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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구(연필 · 만년필 · 펜)에 관한 시
연필 / 박영희
꼴 베는 낫으로
연필을 깎아주었던 낭규머슴
밥태기꽃 피어나고
자운영 풀꽃들 숲을 이루면
도지는 병처럼 낭규머슴 생각난다
아버지 술 취한 날이면
부러진 연필 숙제장 챙겨
소죽 쑤고 있는 머슴방으로
숨어들었던,
낭규머슴 낫 들고 연필 깎으면
나는 아궁이에다 고춧대도 밀어넣고
깻대도 밀어넣고
침 잔뜩 발라 서툴게 풍년초 말아주면
낭규머슴 좋아라 육자배기 불러대고
그 어떤 씨앗 잡풀 한포기도
내치지 않는
저 들녘 초록으로 물들면
연필 깎아 편지 한통 쓰고 싶어진다
- 박영희,『팽이는 서고 싶다』(창작과비평사, 2001)
미술연필 / 박철
을왕리 가을 바다에 와서
갑자기 미술연필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꽉 찬 자유를,
흔들리며 유혹하는 쓸쓸함을 보면 누구나
엉뚱한 생각을 한번쯤은 할 것이다
고등학교 때 화실에 다니며 곱게 곱게 심을 세웠던
일제 투모로우나 독일제 홀바인 미술연필은
모두 가짜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선을 그렸다
깊어만 가는 가을 바다가
누가 밤새 파놓은 인공호수라 해도
나는 이렇게
구름 가는 대로 노을 물드는 대로 나를 만들고
내가 그려진 벽에는 바다가 있다
- 박철,『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2009)
연필로 생을 쓴다 / 박노해
밤중에 홀로 앉아 연필을 깎으면
숲의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다
사박사박 연필로 글을 써 내려가면
수억 년 어둠 속에 묻힌 나무의 숨결이
흰 종이 검은 글자에 자욱이 어린다
연필로 쓰는 글씨야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지만
내 인생의 발자국은 다시는 고쳐 쓸 수 없어라
그래도 쓰고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건
오늘 아침만은 곧은 걸음으로 걷고 싶기 때문
검푸른 나무향기 가득한 이 밤에
-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2010)
만년필 /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 대가리 눈 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의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 주거나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ㅡ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ㅡ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 송찬호,『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볼펜 / 김사인
볼펜이 자빠져 있네.
다 쓴 자지 같네.
쩔은 과메기 토막 같네.
나는 왜 저 볼펜이 시무룩하다고 생각할까.
볼펜은 그 여자의 하이힐 소리와 냄새와 작은 손등과 푸른 실핏줄을 기억할까
펄쩍 뛰어라도 봐 볼펜!
논두렁의 개구리처럼 괜히 한번
털렁거려봐 볼펜!
시골길 쇠불알처럼 천연덕스럽게
-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2015)
펜에 대하여 / 이재무
마른 땅 파 들어가는 삽이여,
묵은 논 갈아엎는 쟁기여,
고랑 타고 앉아 풀 매는 호미여,
돌멩이에 날[刀] 찍혀 우는 쇠스랑이여,
이마에 한 톨 두 톨 돋는 땀이여,
경작의 노고보다 헐한 소출이여,
- 이재무,『경쾌한 유랑』(문학과지성사, 2011)
펜의 이중생활 / 이선영
거짓말은 하지 말자고 했다
밖을 나서면 사소한 거짓들이 있었으나
종이한테만은 거짓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종이에게서 멀어지면 나는 입을 다물거나 종이 몰래 웃었다
웃는 얼굴로만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매끈한 플라스틱 내 몸체는 늘 별일이 없었다
하지만 볼펜 똥을 참지 못하는 펜 심이
종이를 짓찧는 밤들이 계속되었다
세상은 플라스틱 나를 환대하고
종이에게 나는 볼펜 똥만 덕지덕지 묻히고 마는 넌더리일 뿐이었다
- 이선영,『60조각의 비가』(민음사, 2019)
유산 / 배영옥
귀 어두운 아버지
아무리 크게 말해도 내 입만 골똘하게 쳐다보시더니
귀 닫고 눈으로만 대화하시더니
입마저 어두워지셨다
귀의 어둠이 눈에 엉겨 붙어 눈이 더 어두워지셨다
눈의 어둠이 귀에 엉겨 붙어 귀가 더 어두워지셨다
말이 자꾸 헛나가신다
입이 자꾸 미끄러지신다
시인에겐…… 만년필이…… 입이다
입…… 간수…… 잘해야 한다!
눈 귀 밝을 땐 아무 내색 없으시더니
눈 귀 입 어두워지고서야
겨우 한 말씀 하신다
- 배영옥,『뭇별이 총총』(실천문학사, 2011)
만년필 / 염창권
시간의 몰약 같은 강물빛이 고여 있다.
흡혈의 영혼들이 쓰러져 누운
저탄장貯炭場에
네 혀는 검고 말라서, 수유는 길고 진해서
시집『오후의 시차』 2022. 책만드는집
파커 만년필에는
올라브 하우게 (Olav H. Hauge·1908~1994)
파커 만년필에는 시가 많이 들어 있다, 1킬로미터나 죽,
잉크병엔 더 많이 있다,
몇 마일이 있다. 종이는 우편물로, 고지서로, 광고로,
채우라는 서식으로 들어온다.
나는 자신 있게 미래와 마주한다.
볼펜이 떨어질 때 / 최호일
볼펜이 책상 위에서 굴러 바닥에 떨어질 때
툭 소리를 내나
그리고 이상한 여름이 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떨어질 때마다 바닥이 생겼다
이미 바닥이 있었던 곳에서
떨어진 나뭇잎과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 사이에서
우리는 천천히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볼펜이 떨어져 낙엽이 되었다
떨어지는 것 때문에
루즈를 바르는 사람과 루즈를 보는 사람이 나타났고
이 거리에는
신체의 다른 부위는 사라지고
붉은 입술만 걸어 다니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궁금한 다리가 보일 때까지
볼펜이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 주말이 오고
짐승들은 두 마리 세 마리씩 새끼를 낳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양철 지붕을 두드리면 비가 왔다
그리고 이상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볼펜이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열두 시가 되었다
이미 시간이 있던 곳에서
연필 등대 / 강희근
통영은 연필 등대로 일기를 쓰고 있다
통영이 걱정하는 것은 당동과 미수동이 달랑
충무교 하나로 애초 혈육이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외지에서 통영 보러 오는 사람들
운하라 하며
곡예하듯 충무교 건너다니고
해저터널이라 하며
바다 밑 터널에 들어가 경이의 눈빛
가슴 쓰다듬어 내린다
통영은 바다에 끄슬린 햇볕으로
때로는 살빛 거칠지만
손 흔들면 손 아래로 들어오는 터미널이나 강구안
이켠 산이나 저켠 언덕이 사촌처럼 따습고
그 아래 그 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집들이 시집갈 날 받아놓은 처녀처럼
댕기머리 수주웁다
제 살 제 생김새 어디로 가겠는가
일기장은 대개 이러하지만
미수동에서 건너다보이는 세월의 어금니, 그 사이로
충렬사와 착량묘 돌계단이 흐르고
그 배경으로 생활의 근육처럼 산복도로가 흐른다
통영은 미수동 연필 등대로 일기를 쓰고 있다
등대의 눈 밖에 있는 것들
주도와 가마섬, 곤리도 사량도로 뻗어가는 뱃길
일기에는 톳내음 파래내음 미역내음… 후각을 찌르고
후각은 접속어처럼 단락을 바꾸어 주고 있다
* 연필 등대 : 통영에는 문향이라는 의미로 연필 모양의 등대를 몇 개 세웠는데 여기서는 미수동에 서 있는 등대를 말한다.
샤파 연필깎이/ 심재휘
사춘기는 수식어가 없는 밤이다
열여섯을 앓고 있는 딸이 눈물방울을 떨구고
아직은 식지 않은 여름밤에
선풍기는 소리 없이 돌고
나는 연필깎이로 샤파 샤파 연필을 깎는다
연필은 어둠 속에다 무엇을 쓰려는 걸까
선풍기는 고개를 좌우로 젓기만 하고
나는 연필깎이를 적당히
정말 적당하게 힘을 주어 돌리는 오래된 손
아빠의 달은 창밖을 공전하고
딸의 별빛은 너무나 희미하고 이 넓은 우주에서
샤파 샤파 아프게 깎고 깎이는 연필의 밤
셀 수 없는 몇 자루의 밤을 몸 안에 품고 오늘은 딸이 운다
그럴 때면 나는 뭉툭하고 눈물이 그렁한 연필을 연필깎이에 넣고
길고 까만 심이 나오도록 손잡이를 돌리는데
살살 돌리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는 나의 손에는
얇고 구불구불한 눈물의 밥만 가득한데
연필의 內心이 제법 뾰족해져도 나에게는
열여섯 사춘기를 베껴 쓸 수 있는 연필이 끝내 없다
서글픈 딸의 봄밤은 작고 가지런한 그녀의 발등 위로
수식어도 없이 한 방울씩
툭툭 떨어져 번지고 있다
연필로 그린 집/ 이근배
연필로 집을 그린다
흰 머리 여든일곱 북녘 아들
아흔일곱 남녘 의붓어머니 앞에서
예 살던 초가집 한 채
새로 짓는다.
소학교 미술시간이면
선생님 예쁨 받던 그림 솜씨로
예순다섯 해 전 떠나와
눈으로 생각으로 시시때때 그리던 집
기둥이며 마루며 지붕이며
날아갈 듯 반듯하게 짓는다.
어리는 물기에 눈이 흐려
돋보기만 애꿎게 닦으며
주름지고 굽은 손이어도
—다음 세상에 오래 함께 살아야지
하늘에 둥실 꿈집 한 채 떠오른다.
———
*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때(2015. 10. 21) 이한식(87) 씨가 의붓어머니 권오희(97) 씨 앞에서 옛집을 그렸다.
6호 연필/ 유미애
바깥귀를 접은 지 오래 나는 나를 완성시킬 수 없네
위대한, 설산의 구두소리는 내 것이 아니고
신문지에 스케치한 카카리키*는 나의 나무에 도착하지 않았네
하지만 너라는 그림자는 뜻을 굽힌 적이 없지
캄캄한 그 혀 속으로 휘파람 한 토막을 건네줄게
벌거벗은 음들이 서로의 무늬를 섞을 때
마침내 내게도 객관적인 입술이 생기는 거야
붉은 달을 부르는 순간 네 안의 짐승이 깨어날 거야
피투성이의 등을 문대던 꽃나무와
떠꺼머리 굴 한 채가 너에게 속하게 되겠지
노래를 멈추지 마, 해진 자켓이 갈기를 세울 때까지
날마다 초췌해지는 내 몸의 얼룩들을 가져가
바닥과 바닥의 심장을 관통해온 이 눈물을 마셔
필갑을 열면 검은 밀림이 타오르는 밤
네 눈 속, 두 번째 달이 둥글어질 때
가라 표범
성대가 녹아내릴 때까지 변방을 달려
휘파람도 불 수 없는 밤
국적 없는 네 울음소리가 또 다른 너에게 가 닿을 수 있도록
———
* 앵무새.
연필의 밤 / 유미애
그 손에 잡히기 전까지 바다는 내게 없던 말이다
나를 깨운 그는 또 다른 상자 속의 사람
아침이면 우리는 연둣빛이 다녀간 종아리를 긁었다
밤새 모서리가 쏟아놓은 얼룩덜룩한 비명들
나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지만
출렁이는 무늬를 감춘 그의 등이 바다의 색일 거라 믿었다
나지막해지는 자신이 그는 좋다고 했다
깎이고 부러지는 데는 이력이 났다 했다
나는 매일, 화석이 된 그의 눈물을 캐내어
싱싱한 이파리들을 베꼈다
돛배와 등대를 그리고, 그가 놓친 여우를 기다렸다
그림자를 한껏 젖힌 나팔수 뒤로
복사꽃 그늘을 풀어헤치듯 앳된 여자가 웃었다
그림이 완성될 때마다 내 시간도 한 겹씩 벗겨졌지만
핏자국 선명해지도록 나를 벗겨냈다
마침내, 숲 한 채가 송두리째 뽑혀왔을 때
그믐달처럼 휘어진 그를 배에 실어 보냈다
바다의 램프를 끄고 그의 상자에 못질을 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로 나였다는 걸
일생동안, 발가벗겨진 채로 울고 있었다는 것을
연필/ 김기택
떨어진 연필이 굴러간다
뱀처럼 벌레처럼
제 기럭지를 구부렸다 펴면서 가지는 못하고
옆으로 굴러서만 간다
굴러가는 둥근 면에서
수많은 짧은 다리들이 나오고 있다
연필 속에서 광물성 내장 터지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여과시켜서
나무는 가볍고 맑은 소리를 낸다
뾰족했던 연필심도 덩달아 뭉툭해진다
도망가는 연필을 잡자마자
다리는 연필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손가락이 연필을 꽉 쥘 때
흰 종이 밑으로 지층이 깊어질 때
짧고 힘찬 진동이 연필 속에서 버둥거린다
연필 지나간 자리에
걷다가 머뭇거리다 멈추다
종이가 패이도록 달린 발자국이 남는다
길 위의 연필/ 이용헌(1959~ )
목발 짚은 사내가 눈길을 내려간다
휘우뚱휘우뚱 제 그림자를 끌면서
스쳐간 자리마다 두 개의 다른 발자국
하나의 발자국을 따라간 또 하나의 점과 점들
가파른 눈길 위에 눌러쓴 저 무수한 말줄임표가
한 생의 반쪽을 의탁한 사내의 일기임을
아니, 세속의 경전을 집어던진 묵언수행임을
선림사禪林寺 오르는 길에 나는 보네
눈이 눈 위로 지는 산모퉁이를 돌아
꽃이 꽃 위로 지는 동백숲이 나올 때까지
사내는 여전히 발자국에 발자국을 더할 것이다
그의 왼쪽 겨드랑이에 낀 커다란 연필이
숲그늘 종이 위에 점묘화를 그리는 동안
동백은 또 얼마나 붉은 물감을 풀고 있을 것인가
연필 / 홍일표
묻는다
오래 숨죽여 가늘게 이어지는 검은 울음이냐고
화석처럼 단단한 눈물이 반짝이는 밤의 골목이냐고
연필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고독사라는 말이 까맣게 타고 있다
무연고 묘지 같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흰 종이 위에
혼령처럼 연필 향내가 남았다
일생이 한 가지 색으로 이어진다
푸른색도 붉은색도 아닌
아니 모든 색을 다 삼켜버린
목관 속에 웅크리고 있던 그가 또박또박 걸어나온다
컥컥 목이 막혀 할 말을 잃는
툭툭 부러져 동서남북 갈 길을 놓치기도 하는
울음 끝이 날카로운
심야를 걷는 연필심
고개 들어 창밖 먼 곳을 본다
혼자 걸어가는
밤비가 멈추지 않는다
연필 /이소연
정수리부터 갈아 넣지 않으면
어떤 말은 영원한 비밀이 되곤 했다
말 할수록 죽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도 받아적지 않아서 일까?
작은 평수의 임대주택을 생각하면
혼자 울고 있는 부엌과 화장실 문을 마주보는 식탁과
여자를 닮은 연필이 있다
굴러다닐수록 함부로 쓰였다
누구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지하에서 꺼내온 말은 자주 지워졌다
정수리를 찧으며 수명을 읽는다
오래도록
머리가 벗겨지고
뇌가 갈리고
입이 사라진다
하지만 사랑하리라
기필코 사랑하리라
오래전
편지의 쓰고 지운 자국을 읽으려 애쓴 적이 있다
뾰족해지고 싶다는 건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것
생각이 몽땅해진다
비밀이 더러워졌다
연필로 긋는 밑줄 /심재휘
몸이 아파 흰죽을 끓인다 창밖에는
밑줄을 긋듯 비행기가 멀리 간다
밑줄을 지우듯 적당하게
제 비행운을 거두며 가는 높은 삶
습관인 듯 밑줄을 많이 그었다
뜬 눈 속에 세 들어 사는 것들 밑에
쏟을까봐 귀담아 듣는 말들 밑에
수많은 밤들 밑에 밑줄을 그었다
지우면 지워질 줄 알았다
흠집 가득한 집에 살게 되었다
쳐다보니 하늘은 이제 아무 흔적 없이 맑다
끓는 쌀죽이 눌어붙지 말라고
주걱으로 이리저리 바닥을 긋는다
묽은 죽은 이내 퍼져서 묽은 죽이고
밑줄 없이도 참 좋은 한 끼
연필 한 자루 / 허수경
그렸다
꿈꾸던 돌의 얼굴을 그렸다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서 있던 백양목
부서진 벽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깨
붉게 울면서 태양과 결별하던 자두를 그렸다
칼에 목을 내밀며 검은 중심을 숲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멸종해가던 거대 짐승의 목
먹다 남은 생선 머리 뼈 꼬리 마침내 차가운 눈
열대림이 눈을 감으며 아무도 모르는 부족의 노래를 듣는 거
태양이 들판에 정주하던 안개를 밀어내던 거
천천히 몸을 낮추며 쓰러지는 너를 바라보던 오래된 노래
눈물 머금은 플라스틱 봉지도 그 봉지의 아들들이
화염병의 신음으로 만든 반지를 끼는 거
어둠에 매장 당하는 나무를 보는 거
사랑을 배반하던 순간, 섬득섬득 위장으로 들어가던 찬물
늦여름의 만남, 그 상처의 얼굴을 닮아가면서 익는 오렌지를
그렸다
마침내 필통도 그도 매장할 때쯤
이 세계 전체가 관이 되는 연필이었다, 우리는
점점 짧아지면서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했으나
영영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단독자, 연필 한 자루였다
헤어질 사람들이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물속에서
영원한 목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루였다
당신이여, 그것뿐이었다
2008 진주가을문예 당선작
아버지의 연필 / 전영관
풍구의 회오리가 가슴께를 후려친다
갈탄의 낭자한 선혈 사이로
피 맛을 본 강철이 달아오른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강철연필은 학력편차가 크다
몇 자의 비문만 학습한 경우가 있고
공덕문을 줄줄이 암기하는 실력파도 있다
까막눈 돌쟁이는 단지 내장된 글자들을
강철연필로 파내는 것뿐이다
거북이나 두꺼비를 만나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환절기에는 떠나는 사람들 많다
해마다 반복되는 덕분에 그의 한문 실력도
지명이나 이름자에 두각을 나타냈다
담금질로 단단해지는 것은 강철뿐
돌쟁이의 가슴은 반비례로 물렁해졌다
구부리는 법을 터득한 까닭에 굽실거렸어도
칠십 평생 부러지지 않았다 그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덕분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 적 있다
아버지는 물푸레나무들과 뒷산으로 올라가
겨우내 돌아오지 않았다
강철연필들은 처음으로 주인의 이름을 새겼고
얼어붙은 산 밑 저수지에서 떵떵
망치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찬물에 손이라도 씻는지 지난 봄에는 물푸레
푸른 물이 내려오기도 했다 오늘도
녹슨 강철연필들만 벌겋게 복습 중이다
旌 旋 全 公 重 鉉 之 墓
연필로 쓰기 / 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 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 번 쓰고 나면 그 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워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둘러앉은 식탁에서 우리는 비어버린 가족과 허기진 소통을 나누어 먹지
그러면 나는 부러진 연필을 깎고 쓰다만 일기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어 최대한 둥글게 색을 칠하고 완성된 일기를 북북 찢었지 기겁하는 엄마가 소리를 지른다
―엄마 우리는 콩가루야 삼류도 못 돼 바람 부는 날 콩처럼 굴러가버릴 거야 저 밑으로 더 밑으로 새파랗게 어린 년이 말 많다 하지 마 공부는 연필이 알아서 하거든 지금 내가 그린 우리 가족처럼 말이야
연필 밑으로 스케치로 된 풍경이 어그러지고 나는 연필을 깎고 닳은 연필을 보다가 문구점으로 향하지
오늘은 어떤 순간을 그려볼까 고민하며 연필을 슬쩍하는데 눈이 마주쳤어 그래서 말인데 문구점에서 전화가 와도 그 아줌마를 믿지 않았으면 해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2017. 문학동네
연필의 간 / 김경주
연필 속에서 간이 흘러나온다
간 속의 노란 돌가루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란 돌가루
연필 속에서 탄광이 쏟아져나온다 탄광을 파내어 간을 찾는 자, 시를 쓴다
해골이 어조를 남기고 거울 속에서 웃는다
연필은 잡념의 생식기
푸른 먼지 하나 허리를 흔들며 사라져가고
헐리고 있는 촛불
그 안에 번식 중인 빨간 간들
문어처럼 미궁을 많이 알지도 못해서
연필은 대가리를 디밀며 해저를 뒤집고 다닌다
연필을 두 쪽으로 쫙 갈라내어
간을 본다
이끼가 자라고 있는 해, 보도블록에 떨어진 귀들, 입속으로 퇴근하는 머리칼, 어항 속으로 들어가 웃는 쥐, 구름과 구름 사이 희미한 돌가루들, 아픈 배, 죽어서 일어나 강낭콩을 먹는 비둘기, 저녁을 빗방울 속으로 밀어올리는 맥박들, 구슬, 구슬 속을 흘러다니는 허공
그건 간의 색인데
그믐을 그리는 건 간의 색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간의 색을 전부 지우는 일이었다구
더 천해져야 한다. 이것저것 간을 보면서
몽당연필 / 최영애
침묵만이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했습니다
그대앞에 나서기까지
살비듬 돋는
그 숱한 이야기를
살을 깎고 검은 뼈를 도려내며
바닥까지 고백하고 나면
그대와 깊이 내통하여
영원할 수 있으리라 했는데
정작
내 생에서
마지막 한 마디는
속 깊이 묻어두었어야 했는데
가끔은 연필을 깎고 싶을 때가 있다 / 황정희
연필을 깎는다
사각이며 깎여 나가는 소리가
한 사람이 멀리서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 같다
저문 안부가
보낼 때마다 하루를 긁적이게 하는 노을의 붉은 빛처럼 수북해져
연필이 깎여 나갈수록
내 생활의 변명처럼 흩어진 나를 그러모아
쓴다
백지 위에
수많은 말풍선들
두더지게임 하듯 여기저기 불쑥불쑥 튀어 오르다 사라지는 말들
꽃피고 계절 지는 동안
사람피고 인연 지는 동안
언제부턴가
허리를 굽힌 시간을 바로 눕히고
절름발이 그리움도 그리움이라고 칼끝에 닿는 연필심에
맥박이 뛴다
안부는 묻는 것이 아니라
먼저 들려주는 거라고
쓴다
*2023년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볼펜 / 김정식
혀가 부드러운 너는 뛰어난 화술과 화법을 가졌다
백지 위에 입술을 문대며 깨알같이 쏟아내던 유정한
달변이었으니, 능란하고 유연함을 말한다면
감히 누가 너를 넘을 수 있겠느냐
굴러 내린 말이 씨알이 되고 땅 위에 꽃이 피고
단단한 열매를 맺게도 하니
너를 불러 가까이 벗하지 않은 이 있을까
어떤 호명에도 기꺼이 응하는 물방울의 발 빠른 성품을
가볍다 하여 가끔 투정하는 이도 있으나
코흘리개 학동에서 백발성성한 노숙에까지 골고루
너는 언제나 길든 하인이고 즐거운 길손이고
따뜻한 눈물자국이었다
한번 이마를 짚어 주면 한 번 명쾌하게 대답하고
아낌없이 속마음을 전해주는 너의 진실이 있기에
백지 위의 나날은 충만했다
꼿꼿한 내면을 고통의 검은 색깔로 가득 메운 유용한
말들이 낮은 눈금으로 바뀌며 하얗게
비워질 때까지 달게 속삭여주는,
너의 궤적이 쌓인 서랍장 공책의 이력을 들춰보니
얼마나 많은 나날들이 오묘하고 깊은
형이상적 기쁨으로 채워지고 있는지를 알겠다
너의 한생이 끝나고 손때 묻은 몸이 떠난 후에도,
묘비명 하나 윗주머니 쪽의 가슴에 꽂아두고
오래 추억하고 싶으니
https://naver.me/xEAeywAo
<연필에 관한 시 모음> 이해인의 '몽당연필' 외
+ 몽당연필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욕심 없으면
바보 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 왔구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몽당연필의 꿈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이 되어도 좋다
침 발라 쓰다가 쓰다가 쓸 수 없을 때 버려도 좋을
한 자루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이 시커먼 흑연빛이 아니라
5월의 푸른 하늘같이만 될 수 있다면
그 푸른 하늘을 날으는 종달새같이만 될 수 있다면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김경윤·시인, 1957-)
+ 하느님의 연필
하느님의 연필,
그것이 바로 나이다.
하느님은
작은 몽당연필로 좋아하는 것을 그리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그것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신다.
(마더 테레사·수녀, 1910-1997)
+ 연필
연필은 언제나
뼈로 글씨를 쓴다
볼펜처럼
머리로 잉크똥 흘리며
미끄럽게 술술 쓸 수 없어
뼈로 글씨를 쓴다
닳으면 닳는 대로
부러지면 부러지는 대로
다시 뼈끝이 뾰족해질 때까지
정신이 뾰족해질 때까지
칼날에 사정없이 깎이는
아픔을 견디면서 언제나
뼈로 글씨를 쓴다
그것이 마치
자기의 할 일인 양
보람인 양
(권오삼·시인, 1943-)
+ 연필의 유서
쓸수록 닳아지는
나의 생애는 수많은 문장으로 태어났다
날이 갈수록 짧아지는
나의 생도
곧, 너의 삶으로 이어져
같이 줄어들 것이다.
지우개로 문질러보는
병상의 치유는 부질없는 짓이다
아린 상처를 지우고
또, 썼던 것으로
장문의 쉼표처럼
마침표를 찍으려한다.
쓰지 못한 이야기는
가슴에 품고 이어갈 일이다
생로병사보다
기쁘고 슬픈 일이 또 있으랴
유형에서 무형으로
아름다운 묶음 뒤
읽혀지길 원할 뿐이다.
(최남균·시인, 1967-)
+ 연필
혼신으로 써야 할 사연이
그리도 많은가
한 줌 재로 돌아온 아들의
외짝 신발 부여안고 까무러치던
여인의 한을 쏟아내며
수명을 재촉한다
글을 쓰면 쓸수록 짧아지는 목숨
흰 쥐와 검은 쥐가
시간의 두레박 끈을 갉아먹는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심
닳아 없어질 때까지
끝없는 이야기를 온몸으로 쓴다.
(지창영·시인이며 번역가, 1965-)
+ 연필 -메신저messenger
까만 심을 둘러싼
향나무 살갗을
벗겨낼 때마다 나는
진한 내음이
코끝을 쏩니다.
제멋대로
닳아버린 연필로
흐트러진 맘을
아무리 고치고
또 고쳐도
못 다한 이야기는
여기
여백餘白으로 비워둡니다.
(李千 윤석환)
+ 연필과 지우개
쓰고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쓰고
다시 지우고
연필도 지우개도
닳아 점점 작아지네
그러다 언젠가는 둘 다
누군가에게서 끝내 버림을
받겠네! 애꿎게도 그들의 흔적만
종이에 남겠네! 노인 얼굴의 주름살처럼
(안재동·시인, 1958-)
+ 연필
시작과 끝이 문 밖에서
어서 열라고 두드리고 있다
향을 두른 목의(木衣) 속에선
검은 씨앗이 길게 키를 늘이고는
껍질을 벗고
환한 세상과 입맞춤하기 위해
잔뜩 기대에 찬 모습으로 누워 있는데
어째서 아무런 소식이 없는지 ‥‥
항상 대기하고 있는 둥근 칼을 문 깎이는
배가 고픈지 문고리를 잡고
입맛을 다시는데 힘은 없다
수 번을 물고 물리더라도 조금의 아픔도
깎아 버리고
차츰 키가 줄어들어 손아귀에서 모습을 감추는
그날까지
아예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
(전병철·교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