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부는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기획에있어서 적과의 전쟁에 되도록 적은 물자와 병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야만 중국대륙의 완전점령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런 상황은 일본 육군성으로 하여금 특수무기에 의항 중국내 저항세력의 무력화를 기획케 하였고 그
기획의 산물이 바로 세균전에 의한 신속타격이었다. 이런 비열한 계획안의 적임자로 선발된 인물이 바로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였던 것이다.
이시이는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생물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총장의 딸과 결혼하고, 군 장학금으로 유
럽의 생물학연구소에서 연구했다.
그는 또한 누구도 증명하지 못했던 뇌막염 발발이 동시 다발적이지 않을 때 사용되는 효과적인 수
막(water filter)을 개발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일본이 1931년 중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만주를 얻었을 때, 이시이(石井四郞)는 군의과대학 박테리아학 연구소장 자리에 올라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다.
그리고 지속되는 중국과의 전쟁은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인간을 실험대상으로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른바 중국 계획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작전 기지로 하얼빈이 결정되었다. 1928 년 이미 핑판에 다양한 시설을 건립해 놓은 상태였다.그리고
나서 이시이는 1932 년 8월 실로 막대한 예산으로 <광동군의 전염병 및 수질정화국>을 세웠다.
이 부대는 1941년 까지는 731부대라고 불려지지도 않았고, 그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았다.
연구범위를 확대하고 세균연구 속도를 가속화 하기위해 광적으로 이성을 잃은 石井四郞은 산사람으로
세균실험을 하기로 결정하고 동북을 제일 이상적인 실험장소로 정하였다.
일본군이 할빈을 점령한 이등해에 일본 참모본부는 도쿄의 세균연구기지를 할빈으로 비밀리에 이전
하기로 결정하고 남강구 선화가와 문묘가 일대에 "石井부대" 라고 이름지은 세균부대 본부를 설치
하였다. 할빈에서 70Km 떨어진 배음하에다 세균 시험공장 건설이 부대의 안전과 비밀을 절대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대외로 이부대를 "관동군 방역급수부" 또는 "가무부대" "석정부대"라고 속칭하였다.
1935년에 이 실험장내에서 탈옥사건이 발생되면서 石井四郞은 경황실색한 나머지 "화약고" 폭발구실로
실험장을 할빈 남쪽 20Km 거리의 평방지구로 비밀리에 이전. 이로부터 평방지구는 말그대로 "인간도축장"으로 전락되었다.
1935년에 石井四郞은 평방역 북쪽 4Km 지역을 최적지로 지정하고 6㎢ 지역의 민간인들을 강제로
내쫒아 수천명의 유량민을 조성하며 사람들을 파산과 죽음으로 몰았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과
괴뢰당국은 동북 각지에서 수만명 노무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밤에 낮을 이어 세균시험공장을 건설케
하였는데 수없이 많은 노무자들이 기아와 피로를 못이겨 생명을 잃었고, 공정이 거의 끝날 무렵
비밀공정에 참여한 노무자는 모두 비밀리에 살해 되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731부대는 120㎢의 평방지구를 특별 군사구역으로 정하였다. 이를위해 관동군 사령부가 1938년에 공포한 평방지구에 특별군사구역 설립 제1539호 특별군사구역의 경비가 매우 삼엄하여
평방을 경과하는 기차는 평방역을 경과시 필히 전역에서부터 커튼을 내려야 했으며 승객중 밖을 내다보는자가 있을시 현행범으로 취급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평방 특별군사구역내에서 파쇼통치를 실행하면서 "특별군사구역"내에 사는 거주자는 16세이상일 경우 남녀를 막론하고 경찰서에서 발급하는 특별거주증명서를 소지해야 했다. 그렇지 아니하면 "특협"으로 헌병대로 압송되어 신문 받았다.
대규모의 세균작전과 대쏘련작전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1941년 관동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전부대를
"만주659"로 개칭하고 부대본부를 731부대로 칭했다. 부대산하에 해림, 임구, 해납, 손오 4개지대외
대련위생연구소를 설정하였다.
장기적인 침략전쟁의 수요에 부응키위해 일본군은 일본군내의 14~15세 소년학생들을 조직하여 소년대를 설립. 중국에서 훈련하여 미래전쟁 수요에 준비케 하였다. 1939년부터 선후하여 400여명 소년대원이 731부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2.생체실험
731부대는 내키는대로 각종 세균실험을 진행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서역, 상한, 병, 탄등 몇십종 실험을
주로하였다. 731부대는 세균실험 뿐만 아니라 독깨스 시험도 진행하였는데 중국침략 일본군 제516 독가스부대는 대원들을 731부대로 직접파견하여 독깨스 생산시설을 설치케 하였다. 731부대는 세균실험시 늘 대비방법으로 시험진행하였다. 주 방법으로는 주사시험, 주사기로 세균을 근육에 주입 후 병변반응을 관찰
했다. 또다른 방법은 매입법 시험으로 피실험대상의 피부를 벗겨낸 후 세균을 근육속에 묻는 것이었다.
또한 강제적인 관균시험으로 731부대는 초기에는 각종세균을 밥과 요리에 혹은 과일과 음료수에
섞은후 실험자들을 속여 먹게 하였는데 그 수단을 사람들이 알아차리자 사람들을 묶어 놓고 강제로 투약시켰다. 전 731부대 ㅇㅇㅇㅇ의 진술에 따르면 1944년 8월부터 1945년 5월의 9개월동안 그가 직접
강제복용시킴시킨 사람은 190여명이며 모두 사망했다고 함.
731부대의 핵심 비밀중의 하나가 바로 비인간적인 생체(산사람) 세균실험인데 그중에서도 제일 잔인한 것은 생체해부였다.생체해부의 주목적은 세균실험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한것었다. 피 실험자는 각종실험을
거친후 거의다 생체해부를 받게 되는데 어떤자는 마취상태에서 소각로에 보내졌고, 해부하여 절단해낸 것은 병리연구 후 표본진열실로 보내졌다.
동상실험 역시 731부대의 인체실험 중 제일 잔혹한 일종이다. 동상연구 목적은 관동군이 중국동북 추운지방에서의 작전의 수요이며 또한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해서 이다.
자료에 따르면 731부대 동상연구원들은 피실험대상을 혹독한 겨울에 알몸 혹은 얇은옷 한겹만 입은채로 밖에서 냉동시켰고 여름이면 사람을 냉동실에 넣어 실험하였다. 일정하게 냉동되였을 때 사람을다른곳으로 들어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동시켰는데 때로는 냉수를 붓고 때로는 온수에 담그며 때로는 끓는 물에 녹였다. 피실험자들은 극도의 고통속에 그 자리에서 죽든지 혹은 살과 피부가 부패되고 흰뼈가 보일
때까지 절규하다가 서서히 죽어 갔다. 병리적 실험수요를 위해 그들은 피실험대상의 동상부위에 각종 약품을 발라 병변과정을 관찰하였다. 수없이 많은 실험대상자들이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실험속에서 사망했던 것이다. 수많은 실험을 통하여 731부대는 섭씨 37도의 온수에 담그었을 때 동상치료 효과가 제일 좋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모든 피실험대상들을 731부대에서 모두 "마루타" (일본어 "나무몽둥이"란 뜻)라고 불렀고 이 마루타들은
실험재료로서 실험목적에 따라 내키는 대로 살해되었다.
피실험대상자들은 모두 특별수송수단으로 731부대의 특별감옥으로 합송되었다. 이감옥의 관리가 특별히 중요하므로 石井四郞은 그의 셋째형인 石井 男을 특별반 반장으로 파견하였다. 소위"특별수송" 이란
"마루타" 와 같은 뜻으로서 731부대의 전문용어이며 "특별수송"의 뜻인 즉 731부대로 "마루타"를 운송한다는 것이었다.
마루타"의 절대다수는 일본관동군 할빈헌병대. 일본 할빈주재 영사관 혹은 관동군 정보부로부터 끊임없이
731부대로 운송되었다. 부대로 "마루타"를 압송할 때 때로는 기차로 때로는 731부대가 자체개발조립한
특별자동차를 이용했고 사람들이 눈치차릴까봐 늘 "마루타"에게 일본군복을 입혔으며, 731부대 도착후 즉시 특별 감옥인 7호, 8호 두 건물로 압송하였다.
3.세균무기의 개발
14세기에 유럽전역에서 페스트가 대량으로 유행되면서 2,500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페스트란 말만 들어도 섬뜩해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인간성과 이성을 잃은 일본군국주의자 생물학자인
石井四郞와 일부 세균학 영역의 인간쓰레기들은 오히려 페스트균을 이용하여 중국 항일군과 기타 저항세력들을 일소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페스트균을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石井四郞은 쥐를 대량으로 잡고 양식하게 하는 한편 동물사육반을 설치하였다. 이에 필수적인 대규모 황서사육실과 쥐사육실을 건설 하기도 하였다. 삽시간에 731부대의 지상과 지하는 수천수만 마리의 쥐들이 우굴거려 731부대는 말그대로 쥐부대였다. 동물사육반이 중요하였으므로 石井四郞은 그의 셋재형인 石井三男을 반장으로 임명하여 쥐를 위주로한 각종 동물사육을 책임지게 하였다.
731부대는 대규모 세균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페스트균에 대한 연구외에도 상한, 콜레라, 탄저, 홍역등 수십종의 전염병균도 연구하였는데 그생산 능력과 수량이 많기도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이다. 가령 모든설비를 모두 가동하면 페스트균을 매달 300Kg, 혹은 콜레라균 700Kg을 생산할 수 있었다.
전731부대 대원의 말에 따르면 1941년 5월 제4부 제1과 대위의 명령 으로 제4부의 위해 탄저균. 페스트균을 수백kg 제조 하였고 1942년 7~9월에 돌연적으로 상한 콜레라균을 약 70Kg을 제조하여 항공편으로 남경1644부대로 보내 중국군민을 살해하는데 사용했다. 전 731대원의 증언에 따라 18명이 150개 석유통에 벼룩을 번식시켜 배양한 900cc벼룩과 200마리 쥐를 동시에 상덕지구로 보내 중국군민을 살해 하였다고도 했다. 또한 전731부대 노무자의 증언에 의하면 731부대가 상한균 전파하는 매개물인 이를 얻기위해 년장자를 보살펴 드린다는 명분으로 나이 많은 노무자를 음침한 방에 가두고 겨울이든 여름이든 옷을 갈아 입지 못하게 하고 목욕을 못하게 하면서 그들의 몸에서 이가 번식되게 하였다. 그리고 흰옷을 입은 일본인이 매일와서 이를 일정수량씩 거두러 갔다고 한다.
세균무기를 실전에 사용하기 위해 石井四郞은 직접 石井식 도(陶:항아리)세균폭탄을 설계하였다. 이런 폭탄은 폭발력이 작아 세균의 생존율이 높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후 石井四郞은 유리제 세균폭탄을 연구제작 하였는데 실전에 으용되지는 못했다.
731부대는 세균전쟁을 계획하면서 각종 세균무기 제조와 저장에 세밀한 연구와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한편 간첩, 암살행동을 전문으로 하는 자들을 위해 세균용기를 특별히 제작하였고 한편으로 권총식, 지팽이식, 만년필식, 완구식 소형무기도 제작하였다.
궁극적으로 세균무기를 사용하기 위해 731부대는 실험실내에서 세균무기를 실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도 종종 실험하였다. 그들은 동북의 동녕, 경동, 도돈소, 아성, 안달 및 그 부근 3Km 떨어진 성라구등 여러곳에 많은 야외 실험장을 만들어 늘 생체피폭실험을 하였다. 야외실험의 능률을 위해 731부대는 항공반을 설치하였는데 비행기고와 공항이 있었으며 각종 비행기 12대가 있었다. 항공반의 반장은 石井四郞의 사위인 ㅇㅇㅇㅇ소좌가 임명되었다.
1939년 8월. 731부대는 중좌를 대장으로한 "용감대"를 결성해서 일본과 소련의 교전지인 노문한으로
비밀리에 접근하였다. 전쟁중 그들은 대량 세균폭탄을 발사하였고 전쟁에서 패하여 철수할 때 용감대는 하라하강의 상류에 상한등 세균을 살포하여 수원을 오염시켰다. 그결과 많은 소련과 몽골 군인들이
중독되었고 가축들이 대량 죽어 민간인도 막대한 손실을 보게되었다. 1940년 10월 27일. 731부대와 남경 1644 세균전부대가 협력하여 닝뽀지구에 페스트균을 대량 살포하여 적어도 106명이 페스트에 감염되어 사망하였다. 731부대는 한편으로는 세균을 살포하고 한편으로 방역명의로 병역지역으로 들어가 중국인을 가해하였다. 1942년 8월 원정대원들은 머리에 방호마스크를 쓰고 몸에 방역복장을 차린채 절강 이오현 승산촌에 들어가 그마을에 사는 이취봉의 병균에 감염된 며느리를 마을밖으로 강제로 끌고가서 그 자리에서 복부를 해부하고 내장을 꺼내 세균전염효과를 검사하였다.
731부대는 전쟁에서 처음으로 세균무기를 사용하면서 준비부족과 경험부족으로 자체 1개사단의 병력이
세균감염당한 사례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石井四郞은 세균무기 사용에 공이 있어 표창를 받았다.
4.패전직후의 과정
1945년 봄과 여름. 중국국공합작항일군민과 연합군의 타격하에 일본군은 연속패배하기 시작. 731부대도 철수준비를 서둘렀다. 石井四郞은 일면으로는 남아서 지킬 인원을 선발(다시 돌아 올 것을 대비)하고 한편으로는 죄행을 없애기위해 시설을 폭발시키고 조증을 소각시켰으며 감옥에 감금중인 최후 400여명의
설험대기자들을 독가스로 살해한 뒤 시체를 사전에 파놓은 8개 구덩이에 끌어다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버렸다. 불에 탄 시체를 당장 묻어버리기도 하고 포대(마대)에 담아 송화강 물속에 던지기도 하였다.
石井은 죄행을 증명 할 수 있는 서류들을 모조리 소각하고 산 사람으로 실험하여 얻은 극비자료는 몸에 지닌채 사위가 운전한 비행기를 타고 조선을 경유해 일본으로 도망 했다. 731부대는 도망하면서 고의적으로 페스트균이나 콜레라균을 지닌 쥐등의 동물들을 방치하거나 풀어놓아 1946년 평방지구에 페스트를
유행케 하여 103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731부대는 패배하여 도망가는 와중에도 세균을 살포하였는데 통료지구에도 이로인해 페스트가 유행기도 했다. 일본패망 후에도 石井四郞은 미국군의 두둔하에 모든 연구자료를 미군에 제공하여 보호를 받았다. 그로 인해 5년 후 한반도전쟁에서 일시적으로 세균무기가 사용이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 되기도 했다.
5.보호되는 만행
50년이 지난 지금도 731 부대의 희생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만행을 인정하는 사죄를 고대하고 있다.
뉘른베르크에서 독일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아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대부분의 일본 전범들은 불기소 처분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독일의 전쟁비밀을 보전하려는 의도로 페이퍼 클립 작전을 펼쳤듯이,
미국은 점점 확대되어가는 냉전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731부대의 기밀자료를 군의관들과 거래했던 것이다.
1942년 일본이 창데에 투하한 세균폭탄에 대해 미국은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 때의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였다. 몇 주 후 미국은 생물학전 연구
소 건립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이를 허가한 대통령도 루스벨트였다. 다소 의아스러운 것은, 그 후 미국
정부는 일본의 세균폭탄에 대해 더 이상 비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수십 명의 독일 전범은 사형당하거나 투옥되었지만, 1960년 이후 투옥되거나 사형이 실행된 일본인 과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 미국과의 협정 아래 미국의 전범수사 기록은 전혀 출간되지 않았던 것이다. 731부대의 대다수 박사들처럼 이시이도 생물학자로서의 명예를 계속 유지했고, 도쿄대학 학장까지 역임했다.
흠... 731부대... 일본에서 유일한 '황립부대'(그네들 말로는 그렇다)인데... 그 활동에 대해서는 그네들 '천황'(역시 그네들 말로는 그렇다)이 몰랐다는(마찬가지로 그네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아주 '신비스러운 부대'다... ㅡㅡa 그런데 이걸 믿는 골통이 일본에는 아주 많다고 한다.
들녘님이나 seivim님이나 일본인은 모두 섬에살아서 잔혹,잔인하다는 고정관념이있는것같습니다 일본이나한국이나 도덕관념은비슷합니다 서로 좋은걸추구하지요 저는 어느나라나 이런호로새끼처럼 병신돌연변이는 있다고생각합니다 이런 일의 책임을 물을때는 나라가아닌 개인을 지목해야합니다 그리고 똑같이자행할수도있
첫댓글 만약 그 시대에 한국이 다른 나라를 점령했다면 똑같이 자행했을 수도 있습니다. 과오는 과오일 뿐이죠. 그걸 현대까지 가져와서 악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문제는 지금 일본 하는 꼴은 충분히 열 받는겁니다. 국K-1들은 덤
똑같이 자행했을수도 있다니요. 적어도 우리나라는 섬나라와 엄연히 다른 인식이 내려져 오고 있습니다만
똑같이 자행하진 않았을껍니다. 우산국 정벌이나 대마도 정벌을 볼때 대충 확장시켜봐도 똑같은 자행의 시나리오는 그려지지 않을껍니다.
흠... 731부대... 일본에서 유일한 '황립부대'(그네들 말로는 그렇다)인데... 그 활동에 대해서는 그네들 '천황'(역시 그네들 말로는 그렇다)이 몰랐다는(마찬가지로 그네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아주 '신비스러운 부대'다... ㅡㅡa 그런데 이걸 믿는 골통이 일본에는 아주 많다고 한다.
참고로 '황립부대'의 활동 내용은 육군 대장(맞나?) 도조를 거치지 않고 바로 '천황'에게 전달한다. ㅡㅡ;; 그런데 그 ㅅㅂㄴㅁㅆㅅㄲ가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들녘님이나 seivim님이나 일본인은 모두 섬에살아서 잔혹,잔인하다는 고정관념이있는것같습니다 일본이나한국이나 도덕관념은비슷합니다 서로 좋은걸추구하지요 저는 어느나라나 이런호로새끼처럼 병신돌연변이는 있다고생각합니다 이런 일의 책임을 물을때는 나라가아닌 개인을 지목해야합니다 그리고 똑같이자행할수도있
잖아요 절대그럴수없다는건 말이안됩니다 일본보다는 가능성이 낮다고쳐도 우리나라도 이런 과오를 저지를 가능성이 없다는건 맞지않은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