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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정(새미정)'을 돌아 내려오면 '큰골내치기'다. '새미정'에서 낚시를 하던 여름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물결이 일렁이던 수면은 얼음으로 덥히고 아이들이 모여 얼음축구를 한다. 마을사람들은 얼음떡메치기로 고기를 잡기도 한다. '새미정'은 '사미정'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은 '궝소’와 '새미정소(沼)'를 합쳐 부르는 지명이다. '새미정' 아래에는 '우전'이 있었다. 1910년대의 '우전'은 '진리 나루새' 근처에 있었다. 그 후 '개때배기'로 옮겼다가 '갈마곡리 파출소' 뒤로 옮겨가게 되는데 한국 전쟁후의 일이다. 그 후 '닭바우 소옥개(미소지움아파트)'로 옮겼다가 '북방 하화계리'로 옮겨 지금에 이르게 된다. '갈마곡 우전'을 중심으로 한 '샘통골' '작은골' '큰골 '어귀를 '후항(後港)'이라 하였다. 지금은 이 일대를 '갈마곡리 큰골' 어귀라 부르지만 옛지명은 '뒷구랭이'다. 즉 '샘통골' '작은골' '큰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연못을 이루었고, 집들도 산 밑에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객사' 뒤쪽의 '구렁말'이라 하여 '뒷구랭이'라고 불렀다. '갈마곡리'는 바로 '뒷구랭이'를 중심으로 '샘통골', '나오리', '작은골', '큰골', '새미정'을 아우르는 마을이다. '갈마(渴馬)'의 의미는 목마른 말이라는 뜻이며 말이 이곳에서 물을 마셨다는 계곡이 있어 갈마곡이라 부른다. 그러나 말이 어디에서 물을 마셨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샘통골'에는 좋은 샘이 있고 이 물줄기를 받아 농사를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이 골이 아닐까 짐작 할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뒷구랭이'를 홍천고등학교 왼쪽 골짜기를 말하고 있으며, 어귀는 '나오리'라 부르는데 내막을 알 수 없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골짜기로 버려져있지만 예전에는 '마지기' 로 넘어 다니던 고개가 있었다. '작은골'은 갈마곡리의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으로 '망령산'의 한줄기이다. 어귀의 '샘통'을 제외하면 골짜기는 호드기처럼 좁고 깊다. 현재 18홀규모의 골프장건설이 예정되어 있다. '갈마곡'을 이루는 '큰골 은 말 그대로 골이 넓다. 안막까지 올라가면 골짜기는 세 갈래로 갈라진다. 큰골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리 요리로 소문난 '큰골농원'을 찾아간다. '큰골농원'이 자리 잡은 골은 '바른골'이고 왼쪽은 '새더덕골'이며 오른쪽은 '소죽은골'을 지나 '연애부치'이다. '연애부치'로 들어서면 '여내골' 마치미로 넘던 고개 길이 남아있고 또 '북방 성동 구렁말'로 이어진다. '큰골농원'에서 내려오면 '엄선달골'과 '터골'이 골이 깊다. '여편내골', '웃상골'을 지나면 '가름자골'이 나오는데 도로가 포장되어 있어 올라가보니 터만 닦아놓은 개인소유의 땅이다. '큰골'은 골짜기치고 논과 밭이 많다. 이름 붙은 골자기마다 사람들이 살았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화전민들이었다. 지금은 거의 떠나고 열댓 가구만이 '큰골'에 살고 있다. 그러나 큰골어귀는 주택가를 이루며 갈마곡의 중심을 이룬다. 한때 야구로 유명했던 석화초등학교가 있고 강가를 따라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도시적 풍경을 자아낸다. 석화초등학교 출신의 아동문학가 민현숙씨는 도시적 삶속에 잊혀져가는 자연의 순수함과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물의 생태적, 본능적 꿈틀거림을 동시와 동화로 풀어내고 있다.
가시나무라 해서 해님이 피해가는 것 보았니? 보잘 것 없는 풀 위에 눈곱만 한 꽃이 핀다고 눈곱만큼만 해가 뜨는 걸 보았니?
썩은 물 쏟아지는 하수구 옆에 이마를 찡그린 시궁쥐를 언제 또 본 것일까? 쏜살같이 달려가 젖은 발을 감싸는 해님 민현숙의 < 해님이 가는 곳 전문 >
'석화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뒤로는' 홍천고등학교'와 '석화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화양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런 이유인지 석화초등학교의 교명은 石華(석화)다. 석화산의 석자와 화양강의 화자를 합쳐 지은 듯하다. 석화(石華)는 어디에 숨어있을까? 학교 교문을 나오니 오르내리는 길이 좁다. 좁은 길의 아침을 여는 것은 아이들의 목소리다. 맑은 바람과 시냇물에서 목욕하고 나온 듯 밝고 투명하다. '큰골'로 오르는 길은 예전부터 좁았다. '큰골'개울을 사이에 두고 산 둔덕에 자리 잡은 탓이다. 지금은 '웃뭇골' 어귀부터 '새미정'까지 복개를 하여 큰길이 되었지만 골안으로 들어서면 여전히 좁다. 도시속의 산촌이랄까.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골풍경이 펼쳐진다. '큰골'어귀에서 '웃뭇골'로 오르면 산마루에 홍천군상수도사업소 정수장이 자리한다. '태학리'와 경계를 이루며 '대기고개'와 '범파정'과 '새미정'을 잇는 능선이다. 홍천을 지나는 가객들은 '범파정'에 대한 시문을 많이 남겼다. 범파정에 대한 자료를 찾는 일 또한 숙제로 남았지만 여전히 '대기고개'에서 바라보는 강과 물소리, 닭바우 소동개울(소옥개)의 뜰과 오룡산이 이어지는 남산의 풍경은 아름답다. 닭바우에서 배를 타면 태림아파트 뒤편에 닿았다. 그 뱃터에는 물레방아가 있었고 홍천에서 제일 많은 빨래꾼들이 모여들었던 빨래터가 있었다. 화양교를 건널까? 태학교를 건널까 망설이다가 대기고개를 넘어 새로난 갈마곡교를 건너 닭바우로 들어섰다. 닭바위의 너른 소옥개뜰과 홍천여중 우시장에 들어선 신성미소지움, 주공아파트가 눈에 띄고 강둑을 잇는 강변도로가 이어진다. 갈마곡 다리에서 덕치천과 화양강이 몸을 섞는 소리를 듣는다. 위쪽으로 보가 있고 그 위는 상수원 취수장이다. 상수원보호구역이라 철망이 쳐져있다. 지금은 취수장 보막이 공사가 한창이다. 강둑을 따라 걸어 오른다. 화양강과 덕치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오리떼들이 모여 겨울 햇살을 즐긴다. '검율리'의 너른 버덩은 '군량뜰'이다. '오룡산'의 능선자락이 흘러내리며 '층층골', '피나무골', '가매골' '우뭇골'을 이루고 군용뜰은 이 골짜기 앞뜰이 된다. '이괄이소' 어귀의 '층층골'에는 약수가 있고 군부대 뒤의 '피나무골'과 터널어귀의 '우뭇'골과 '가매골'은 산중턱까지 중고자동차매매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오룡산'으로 오르는 골짜기는 '봉골'이다. 이 골짜기 앞뜰에 이괄은 군대에게 먹일 곡식을 쌓아두었다고 한다. '군용뜰'은 응달인 반면 '수태개울(덕치천)'을 건너면 '양지말 야루정'이다. 최근 들어 '양지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화가 김영진씨가 이곳에 커피숍을 열고 그동안 미루어 둔 그림을 다시 시작할 채비를 하고 있다. 한때는 예술과 멀어졌던 그가 다시 붓을 잡은 것은 버릴 수 없는 업(業)이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 업을 눈뜨게 한 것이 자연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괄이보'에서 수로를 따라 내려오면 '검율리 새말'과 '수펑뒤', '오리들', '새가람'이다. 터널 어귀에서 '검율목장' 쪽으로 내려오다 만나는 옛 지명이다. 이곳은 '새가람' 뒤편으로 연못이 있었는데 오리들이 많이 날아와 '오리들'이라고 하고 산밑으로는 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수펑뒤라 불렀다. 또한 '성재'를 넘어다니던 사람들이 자리를 잡으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새말이라 하는데 지금의 '월드아파트'근처가 된다. 특히 '새가람'은 '이괄이소'에서 흘러든 물줄기가 구비를 이루며 새미정 쪽으로 나가면서 새로 개울이 났다고 하여 붙여진 소지명이다. 따라서 이 일대는 모두 개울 강변이었고 하천이었기에 특별한 지명이 없다. 44번 국도가 '군량뜰' 끝자락을 지나 '당뿌리'로 건너가고 외곽도로가 덕치교를 건너 태학리로 이어진다. '닭바우'의 '소깨버덩(소옥개)'은 홍천의 새로운 주택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주공아파트가 들어서고 이어 상권이 형성되면서 최근에는 미소지움 아파트가 들어섰다. 최근에는 444번 지방도에서 미소지움아파트 뒤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졌다. '닭바우'는 짓고개아래 '새말'과 '소옥개버덩', '남산 거북등', '다지골'을 아우른다. 홍천군지에 '닭바우 [鷄岩]'는 닭바우 마을 서쪽 홍천 강가에 있는 큰 바위이며, 1925년 홍천강이 범람하였을 때 닭이 떠내려 오다가 바위에 걸려서, 이 바위 위에 올라가 홰를 치면서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20년에 발행된 지도에는 계암(鷄岩)이란 지명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훨씬 오래 전부터 '닭바우'라고 불렸다고 여겨진다. '닭바우'에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홍천의 명당자리와 관련짓고 있다. 홍천의 3대 명당자리는 남산에 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오룡산 아래의 '나비목이'라고 한다. '검율리'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나비가 날개를 펼친 형상의 자리라고 하는 곳이고, 또 한 곳은 '감투봉'의 이마에 해당하는 곳이며, 마지막 한 곳이 '남산 거북등'이라고 한다. 닭바우의 이야기는 세 명당자리중 남산 거북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홍수로 홍천지방이 물난리를 겪으면서 마을사람들은 세 명당자리를 살펴보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남산 거북등에 누군가 시신을 묻어 놓은 것을 발견하고 파내어 장사를 지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중에 장례를 마치고 나니 난데없이 장닭이 강가의 바위 위에서 '꼬끼오' 하고 크게 울어댔다고 한다. 그러자 쏟아지던 빗줄기가 뚝 그치고 날이 맑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닭이 울던 바위를 '닭바우'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닭바우'는 어디일까? 닭바우는 홍천문화예술회관 아래 주유소 뒤편의 바위다.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산기슭에 부채모양으로 우뚝 선 바위다. 지금은 강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데 '닭바우'란 지명이 붙여진 그 옛날에는 화양강이 '소깨버덩'을 가르며 '닭바우' 앞으로 흘렀다고 전해온다. 이삼십년 전만 해도 이 일대는 논이었고, '다지골'의 물이 '송어골 '앞으로 돌아 흘러가는 개울이었다. 장마만 지면 물이 역류하여 팔뚝만한 잉어, 눈치, 메기들이 강에서 거슬러 올라와 논바닭에서 펄쩍펄쩍 뛰었다고 한다. 톱이나 몽둥이로 고기를 때려잡았다는 이야기는 이 마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고향에 대한 추억거리가 되고 있다. 지금은 홍천문화예술회관을 비롯해 청소년문화센터가 문을 열고 도시 녹색숲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문화예술회관 뒤는 '다지골'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골자기가 나뭇가지처럼 많다고 하여 붙여졌다. 따라서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도 많다. 더욱이 요즘에도 가재를 잡으러 천렵을 가는 골짜기이기도 하다. 남산으로 오르는 큰 골짜기 중에 하나이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골짜기이다. '짓골'은 '짓-고개' <우령(羽嶺), 깃고개, 칫칙고개>로 더 알려졌다. '학다리'에 모였던 학이 이 고개를 지나가다가 깃을 떨어뜨렸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온다. 짓고개는 '갈마곡 새말'에서 '동면 성수리 아래숫골'로 가는 고개였는데 자동차가 없던 시절 '짓고개'를 넘어 장을 보러오는 장꾼들이 굽이굽이 길게 이어졌던 고개다. 지금은 군부대가 들어서고 길도 막혀 넘어 다닐 수 없다. '짓고개'에서 '닭바우 뱃터'로 다니던 길은 아직도 남아있다. '주공2차아파트' 뒤로 44번 국도가 지나가고 국도에는 육교가 있다. 바로 육교를 건너 주공 앞을 지나고, 농협을 지나면 '크리스탈 웨딩홀' 뒤로 이어지는 작은 골목길이 강가에 닿는다. 이곳이 바로 '닭바우 뱃터'였으며, 크리스탈 웨딩홀자리에는 물레방아가 있었다. 닭바우의 너른 버덩은 '소깨버덩(소옥개, 속개)'이다. 한자로는 '이천(裏川)'으로 표기하는데 홍천군지에는 닭바우 서북쪽 홍천강가에 있는 마을로 전에는 황무지였던 곳이라고 나와 있다. 어디를 기준으로 한 방향인지 알 수 없으나 강으로 둘러싸여 섬처럼 둔덕을 이룬데서 비롯된 듯하다. 마을사람들은 '소깨버덩'을 홍천여중이 들어선 그 일대를 말한다. 그리고 '소옥개'는 홍천여중에서 길을 건너 논두렁 같은 길을 따라 내려오면 유리온실을 설치한 농원이 나오는데 이 일대를 말한다. 황무지였던 '소깨버덩'이 금싸라기 땅이 된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우시장이 '북방 하화계리’로 이전되고 44번 4차선 국도가 뚫리고 주공 임대아파트에 이어 주공2차아파트가 들어서고, 홍천여중이 이전하게 된다. '홍천여중'은 1955년 성여동(지금의 두 개비산 아래 현 홍천여고 자리)에 개교를 한다. 정든 학교를 떠나 갈마곡 시대를 연건 2005년이다. 이와 함께 우시장터에는 신성 미소지움이 들어서면서 황량하던 '소깨버덩'은 베드타운으로 활력을 띄기 시작한다. '닭바우'에서 '닭바우' 만큼 유명한 곳이 있다. 바로 '옻물 샘통'이다. 한여름에는 발이 얼 정도로 시원했고 겨울에는 온천처럼 따듯했다. '옻물 샘통'은 논 한가운데 있었는데 지금의 '닭바우공업사' 자리가 된다. 이 샘통의 물은 화양교(동면다리) 아래 아산병원 앞 강가로 흘러들었다. 따라서 닭바우 배터 아래에는 빨래터가 만들어졌다. 예전에는 이곳이 논이었는데 44번 국도가 나면서 물줄기가 끊어졌고, 기억 속에 잊혀지는가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앞산 중턱에서 샘물줄기를 발견하여 쉼터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닭바우'에서 '송어골'을 돌아내려오면 남산 거북등이다. '송어골'과 '남산골' 사이의 '등대(登臺)'다. 이 산에 시체를 남 몰래 묻으면 가정에 복이 오고 큰 운이 깃든다고 믿어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밤중에 시체를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산의 거북등'에다 시체를 묻으면 홍천지방에 큰 가뭄이 들고 향교의 정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고 한다. '남산의 거북등'은 마치 거북이 모양으로 돼 있어 흥미롭다. 옛날 가뭄이 심할 때는 군수가 '石花山'에 올라 기우제를 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거북이 목에 해당하는 거북이 머리는 44번 국도가 확포장 되면서 잘려 나갔으며, 지금은 밤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골 어귀에는 좋은 약수가 있어 물 받으러 가기도 했다. 거북등을 돌아내려오면 강가에 '화양강'이란 표자석이 서있고 시내로 들어가는 '남산교'가 있다. 다리난간에서 홍천강 얼음축제를 구경한다. 애드벌룬이 둥둥 떠 있고 강변둔치에는 먹거리촌이 섰다. 얼음조각도 볼거리다. 얼음판에선 사륜오토바이가 미끄러지며 달리고 팽이를 치고 썰매를 타고 연을 날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얼음축구가 볼거리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얼음축구에 한창이다. 미끄러지고 자빠지고 팩을 지나쳐가고 그러다 골이 들어갔다. 난리법석이다. 저녁이 되어 얼음판으로 놀러가니 불도 조명도 없다. 밤에 즐길 수 있는 얼음축제는 없을까? 이튿날 '남산교'를 건너 '연봉 나들목'에서 내려 굴다리를 빠져나와 '행화촌'으로 올라갔다. 어귀에 모텔이 있고 길은 '홍남사'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절이 있었다하여 절골이라 했는데 흔히 부르는 지명은 '남산골’이다. 이 골짜기를 두고 연봉에서는 예매골이라 부르는데 애막골을 그리 부르는 듯하다. 최근에는 행화촌이란 음식점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행화촌이 되었다. 왜 이리 많은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남산골'은 옛날부터 천민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백정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백정골'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에 도살장은 지금의 '읍사무소앞 강변'(경동예식장뒤)에 있었는데 남산골에 사는 백정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작업을 했다고 한다. '홍남사'에서 산등으로 올라가 '거북등'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홍천읍내가 수반위에 놓인 꽃 같다. 조망이 참 아름다운 곳이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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