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53동 옆쪽에는 이사가는 사람들이 버리고 가는 가구와 전자제품들을 쌓아 두는 장소가 있다 주인이 버리고 갔으니 생명을 잃어 널부저려 있던 가구들은 쓰지 못할 만큼 부서진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낡고 구식인 물건들이 많은 편이다. 때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안성맞춤인 가구가 눈에 띄는 날에는 횡재한 기분이 들기도 해서 나는 지나다니면서 자주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고는 한다
더욱 종자골에 작은집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일부러라도 혹 헌가구가 나와있지 않은가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시골 오두막 집에 새가구는 어쩐지 시골 색시가 진한 화장을 한 듯 어색하고 부담스러울 것이고 가구라고 명칭할만한 큰 가구는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누군가 쓰다버려 손때가 묻어나는 구식 가구라면 눈에 뜨이지 않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제격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인연이 동그란 나무상이었다 두명 네명 아니 여섯명 아니 붙어 앉으면 여덟명까지 가능한 옛날 언니 오빠 일곱에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모두 옹기종기 모여앉아 밥을 먹던 동그란 상과 닮아 있었고 주인의 손때가 반지르르하게 묻어있는 긴 세월의 흔적에 단번에 애착이 느껴졌고 나무로 만들어졌으므로 혹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 되면 한 줄기 연기로 한 줌의 재로 돌려보낼 수도 있는 장점이 마음에 들었다 고가구에 관심이 있는 친구가 보고는 은근히 침을 흘리기도 했었던 둥근 밥상은 추운날 따뜻해진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따끈한 차라도 한잔 마시는 날에는 더없이 고마워지는 것이었다
두번째 인연은 씨름선수처럼 생긴 나무 탁자였다 주인이 목공 기술을 처음 배우면서 직접 만들었을 것 같이 투박함과 튼튼함을 함께 갖춰 대대로 물려주어도 손색이 없을 물건이었다 실용성을 중요시 여기는 독일 사람이 보았다면 당장에 사겠다고 나설지도 모를만큼 말이다 오는 사람마다 이렇게 튼튼한 탁자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칭송을 아끼지 않으니 원래 내 것인양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탁자가 넓으니 평상시에는 이것 저것 올려놓기도 하고 무거운 물건들을 내려놓기도 하다가 밥 먹는 시간이 되면 밥상이 되어주는 나무 탁자는 코끼리 다리같아 믿음이 가기도 한다 어느날 뜨거운 냄비를 받침도 없이 올려놓은 내 실수로 한쪽에 거무스름한 상처를 남기기는 했으나 그것도 지나간 우리의 흔적이며 추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세번째는 서랍이 여덟개 달린 서랍장이다 사람사는 집에는 크건 작건 필요한것은 다 있어야 하는 법이고 혹 작은집이라고 얏볼 수도 있으나 거기도 사람사는 구석인지라 필요할 때마다 물건을 가져가고 보니 이제는 만물상처럼 방안이 복잡하고 어지러워졌다 성냥부터 시작해서 이불까지 거기다가 농사용 농기구부터 작은못까지 그 수를 세어볼 수 있으려나? 이 많은 것들을 정리해서 넣을 수 있는 서랍이 많이 달린 가구가 필요했었는데 그런 서랍장을 이번에 이사가는 사람이 놓고 간 것이다 물건은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요즈음 가구들은 날림으로 만들어져서 이삼년 사용하면 서랍 밑이 쑥 빠져버리는 일이 다반사인데 이 서랍장은 오래 사용한 듯 한데도 서랍들이 모두 튼튼하고 반듯했다 자세히 보니 서랍 모서리 부분이 떨어지지 않도록 플라스틱으로 다시 한번 고정시켜 놓았고 둥글게 생긴 손잡이를 잡아보면 단단한 남성의 손아귀 힘이 느껴지기도 하니 누군가 정성을 들여 튼튼하게 만든 가구임이 분명했다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용도에 따라 각 서랍에 넣었다 복잡했던 방안이 한결 훤해졌고 물건을 찾아 쓰기가 수월해졌다 여기저기 모서리에 상처가 있고 도색이 긁혀서 첫눈에 이쁜 모습은 아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 튼튼하고 견고함에 반하게 되어 두고두고 정을 붙이고 싶은 것이다
남이 쓰던 물건이라고 가져가기를 꺼려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런것에 게의치 않는 나는 저 오래된 가구들을 보면서 감사함을 느낀다 소시민으로 살아온 세월이 가르쳐 준 생활의 지혜를 고맙게 여기게 된다 손때가 묻은 물건에서 느껴지는 사람 냄새와 세월의 냄새를 새가구에서 풍기는 화확 약품 냄새와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마치 저 자리에 옛날부터 있었던 듯한 가구들 새 아파트에 멋진 가구를 들여놓고 자랑하던 친구만큼 내가 행복한 여자라는 걸 알게 해 주는 낡은 가구들이 가족 같이 느껴지는 오늘 종자골 방안이 더 따뜻하고 아늑하다 말없이 지켜봐주는 청솔님의 눈빛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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