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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우 (성신여대 명예교수,시인,서울문우화장외)
청소년교육이 휘청거리고 있다
원인이야 다양하지만 무엇보다도 심성(心性)을 바로 잡아주어야할 가정의 환경 즉 부모의 오로지 “내새끼”만이 제일이라는 과보호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고 매일 등교하는 학교교육자들에게 이차적인 책임이 뒤따른다, 생활주변 환경과 오불관여의 사회인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인생의 회억(回憶)속에 사라져가는 추억어린 일들이 꽤나 많지만 두 눈에 불꽃이 번쩍 튀는 매운 매의 아픔을 경험해보지 않은 어른들이 계실까보냐,
여린 종아리를 걷어 올리고 가는 나뭇가지로 연거푸 맞던 1940년대 말, 십대의 초등학교 망나니시절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좀더 말한다면 일제(日帝)말기에 내가 입학한 서대문밖 죽첨(竹籤)소학교- 그 자리에서 지금도 서있는 금화초등학교 1년생 입학에서 해방이 되면서 바로 태평로에 있는 태평국국민학교로 집단 이동되고 또다시 정동의 지금 이화여중과 담을 함께갖는 서대문초등학교(지금은 폐교)로 옮겨가야했던 신세였다.
친구들과 온갖 짖꿎은 짓거리를 다하며 다녔다. 등하길에 있는 길가 농기구집에서 탈곡기에 손을 대서 완전히 찢겨나간 신문로 건물은 지금도 건재하다, 다만 주인만이 현대(現代)소유로 바뀌어 서있다,서대문 국민학교 본관 2층지붕위로 올라가서 숨기내기도 하며, 뒷동산(안산)등허리에 올라가서 멀리 내려다 보이는 한강물에 호기심을 느껴 작정하고 몇이서 걸어서 강가로 찾아갔다가 떠있는 나룻배에 올라타고 가운데로 밀려나서 혼줄도 나고 귀로에 신촌의 이화여대앞 길을 잃어서 헤매이다가 교외선 기차턴널로 들어갔다
웬걸, 그렇게 어둡고 길고 힘든 철로였으니- 기사회생(起死回生)으로 밤이 어둑해서야 집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파랗게 질린 부모님에게 얼마나 혼이 났던지 모른다.
이제 종아리에 지렁이가 기어갈 정도의 회초리를 맞은 정작 이유는 고백해야할 것 같다
서울 종로 1가 코너에 유명한 화신백화점이 높이 서 있었다. 지금은 삼성생명건물이다,
혼자서 뱃장좋게 백화점에 들어가서 1,2,3,4층까지 자주 누비면서 먹을거리 볼거리, 사고 싶은 학용품들을 마구 샀던 일이다. 최신식 만물상인데 호기심을 감출 수가 없어 닥치는대로 구입하였다 문제는 그 돈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용돈이 없었으면 고층의 영화관까지 입장하지 못했를건데, 나어린 십대 소년의 뱃장이 집에 계시지 않은 때를 택하여 부친의 설합까지 몰래 잠입(潛入)하여 많은 현금을 집어쓰게한거다.
한두번이 아니었다, 갈수록 간이 부어갔다, 드디여 부친이 눈치를 챘다,
건너편 빈방으로 호출하더니 호된 호통과 회초리 매질에 깡충 깡충 뛰면서 두 손으로 싹 싸악 빌어도 소용이 없다, 마침 시골에서 우리 현저동 압박골 집에 들리려 와 계신 할아버지가 나서서 만류하고서야 멎었으니 이후로는 내 생전에 남의 돈을 슬쩍 건디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어린 소년에게 무서운 형벌(?)아닌 징계였다.
사랑의 매-, 오늘날까지 바른 길로 살아가게한 벌이었다,
손위 누이와 밑으로 2명의 남동생이 지금도 서울 어느 곳에서 잘 살고 있다만 당시에 엄한 부친은 누가 잘못 해도 맡형인 나만 도맡아서 야단을 맞았다, 자애로운 모친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셨다 그래도 속깊은 마음은 너무 일찍 돌아가신 지금도 자주 떠오른다.
얼굴에는 온통 굴곡(屈曲)진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다 허린 휘여가고 머리는 빠져간다.
무엇보다도 기억력이 감퇴하여 지나간 사건,사고와 경험들이 점차 가물 가물거린다, 허다못해 손주이름, 전화번호,아이들 생일등을 잊어버리기가 일쑤이다,
허나 호되게 맞은 매- 나어린 나의 길을 바로잡아준 회초리의 사건만은 잊혀지지 않는다.
앞니는 거의 나갔지만 초롱초롱하던 두뇌와 빤질한 얼굴, 날렵한 몸매, 유연한 허리와 재빠른 동작 모든게 잘 돌아가던 10대-,
좋든 궂든 부닥친 사연이 하나도 남김없이 기록된 그래서 때로는 아픈 실연(失戀)의 세월조차도 담고 괴로워해야했던 사춘기까지도 엄청나게 담아있는 내겐 무엇보다도 부친에게서 받았던 “매” 십대초반에 맞았던 매질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고 살아간다.
매운 회초리때문인가 나도 커가면서 동생들에게 엄하고 천직인 교직생활속에서도 “사랑의 매질”을 간혹 사용하곤 했다. 아버님처럼 성질이 급해서인지 참지를 못하여 40년여 교단생활을 통해 맞아본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미안감을 갖는다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40~50대, 60대까지의 옛제자들이 뫃여서 사은회를 가지면서 귀한 선물까지도 주고 있으니 페스탈롯지가 웃을 일이다. 유독 내게만 야단을 치곤 하셨는지,
지금 같으면 당장 부모들이 달려오거나 고발(?)당할 일인데도 오히려 성실한 학생을 만들어주시려고 야단을 쳐준데대한 인사까지 받았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
예로부터 주마가편(走馬加鞭)이란 말은 잘 달리는 말에게 더 잘 뛰라고 가하는 매질을 뜻한다
그 외에도 서울고2년 수업시간에 떠든다고 선배교사에게 맞던 매-,
군 훈련병시절에 내무반 막사안에서 선임하사에게 손바닥에 불이나도록 맞았던 매-,
대학시절에 떼로 몰려다니면서 시비(是非)걸고 치고 맞던 매-,
그런 매맞던 시절이 은근히 그리워진다.
* 인용~ 농민문학, 사진/ 서울고등학교 3년시절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