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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도산에서 바라본 이사동. 좌측 동그라미로부터 아랫사라니, 윗사라니, 영귀대가 있는 수침골입니다. 그리고 맞은 편에서 웅자를 드러낸 산이 식장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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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 이사동 은진 송씨 집성촌의 유래
대전에서 문화유적이 많이 있는 마을을 들라면 동춘당이 자리한 송촌동, 우암사적공원이 있는 가양동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곳들은 근래들어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섬에 따라 주변환경의 급격한 변모를 겪으면서 일정 부분 문화유적으로서의 향취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전통가옥이나 주변환경이 잘 보존된 곳을 꼽으라면 이사동 정도가 해당될런지 모르겠습니다. 도심에 가깝긴 하지만 보문산 자락에 있어 개발의 손길을 피해갔기 때문일 테지요.
대전에서 금산을 향해 가다가 보면 우측에 대별동 운전면허 시험장으로 가는 다리가 나옵니다. 이 다리를 건너서 곧장 3㎞ 정도를 가면 이사동이라는 마을에 이르게 됩니다. 멋드러진 소나무 군락과 조화를 이룬 기와집이 곳곳에 들어차 있고 마을 뒷산에는 은진 송씨 조상들의 묘지가 잘 가꾸어져 있어 진한 전통마을의 향기를 느끼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마을은 언제 생겨난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사람인 송요년의 묘가 남아 있는 걸로 봐서 그때부터 은진 송씨가 이곳에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송요년의 후손인 동춘 송준길이 그의 선친의 묘를 계하에 모셔두고 우락재에서 시묘살이 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그 산 이름이 사산(沙山)이라 합니다.
사산 아래에는 한천이라는우물이 유명했는데 이 두 가지에서 사한(沙寒)이라는 마을 이름을 따온 듯 합니다. 또한 이 사산의 생긴 모양이 선동채란형이라 하여 구 한말의 학자 송병화는 자신의 호를 난곡이라 짓고 그 뒤부터 사한리를 사란리로도 부르게 했다는군요. 그렇게 아랫사한과 윗사한을 합쳐서 이사동이 된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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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창한 송림 속에 꿈꾸듯 앉아 있는 절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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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마을 오른쪽 옥계동으로부터 아랫사라니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눈에 들어 옵니다. 그 길 윗쪽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멋들어지게 우거진 숲속에 들어앉은 절우당이라는 멋진 건물이 있습니다.
절우당은 본래 쌍청당 송유의 4대손인 자산공파 현조 송세협(1537~1626년)이 송촌(宋村)의 쌍청당 서쪽에 세웠던 건물이라고 합니다. 그의 호는 송담인데 이는 그가 귀향한 후 선영 아래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그 앞을 흐르는 시내 곁에 못을 파서 그 물을 끌어 대고 주위에 소나무를 심어 송담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를 그대로 자기 호를 삼은 것이지요.
지금의 이 건물은 근래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랍니다. 송담은 아름다운 산수와 경치를 찾아 유람하고, 시부를 짓거나 벗들을 청하여 함께 즐겼습니다. 절우당 16영과 10영을 지었으며 <해동산천록> <송담집> 등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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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1호 월송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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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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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3호 은진송씨 승지공파 재실. 추원재라고 부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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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 이 마을에는 월송재, 추원재, 덕담재 등 여러 재실 건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 월송재는 은진 송씨 삼가공 종중 재실입니다. 조선시대에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한 후 금정도 찰방, 안동대도호부 판관을 지낸 월송재 송희건(1572 ~ 1633)이 지었답니다.
솟을대문 양쪽 옆으로 각각 방 2칸과 곳간 2칸의 행랑채가 달려 있으며 ㄱ자형 건물입니다.
월송재와 담을 맞대고 있는 추원재는 조선시대 청암찰방과 삼가현감 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의 벼슬을 지낸 승지공 임청헌 송국보(1602~1662)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재실입니다.
모두 4칸으로 구성된 일자형 건물로 중앙에 2칸의 대청을 놓고 양옆으로 툇마루가 달린 온돌방을 각각 1칸씩 들였습니다.
이 두 재실은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긴 하지만 사진찍기조차 민망하리만큼 쇠락해 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합니다. 절우당 앞으로 난 길을 따라서 윗사라니마을로 걸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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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우당과 연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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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 웃사라니 음지뜸 마을 어귀에는 송죽매란을 벗삼아 살기를 희망하던 송국택 선생을 기려 지은 사우당이 있습니다. 원래 사우당은 그의 문중에서 선생의 호인 사우당이라는 이름을 붙여 인조 20년(1642년)에 지은 학당인데 처음 대전 I.C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송촌(宋村)에 건축되었으나 쇠락하여 허물어져 버렸기 때문에 문중에서 선조의 산소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 1971년 10월 1일에 중건하였다고 합니다.
문이 잠겨 있어 까치발로 들여다 본 사우당은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입니다. 크기는 사우당이 12평 서고가 3평으로 모두 17평 규모라고 합니다. 비록 근년에 지은 건물이긴 하지만 앞에 연못을 두고 있는 등 그런대로 고전미를 살린 건물입니다. 사우당 왼편에는 유허비가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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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응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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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 사우당 뒤로 돌아가면 한국전통 매사냥 보전회에서 운영하는 고려응방이 있습니다. 응방이란 사냥용 매를 조련하고 관리하며 매사냥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고려 충렬왕이 1274년 국내 최초로 응방을 설치하였으며 그 명맥이 조선조 숙종 41년(1715년)까지 존속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을 고려응방이라 명한것은 사라져가는 매사냥을 부활 시키고저 최초로 응방을 설치한 고려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회 있으면 언젠가 이곳에 와서 자세한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갔던 길을 되돌아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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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의 오래된 우물인 한천과 한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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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 사우당 왼쪽을 바라보면 거기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물을 길어 올릴 때 쓰는 도르래가 달린 우물을 오랫만에 보니 옛날 생각이 나고 감회가 무척 새롭습니다.
우물 이름은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인 송성준의 호를 딴 것이지요. 한천 송성준이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스무 살 무렵인 1820년경으로 추측되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은진 송씨 집성촌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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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귀대에 위치한 봉강정사(상), 동로사와 오적당(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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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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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귀대 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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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 조선말 고종 때의 학자 송병화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정자인 영귀대는 사우당에서 물방아골로 가는 길 오른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물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남부순환도로 밑을 지나서 가야 합니다. 도로 밑을 지나자마자 영귀대가 나오는데 영귀대로 오르는 게단 옆에는 아주 멋드러진 낙락장송 한 그루가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절을 하며 객을 맞이 합니다.
돌계단을 올라서면 만나게 되는 맨 처음 건물이 봉강정사입니다. 남부순환도로가 나지 않았다면 마을을 굽어보게 배치되어 있는 듯 합니다. 도로 개설로 인해 마을의 배치와 구성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봉강정사는 조선말의 유학자 난곡 송병화가 후학들을 강학하기 위하여 고종 22년(1896)에 지은 건물이랍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마을을 바라보다보니 자연스레 북향하고 있지요. 봉강정사 뒤에는 우측에 동로사와 좌측에 오적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로사는 송병화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하여 그가 죽은지 5년 후인 1920년에 제자들이 지었습니다. 사당 안에는 공자의 영정을 모셔두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입니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오적당은 1934년에 난곡의 영정을 모셔두기 위하여 지은 것인데 후일 난곡의 수제자 송병관의 영정까지 함께 봉안하였습니다.
영귀대가 비록 지정 문화재는 아니지만 만일 남부순환도로만 아니었다면 마을에서 경관이 가장 뛰어난 곳이 아닐까 싶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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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의 남쪽에 있는 오도산(336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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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 이곳까지 와서 마을의 주산인 오도산을 안 올라 볼 수 없겠지요? 오도산을 오르기 위해 옛 절터골로 향합니다. 옛날 절터가 있는 곳이라 하여 절골이라 했지만 지금은 인가는 없고 온통 포도밭입니다.
오도산은 사라니마을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사동 마을은 북향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안산인 보문산이 북쪽에 있고 주산인 오도산이 남쪽에 있어 오도산을 등지고 집을 짓다보니 자연스럽게 북향을 하게 됐나 봅니다. 이걸 보고 오좌자향(午坐子向)의 역풍수라고 한답니다.
오도산은 옆에서만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험합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성벽같이 보입니다. 올라가는 길도 사뭇 경사가 가파릅니다. 그래도 오도산에 오르면 이사동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와 눈맛이 시원합니다. 앞에는 식장산, 좌측엔 보문산, 우측엔 충남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서대산이 가까이 다가옵니다.
동족마을의 폐쇄성을 전통의 고수와 계승을 위한 바탕으로 삼았으면
오도산을 내려와 마을 들머리를 향해 갑니다. 아랫사라니 마을에서 옥계동으로 넘어가는 길이지요. 이 고개를 학고개라고 부르는데 고개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 옵니다.
옛날 이 고개에는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 중 가장 권세가 있는 양반집 종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늘 양반들에게 억눌려사는 생활에 반감을 품고 살았던가 봅니다. 그는 부모에게 자꾸 종살이를 그만두라고 조르고 부모는 졸리다 못해 종살이를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했는데 운 좋게 돈을 많이 벌었답니다. 그 돈으로 양반자리 하나를 산 그들은 다시 이 마을에 와서 거드름을 피우다가 옛 상전인 양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답니다.
억울하게 죽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풍수쟁이를 가장한 아들은 옛 상전에게 선산에 액운이 들었으니 면례를 해야 한다고 속여서 무덤을 파게 했는데 그 속에서 학이 한마리 날아갔고 그 뒤로 상전집은 망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뒤부터 사람들은 이 고개를 학이 날아간 고개라 하여 학고개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이 양반 마을에 대한 하층민의 은근한 반감이 만들어낸 설화인지도 모릅니다. 동족마을이 가진 한계와 폐쇄성이 타 성씨나 지역에 대한 배타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동족마을이 가진 그런 한계와 폐쇄성이 오히려 전통을 고수하고 계승하는데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의 이사동 마을은 범람하는 세계화의 담론 속에서 우리가 꼭 지켜내야할 고향 같은 마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사동 마을에 갔다가 떠나올 때면 늘 뭔가를 남겨두고 온 듯 싶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마 이 마을에 가시면 저처럼 그러시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