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저 너머에 호수가 있어."
호수라는 선명한 글씨가 새겨진 아파트를 가르키며 사촌에게 얘기했다. 사촌은 약간의 감탄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산에 처음은 아니었다. 쇼핑을 위해 E-Mart에 들려 소주와 맥주를 한박스씩 사고 내심 흐뭇한 기분에 공원을 산책한 적이 있었다. 라이브문의 설명으로 나중에 알게된 거지만 호수공원의 위치는 정반대였다.
사촌과 나는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나서 마두역 지하로 발걸음을 향했다. 약속장소는 라이브문의 설명대로 쉽게 눈에 띄는 곳이었지만 빛나와 라이브문으로 의심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를 테이블 위에 잘 보이도록 올려놓고 그녀들이 금방 알아볼수 있도록 고개를 돌리며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우리는 첫미팅을 하기위해 나온 덜떨어진 고등학생같은 모습이었다.
화장실에서 돌아와 새롭게 알게 된 일은 헤어스타일이 엉망이었고 휴대폰 안테나가 거의 전멸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옆에 서서 라이브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2분 후면 도착할 거라는 짧막한 통화였다.
"형. 저기 와."
사촌이 나에게 말을 하였을 때, 이미 라이브문을 발견한 상태였다. 그녀는 예상대로 깔끔한 인상에 주름없이 잘다려진 하얀 셔츠를 코트(사람들은 그걸 코트라고 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하지만 흰머리는 모른다.)안에 입고 있었다. 그녀는 생달에 어울리는 눈부신 모습이었다. (라이브문님 나중에 술사주겠죠?)
나는 우중충한 옷에 걸맞는 어색한 미소로 그녀에게 인사했지만 정말 반가웠다. (왠지 주제가 '배수아'에서 라이브문으로 바뀐 듯...^^;)
"내 흥분한 빛나님이 아직 안 오셨어요."
"어머 어쩌죠. 휴대폰 번호를 모르는데."
"연락은 왔었나요?"
"없었어요. 번호를 알아두는 건데."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도록 하죠."
하지만 빛나는 약속시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우리는 칼쵸네로 향했다. 카페에는 두 테이블 정도의 손님이 있었고 한산했다. '배수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적당한 자리를 고르고 일행이 더 올 거라는 얘기를 하고 주문을 미루었다. 서로에게 인사를 하고 간단히 얘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은 2시에서 10분 남짓 흘러갔다. 어쩌면 '배수아'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요. 너무 멋지죠. 정말 그녀답지 않나요."
나는 거의 단정적으로 얘기했지만 라이브문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럴분이 아니예요. 굉장히 예의가 바른 사람이란 얘길 들었어요. 꼭 나오실 거예요."
하지만 라이브문의 얘기와는 달리 '배수아'는 시계가 30분을 가르켜도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빛나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약간은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까지는 팽팽한 긴장감같은 게 있었는데 (물론 절망적인 기분도 같이...문닫힌 세탁소...) 조금은 늘어진 분위기가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가 놓인 테이블 위로 흘러갔다.
30분에서 40분으로 분침이 이동하고 있을 무렵, 영원히 침묵할 것 같았던 라이브문의 핸드폰이 경쾌한 음악소리로 노래했다.
아~~ 전화 인터뷰가 길어지는 바람에 늦어지게 되었다구요. 저희는 괜찮으니까. 천천히 나오세요. 금방 나오신다구요.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를 마치자 휴대폰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울렸다. 빛나로 부터의 연락이었다. 그녀는 PC방에서 라이브문의 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빛나는 근처에 있었고 라이브문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실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어쩌면 빛나는 행운의 여신을 가볍게 어깨에 얹고 다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라이브문과 빛나는 화사하게 나타났다. 우리는 소풍에 나온 어린아이처럼 신이나서 호들갑을 떨며 얘기를 나누었다. 아마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예? 지금 밖에 계신다구요. 카페를 둘러 보았는데 아무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구요. 이런 일이...정말 죄송해요. 지금 나갈께요.
그동안 카페는 한바탕 축제를 치룬 것처럼 요란해져 있어서 우리는 조용한 곳으로 옮기기로 하고 서둘러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아! 배수아를 만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