사탄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며 멸망당할 바벨론에서 도망치지 않고 머무르는 것과 같다. 대표적으로 전광훈과 그의 무리들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