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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강변의 옛 모습이다.
조선후기 내노라하는 화가들은 한강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대표적인 인물이 진경산수화를 완성시킨 겸재 정선이다.
그는 양수리에서 덕양산 행주산성까지의 산하(山河)를
그린 33점의 경교명승첩을 남겼다.
그의 그림에 노들강변은 없다.왜 그런지는 모른다.
조선후기의 방호자(方壺子) 장시흥(張始興)이 이곳을 챙겼다.
마을 뒷산은 든든해 보인다.곳곳에 수양버들이 여유롭다.
마을 앞 강가에는 배가 많이 있다.
강건너 백사장에는 말을 탄 선비들이 하인들이
거느리고 갈길을 재촉하는 듯하다.
장시흥이 그린 강가 마을 두 곳이 묘하게 공통점이 있다.
수남(水南)하고 산북(山北)의 자리에 있는 두 마을이다.
동작진과 노들나루 두 곳을 그렸다.수북산남(水北山南)에 있는
양명한 땅이라는 점과는 달라 관심을 끈다.
두 마을이 당시 사대부들이 별서를 짓고 풍류를 한껏 즐긴 명당으로 꼽혔다는 점이다.
그림 <노량진>에서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마을은 산의 북쪽 기슭에 강의 남쪽 터에 들어섰다.수남(水南)하고 산북(山北)한 음(陰)의 자리다.
그 마을 곳곳에 자리한 사대부들의 별서들을 다투어 마련하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참으로 이상하다.
삼전도비문을 지을 후보자로 천거되었던 4대 문장가 중 3명이 노량진에 별서를 마련했다.
이경석과 마지막 경합을 벌였던 장유는 월파정을 이곳에 지었다.월파정은 창랑 장택상이 살았던 곳이다.
몸이 아파서 비문을 지을 수 없다고 아예 두문불출한 이경전도 아버지 이산해와 함께
노들나루 별서에서 여생을 보냈다.
글이 안되게 일부러 문장을 억지로 지어 초반에 탈락한 조희일도 노량진에
별서를 짓고 살았다.이렇듯 인기있는 별서지대였다.
예로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하여 '노들나루'라고도 불리웠다.
이 나루는 서울과 과천, 시흥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 9대 간선로 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방면으로 향하는
6,7,8호 간선로의 길목이었다. 상류의 한강과 함께 서울로 통하는 한강나루 중에서도
중요한 길목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군대가 유진하는 진을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개인 소유의 나룻배가 10척이 있어서 도선료를 받고
행인을 건네주었다.
태종 4년(1414)에 광진과 더불어 이곳에 관리자로서 별감을 파견하고
관에서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관선 15척을 배치하여 진에
소속된 진부들로 하여금 도선료를 받지 않고 건네주게 하였다.
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이 있었으며, 세금을 거추는 관내는
과천의 신촌리, 사촌리, 곽계, 형제정계, 마포강이었다.
노들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이란 여관이 있어서 도성을
오가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쉬어가기도 하였다.
나루 북쪽 강변에는 넓은 백사장이 있었다.
이름하여 새남터라 하였다.일찍부터 사형장으로 이용되었다.
노들나루는 수양버들이 많고 백로가 즐겨 찾는 아주
아름다운 명승지였던 것으으로 전한다.
경기민요 <노들강변>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1.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 가노라
2. 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죽
만고 풍상 비바람에 몇 번이나 지어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흘러 가노라
3.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삼 망녕으로
재자가인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리라
1695년(숙종 2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숙종 15년의 민비 인헌왕후 폐출 때
죽음으로써 이를 충간(忠諫)하였던 박태보(朴泰輔)다. 그를 기리기 위해 노들나루 근처
한강가 산자락에 노강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자리에는 노강서원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1697년에 조윤벽(趙潤璧) 등의 청액소(請額疏)로 ‘노강(鷺江)’이라 사액되었다.
1754년에 중건되었다.
노는 해오라기 노(鷺) 강은 큰내 강(江)으로 그가 세상을 뜬 노량진의 지명에서
서원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925년 큰 홍수로 한강 물이 넘치는 바람에 노강서원이 물에 떠내려갔다.
그 뒤 6ㆍ25동란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수락산 자락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1977년에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전하께서는 마음대로 행하시나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할 줄을 왜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신은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상소로 임금의 허물을 간하는 것은
신하의 마땅한 분수와 의리입니다."
강직하기로 이름난 박태보(朴泰輔)는 인현왕후를 궁궐에서 내보낼 때
그 옳지 않음을 상소하여 왕의 노여움을 산다.
그는 원래 타고난 성품이 대쪽같이 꼿꼿하였다.
그래서 결코 누구에든지 아첨하는 법이 없었다.
이런 성격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시기와 참소가 끊이지 않았다.
왕의 신임은 두터웠다.
숙종에게는 늦도록 세자가 없었다. 임금의 마음이 초조하던 차에
소의 장씨(禧嬪張氏)가 왕자를 낳았다.
너무나 기다리던 왕자라서 숙종은 말없이 기뻐했다.
숙종은 곧 왕자를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올려 주려고 했다.
"아직 왕후마마가 젊으시온데,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옵소서.
세자 책봉은 너무 이른 줄 아뢰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옵소서."
박태보가 반대하고 나섰다.
"허, 거 참! "
숙종은 이마를 찌프렸다.
임금으로서는 세자 책봉이 단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자를 낳은 장씨와 그 일가붙이들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설쳐 대기 시작했다.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 장씨 역시 하루가 다르게 방자해져 갔다.
장씨의 어머니는 가마를 타고 궁궐을 드나들고 미관말직에 있던 천한 직책의
친척들까지 모두 중요한 벼슬자리에 임명되었다.
뜻 있는 대신들은 모이면 걱정부터 하곤 했다.
“정말 위태로워서 못 보겠소이다.
꼭 무슨 일이 나고야 말 것 같아서 말이요.”
“중요한 직책은 모두 장씨 일가붙이니
나라 꼴이 어찌되려고 이 지경으로 되어 가는지......”
“목숨을 걸고 임금께 아뢰어 봅시다.”
“안되오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하오.
조금만 더 두고 기회를 봅시다.”
숙종 임금은 여러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장씨소생을 왕세자로 삼았다.
그때 반대한 많은 신하들은 모두 다 멀리 귀양을 보내졌다.
장희빈은 눈엣가시 같은 인현왕후 민비를 쫓아 내기 위해
임금에게 갖은 거짓말을 꾸며 댔다.
거짓말에 넘어간 숙종은 민비를 궁궐에서 쫓아내려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왕비 민씨는 본래 투기심이 많아 국모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였소.
그런데 이번에 장희빈의 몸에서 세자가 탄생하자 더욱 모질고
악독하게 두 모자를 괴롭히고 있소.
그런 성품으로는 하루도 국모 노릇을 할 수 없으니 당장 폐출시키시오! ”
인현왕후 민씨는 억울하게 궁궐에서 쫓겨났다.
”폐비 민씨에게 일체의 음식과 생활비를 지급하지 말도록 하라!”
임금의 추상같은 명령 때문에 민씨는 겨우 친정의 도움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왕비 폐출 사건이 옳지 않다는 상소가 나라 안 곳곳에서 올라 오기 시작했다.
80 여명의 신하들은 앞을 다투어 상소를 올렸다.
”감히 짐이 하는 일에 이렇듯 들고 일어서다니!
용서할 수 없다. 모두 잡아 들여라. 내가 친국 하겠다. “
마침내 박태보 차례가 되었다.
”내가 너를 유난히 신임했거늘 정녕 네가 이 상소문을 썼느냐?”
”그렇습니다.”
“왜 썼느냐?”
박태보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임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어버이와 자식과의 관계와 같사옵니다.”
”물론 그렇다.” 숙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가 죄 없는 어미를 내치려 하는데,
어느 자식이 두 눈을 뜨고 가만히 구경만하고 있겠습니까?”
숙종은 버럭 화를 냈다.
”그토록 짐이 잘못 했다면 짐을 임금의 자리에서 쫓아 내면 될게 아니냐?”
”임금을 모함하고 죄인을 두둔하다니?”
박태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임금을 바라 보았습니다.
”요즈음 전하께서 후궁을 총애 하심이 너무 지나치시옵니다.
한두 사람의 말만 믿고 국모를 폐하려 하시니,
신하로서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숙종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무엄한 놈! 발칙스럽구나. 저놈을 몹시 쳐라!”
형리들은 박태보에게 매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곧 살이 찢겨 피가 흘렀다.
그래도 박태보는 바른말을 쉬지 않았다.
”네 잘못을 알겠느냐?”
거듭 숙종이 다그쳤으나, 박태보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정말 지독한 놈이구나? 어서 실토하지 못할까?”
”무엇을 실토하라 하십니까? 평범한 백성이라도 부부의 도리는 지극한 법인데
우리 국모가 어떤 분이시기에 상스러운 죄인으로 몰아 내치십니까?”
”저놈이 감히 나에게 충고를 하는구나.
저놈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불로 지질 형구와 무릎을 누를 형틀을 대령하렷다!”
갖은 형벌을 다 받으면서도 박태보는 할 말을 다 하였다.
”화형과 무릎을 누르는 압슬 형벌은 역적 죄인에게나 쓰는 형벌입니다.
전하, 신에게 무슨 역적 죄가 있길래 이다지 험하게 다스리십니까?”
”네 죄는 역적 죄 보다 더하다.
감히 임금을 능멸한 죄, 어찌 역적 죄로 다스리지 못할쏜가?”
박태보의 살 타는 연기와 냄새가 온 궁궐 안에 퍼져 갔다.
”누구랑 함께 상소문을 지었느냐?" "저 혼자 지었습니다.”
”이세화가 이미 같이 지었다고 실토했다.”
”아닙니다. 그는 저를 살리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숙종은 형리에게 분부했다.
“저놈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 계속 문초하라!”
그리고 사람을 시켜 박태보의 상황을 살피게 했다.
”실토 했느냐?”
”아닙니다. 입이 붙어 버린 듯 달싹 도 안 합니다.”
”죽지는 않았더냐?”
”아직 실낱 같은 숨은 붙어 있습니다.”
숙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박태보 그 놈이 본디 대쪽 같은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런 참혹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으니 참으로 지독 하구나.”
”계속 고문 할까요?” 대신의 물음에 숙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고문한다고 소신을 굽힐 놈이 아니다.”
”그럼 하옥 시켜 둘까요?”
”멀리 진도로 귀양을 보내라. 당장!”
진도로 귀양가는 길에 들린 노량진 친구집에서 옥독(獄毒)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의 품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
조선의 문신 박태보가 귀양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리 거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조선 제일의 충신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겠다는 것이었다.박태보는 숙종 때 문신으로 왕이 장희빈을 불러들여
왕비를 삼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할 때 정면으로 간하다가 잡혀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은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이다.
종묘 제향에 향로를 반드는 봉로관이 되었을 때 으레 물수건으로 싸서 드는 법이건만 나랏일에 약간 뜨겁다고
싸서 들다니 말이 되느냐고 맨 손으로 들었다고 한다.누릿한 냄새가 나기에 왕이 돌아다 보니 박태보의 향로든 손 끝이 타서
노란 연기가 오르는데 눈썹 하나 까딱 않더라는 그런 분이다.
"너는 요놈 뜨거운 것 잘 참더구나"
숙종은 중전을 폐위하는 것을 간 했을 때도 친국하는 자리에서 인두를 달궈 단근질을 해서 역사상에 드문 참혹한 형벌을 가했다.
”세상에 저럴 수가!”
박태보의 짓이겨진 처참한 얼굴을 보고 사람들은 말문을 잃었다. 곳곳에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남자들은 박태보의 가마를 서로 메겠다고 나섰다. 한강건너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지 부근에 다다랐을 때다.
박태보는 고문으로 생긴 상처가 터져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 '박세당'과 아들을 불렀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동안 말 없이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그러더니 박세당이 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는 다시 회복될 것 같지 않구나.
여기서 조용히 죽어 네 충절을 나타내는 게 옳은 일이 아니겠느냐?”
박태보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박세당이 울면서 한강을 건너는 것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박태보는 얼마 후 숨이 끊어졌다.
그의 마지막은 한 여인이 지켰다는 전설이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또 얼굴이 남중일 색(男中一色)이었다.
어느 날 참판 이종염(李宗燁) 집에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어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하여 남편 서계(西溪) 박세당에게
아들을 좀 달래보라고 청하였다. 아버지 박세당이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라 훈계하였다.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그 여인은 박태보의 양친을 뵙고 스스로 머리를 쪽 지어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은 흘러 박태보는 그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숙종 15년(1689)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하여 왕이 중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直言)을
잘 하던 박태보는 이 소식을 듣고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을 가게된다.
귀양지로 가는 길에 국문 시 입은 장독(杖毒)과 화상 (火傷)이 심해 친구 집에 있는 노량진에 머물렀다.
이때 어느 여인이 와서 박태보를 한번 뵈옵기를 청하였다. 방문객은 바로 전일에 박태보를 사모하여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출가한 부녀자처럼 쪽을 지고 다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멀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울고 또 울다가 일어나 나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 달아 싸늘하게 죽었다고 한다.
'골로 간다.' 곧 죽으러 간다는 뜻이다.전통적으로 동쪽에는 양명한 것들을,서쪽에는 그렇지 않은 것들을 두는데 나온 말이다.
궁궐의 경우 동쪽에 동궁(東宮)을 두었고 서쪽에는 선원전을 배치했다.한양 도성 밖 서쪽 오늘날 은평에는 고택골이 있었다.
당시 무덤과 처형장이 있는 고택골이다.그래서 '골로 간다' '골로 보낸다' 등은 '죽으로 간다','죽여버린다'와 서로 통했다.
도성 밖 서쪽 서소문 새남터 절두산에 처형장을 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나 생각한다.
노들나루 새남터다.억새와 나무(남)가 무성한 기(氣)가 드센 곳이다.그런 곳은 군사훈련장이나 중죄인처형장으로 이용했다.
이 새남터에서는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이개 등 사육신이 거열형으로 끔찍하게
죽어간 처형장이다.조선후기 천주교박해 때에는 주문모 신부와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들이 이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함석헌선생은 수양대군이 저지른 피비리나는 참극을 의(義)의 교훈으로 질타했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에는 배울 것이 있다.
함석헌선생 <씨알의소리>중에서."
홍살문이다. 나쁜 것을 막아주는 지킴이다.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육신이 사시는 공간을 가르는 문이다.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
동짓날의 팥죽은 시절식(時節食)의 하나이면서 신앙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팥죽에는 축귀(逐鬼-잡귀를 쫓음)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팥은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기 때문에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는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했다.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에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었다.
엣날 중국 진나라의 공공이라는 사람에게는 늘 말썽을 부려 속을 썩이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다. 어느 동짓날 그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죽은 아들은 그만 역질 귀신이 되고 만 것이다. 역질이란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그 당시에는 역질이 마을에 돌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 꼼짝없이 앓다가 죽어 버리니 공공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해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공공은 생전에 아들이 팥을 무서워 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팥죽을 쑤어 대문간과 마당 구석구석에 뿌렸다. 효과가 있었던지 그 날 이후로 역질은 사라졌다.
이를 본받아 사람들은 역질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쑤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붉은 색은 귀신들이 싫어하는 색이라고 생각했기에 곡식들 중에서도 유난히 붉은 색을 지닌 팥을
그런 용도로 사용했다 한다.
신라왕조 헌강왕 때 처용이라는 천하의 한량이 살았다.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워서 나쁜 귀신들도 탐을 내었다.
하루는 서라벌 도깨비가 꾀를 내어 처용이 집에 없을 때 처용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처용의 아내에게 갔다.
아내는 처용인 줄만 알았다. 처용이 밤 늦게 집에 들어와보니 이불에 다리가 네 개가 있는 것이다.
처용은 힘만 센게 아니라 아주 현명했다.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방에서 나와 달을 보고 시를 지어 읊었다.
처용은 얼굴색이 붉은 아라비아 상인이었다. 밤새 술까지 마셨고 성질까지 꾹꾹 참고 있었으니
그 붉은 얼굴이 훨씬 더 붉게 되었다. 그 도깨비는 붉디붉은 처용의 얼굴을 보자 그만 질겁을 하고
처용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사죄하며 다시는 처용 근처에 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줄행랑첬다고 한다.
이후 신라세시 풍속은 동짓날 자기 집 대문입구에 처용 얼굴을 상징하는 붉은 팥죽을 칠하였다.
"붉은 색깔만 얼씬 거려도 이유 불문하고 도망부터 쳐라!"
그 날 혼줄난 도깨비 대장이 전국 도깨비들에게 긴급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런 설화를 바탕으로 홍살문에도 붉은 색을 칠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홍살문의 붉은 색은 신성한 공간으로 침입하려는 잡귀를 막기 위함이다.
홍살문이라는 단어에서 살이라는 글자는 화살 전(箭) 자의 음이 아닌 살이라는 뜻을 딴 글자이다.
홍살문은 붉은 화살이 꽂혀있는 문이다. 문의 위쪽을 보면 화살들뿐만 아니라 삼지창도 꽂혀있고 삼지창에는 삼 태극이 붙어있다.
청색 적색 황색의 삼색이 바람개비 모양을 이루고 있는 삼 태극은 천+지+인 3 요소가 어우러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를
상징화한 것이다.
불이문(不二門),
속계(俗界)와 진계(眞界) 불국정토와 사바세계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불가의 말이다.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다.선(善)과 불선(不善)도 둘이 아니고
유(有)와 무(無), 깨끗함과 더러움 등 모든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불가에서 불이(不二)란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같다.
"하늘에 태양은 하나뿐이듯 우리가 모실 왕은 한 분 뿐이다."
사육신이 죽어가면서 외친 불사이군(不事二君)이다.그 외침을 상징하는 불이문(不二門)이다.
캄캄한 밤중이었다.한 사내가 삐거덕거리는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노들나루에 이르렀다.
그는 망태기 하나를 들고 노들강변 야간으로 비틀거리며 올라가기 시작했다.그의 뒤에는 하인 박서방이 지게를 지고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캄캄한 어둠 속이라 산을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게다가 어두운 하늘에서 내리는 빗발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나리,비가 옵니다."
박서방이 밤중에 산을 올라가는 것이 싫은 듯 투덜거렸다.그는 걸음을 재촉하다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도 무심하지 않아 눈물을 흘리는구나."
"비가 오는데 이 일을 해야 합니까?"
박서방이 다시 말했다.
"내가 삯을 후하게 쳐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비가 오니까 오싹합니다."
"충신을 위한 일이다."
"충신이요?"
"그래,우리가 아니면 누가 충신의 시신을 안장시키겠느냐?"
"소인은 귀신이 나올까 봐 무섭습니다."
박서방이 부르르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그는 품속을 헤치고 야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구나.충신들이 누워서 강을 볼 수 있겠어."
사내는 한강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한강 너머에는 대궐이 있고
대궐에는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이 있었다.그는 충신을 대궐을 바라보는 것을 꺼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한강에 등을 돌린 방향에 터를 잡았다.
"여기가 좋겠구나.지게를 내려놓고 땅을 파자."
사내가 사방을 둘러본 뒤 말했다.박서방이 지게를 내려놓고 이마의 땅을 훔쳤다.
사내는 준비해 온 삽으로 남쪽 비탈에 땅을 파기 시작했다.6월 장마철이라 비가 자주 내려
땅을 파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그래도 여름철이라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박서방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어디선가 또다시 여우 우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렸다.
그는 쉬지 않고 땅을 팠다.이내 묘혈이 만들어졌다.사내는 망태에서 베로 소중하게 감싼 것을 꺼내
묘혈에 묻고 봉분을 만들었다.사내는 봉분 앞에 일종의 비석인 목패를 세웠다.
"成氏之墓'
사내는 귀신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사내는 또 묘혈을 팠다.숨이 차고 힘이 들어 호리병에 준비한 술을
마시고 다시 묘혈을 판 뒤 봉분을 만들었다."兪氏之墓" ."朴氏之墓" ."金氏之墓" ."李氏之墓" ."河氏之墓" 차례로 세웠다.
봉분에 목패까지 세우자 그는 향을 피우고 술을 따른 뒤에 절을 했다.
'충신의 변하지 않는 붉은 마음이 천년만년이 지나도 저 한강에 흐르리.'
사내는 빗발이 흩뿌리는 한강을 내다보면서 슬픔에 잠겼다.그의 이름은 김시습,약관 23세였다.
막 태어날 때 ‘낳았느냐?’
하고 세번 묻는 소리가 났다 하여 삼문(三問)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성삼문은 본관 창녕, 호 매죽헌이다.세종29년 중시(重試)에 장원(신숙주 4등)하여 승지가 되고 왕을 가까이 모셨다.
세종께서 “이 아이가 장차 이 나라의 대통을 잇게 되면 경들이 잘 보필해 주시오.”한 고명지신이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쫓고 왕위에 오르니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를 안고 통곡하였다.
세조의 친국 때 세조와 한 치의 굽힘도 없이 말을 주고 받았다.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했느냐?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을 뿐입니다.
천하에 누가 그 임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제 마음은 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찌 배반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나으리는 평소에 성왕(成王)을 보필한 주공(周公)임을 인용하셨는데
주공도 이런 짓을 했습니까?
제가 이 일을 꾸민 것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내가 왕위를 받을 당시에 이를 막지 않고 이제야 배반한단 말이냐?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막지 못하니 물러나서 죽는 길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쓸데없이 죽는 것은 소용없으니, 참고 오늘에 이른 것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자는 반역자다.
명색은 상왕을 다시 모신다면서 사실은 자기 잇속을 차리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저를 신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저는 나으리의 녹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저의 집을 몰수 해서 조사해 보십시오.
광에 고스란히 쌓여 있을 것입니다."
(뒷날 조사하니 하나도 먹지 않고 별실에 쌓아 두었다.)
불에 시뻘겋게 단 쇠로 다리를 뚫고 팔을 잘라도 얼굴빛도 변치 않고 조용히 말했다.
“나으리 형벌이 너무 참혹합니다 그려.”
이 때 신숙주가 세조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삼문이 쥐어짜 꾸짖었다.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대왕께서 세손을 간곡히 당부하지 않았더냐!
그렇건만 네가 이렇게 못된 줄을 몰랐다.”
숙주에게 고함을 치니 세조는 신숙주더러 자리를 피하게 했다.
이어 제학 강희안이 끌려 나왔다.
강희맹과 형제간으로 당대 명신이며
본관은 진주,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을 편수한 사이다.
그는 시문에 있어 당나라 유자후와 같고,
글씨는 원나라 조맹부와 같으며 그림은 송나라 곽희를 겸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국문을 받을 때 “나는 도무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고 부인 했다.
세조가 삼문에게 “사실이냐? 공모한 일이 없느냐?”하고 묻자
삼문은 “그는 모르는 일입니다.
나으리는 이 나라 어진 신하를 모두 죽이실 작정이오.”하여 강희안은 무사할 수 있었다.
형장에 끌려가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울리는 북소리는 인명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해는 기우는 구나/
저승길에는 주막도 없으니 오늘밤은 뉘 집에 묵을 건가.)
5,6 세 딸이 수레를 따라오며 우니,
"우리 집 사내는 모두 죽을 것이지만 너는 딸이니 살 것이다"라며 달랬다.
세조는 누구보다도 성삼문의 마지막 말이 궁금했다.
그래서 “근보가 죽을 때 뭐라 말하더냐.”물으니 “너희는 현명한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나는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을 뵈오리라,고 아뢰었다. 어지간한 세조도 이 말을 듣고서 숙연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세동생 네아들이 함께 모두 죽음을 당했다. 마지막 아들이 죽을 때 눈물을 흘리자
세조가 어린 아들 죽을 때는 왜 우느냐고 하니, 큰 것들은 자기가 왜 죽는가는 알고 죽는데
어린 젖먹이 아들은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으니 눈물을 흘렸노라고, 대답했다.
사충서원은 ‘네 명의 충신을 모신서원'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로 희생된 노론의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배향하는 곳이다.
이들은 경종 즉위 후 임금에게 후사가 없자 연잉군(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는데 앞장섰다.
이어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했다. 소론의 적극적인 반대로 연잉군의 대리청정은 실패한다.
이를 주장했던 노론세력은 대거 축출되게 되었다. 이 때 노론 4대신은 거제도, 남해, 진도, 흥양으로 각각 유배되었다.
김일경 목호룡 등이 노론 4대신을 포함한 60여명이 역모를 도모하였다고 무고함으로써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1725년(영조 1) 연잉군이었던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 4대신은 신원되었다.
이듬해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 김창집의 별서가 있던 과천 땅(지금의 반포)에 건립되어
그 해 사액을 받았다. 이때 영조는 서원의 현판을 친필로 써서 하사하고 제관을 보내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서원은 사육신 묘 근처로 옮겼다.일제강점기에 서원 부지가 철도용지로 편입되면서 1927년 당시 고양군 한지면
보광리(현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건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
이후 피난민들이 서원 터를 차지하였다. 그 자리에 서원을 복원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還局)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4대신은 다시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서원도 철폐되었다. 1740년(영조 16)에 4대신이 충신으로 인정되었으나, 서원은 1756년(영조 23)에야 복설되었다.
사충서원의 위상은 노론이 득세하던 시기에 비교적 높았다.
1852년(철종 3) 봄에 임금이 수원으로 능행(陵行)할 때 사충서원에서 제사를 지냈다.1868년(고종 5)과 1909년(순종 3)에도
임금이 행차하여 친해 제사지낼 정도였다. 그리하여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우리 나라 철도는 1899년 9월 18일 개통되었다.
철로는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33.2킬로미터의 거리에 놓였다.
'모갈이'라는 증기 기관차가 운행되었다.당시 열차 속도는 겨우 시속 20~22킬로미터였다고 한다.
요즘 마라톤 선수의 달리기 속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요금은 일등석이 1원 50전, 이등석이 80전,
삼등석이 40전 정도였다.그 당시 쌀 한 말 값이 50전 정도로 열차 요금이 매우 비싼 편이었다.
지금 노량진역 구내 북쪽 한강철교를 건너기 직전에 이곳이 철도시발지 였음을 알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1975년 철도 창설 76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철도청장 이동화가 이 건립한 기념비이다.
전면에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휘호가 있고 후면에는 서정주 시인의 글이 새겨져 있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장승배기'가 있다.예부터 장승이 붙박아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땅이름이다.
옛날 남도 길손들은 한양에서 남문을 나와 노들나루를 건너 아차고개를 넘어 이 장승배기 앞을 지나 시흥 땅을 거쳐
수원을 거쳐 갔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원혼을 기리기 위해 등장하는 아차고개다.바보온달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한
아차산이다.사육신과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는 노량진의 아차고개다.
서울 동작구 상도2동 영도시장 맞은편 삼거리의 상도지구대와 신한은행 상도지점 앞을 장승배기라고 부른다.
행정구역상 현재 장승이 서 있는 위치는 노량진2동에 속한다. 이곳은 노량진동과 상도동·대방동이 접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노량진 선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서울 시민들 중에는 상도동의 위치는 잘 몰라도 장승배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명칭이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 유명한 대방 장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들나루 장승백이에 장승이 세워진 데는 조선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능원과 관계가 깊다.
사도세자가 그 부왕에 의해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 죽은 뒤, 그의 아들인 정조는 1777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 아버지 사도세자를 잊지 못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원 화산으로 천장한 아버지의 현능원을 찾아 명복을 빌었다.
정조는 묘소를 갈 때엔 꼭 이 장승백이를 지나면서 쉬었다 가곤 했었다. 이 곳은 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으스스했다. 정조는 자신이 쉬어 가는 이 곳에 장승을 세우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 곳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쓰인 두 개의 장승이 세워지게 되고, 이후부터 정조 임금은 이 곳을 안심하고 지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한강에 처음으로 놓은 한강철교다.처음 미국인들이 한강철교 공사를 시작했다.경영난으로 일본인 손으로 넘어가 준공된다.
1950년 6.25 한국전 때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위해 군에서 한강철교를 폭파했다.이때 많은 시민들이 희생당하는 아픔의 다리다.
한강철교에 이어 한강에서 두번째로 놓은 한강대교다.처음에는 한강인도교로 불렀다.
한강인도교를 건설을 하면서 새로 조성한 노들섬이다.일제는 그 섬을 중지도(中之島)라고 했다.
노들섬이 들어서기 전 용산팔경(龍山八景)의 하나로 절경을 자랑하던 사촌(沙村)이다.
이곳 샘물에서 솟는 물은 맛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그래서 사촌의 물은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으로 유명했다.
노들섬 서쪽은 시민들의 텃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한 여름 한강대교를 건너다 텃밭 원두막에서 잠시 쉬기도 했다.
50년 넘게 빈 땅으로 방치돼온 한강 노들섬이 ‘음악섬’으로 거듭 태여나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한강대교 아래 ‘음악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한 노들섬(연면적 9747㎡)을 지난 9월 28일 정식 개장했다.
대중음악 전문 공연장 ‘라이브하우스’, 서점 겸 도서관 ‘노들서가’, 음식문화공간 ‘엔테이블’, 식물공방 ‘식물도(島)’ 등의
시설이 들어섰다.라이브하우스는 모두 456석 규모(스탠딩 시 874석)의 대중음악 전문 공연장으로, 콘서트에 최적화된 음향·
조명·악기 시설과 리허설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으며, 큰 무대를 보유하고 있어 다양한 무대 연출이 가능하다.
시민들이 대기하는 공간 ‘뮤직라운지’에서는 음악과 관련된 전시를 볼 수 있고, 음악가들이 선곡하는 음악을 들으며
가벼운 식사를 할 수 있다. 바로 옆에는 소규모 음악·문화 기획자가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입주공간 ‘노들오피스’도 마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