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하루에 14시간씩 공부하고 자기 계발에 힘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그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자네는 무엇을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자기 계발을 하다 보면 뭐든 될 수 있겠죠.”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짓도 없다.’
어떤 목표 없이 그냥 무작정 공부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공부하는 내용과 자기 계발의 방향이 제대로 설 수 있게 됩니다. 막연하게 아무거나 공부한다는 것만큼 무식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열심히 중국어 공부를 했는데 일본어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떨까요? ‘일본어 필수’인데, 이제까지 공부한 것이 아깝다면서 계속 중국어만 공부하겠습니까?
분명한 목표를 세워야 편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준비는 스스로 더 힘들게 할 뿐입니다. 이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분명한 목표 없이 사는 우리는 아닐까요? 잘못된 목표를 세워서 주님과의 관계가 더 힘든 것은 아닐까요?
구원은 편하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고난의 시대가 오고 그 시대를 겪어낸 다음 구원이 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을 물었을 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고통을 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내가 너에게 고통을 줄 거야.”라고 말하면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게 뭐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구원의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악을 철저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면서 악과 함께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 과정 안에서 평화가 아닌 분열이 가져올 수밖에 없고, 어렵고 힘든 고난의 시간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분명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대충대충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라(프리드리히 니체).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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