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 사도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主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
기독교 신조 중 가장 초기의 가장 짧은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예배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성찬의 떡과 잔에 참예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또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와같이 말씀하십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1:3)
주 예수(퀴리오스 예수스)- 이 단어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 모두에 대해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 예수, 이 두 단어는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주 예수. 이 단어들은 1) 역사적 예수에 대한 깊은 확신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고백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태어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입니다. 참 사람으로 오신 인간 예수,역사적 실존 인물인 예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2) 또한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개인적 헌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부르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2:9-11은 그 의미를 잘 보여 줍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이것은 초기의 찬송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세 가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1) 바울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주전 200년 경에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여호와'라는 신성한 이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호 퀴리오스'라고 바꾸어 넣었습니다(영어성경-the Lord). 그 단어가 70인경에 6천 번 이상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ㅇ뎨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본문을 예수님께 옮겼습니다.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오순절 날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이 약속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적용합니다. 바울도 그와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의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3) 바울은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예배를 예수님께 드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꼐 무릎을 꿇는 것은 분명히 예배입니다. 기독론 교리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가 있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그리스도 숭배는 우상숭배입니다(아다나시우스).
주 예수님은 우리의 경배를 받으십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 앞이 무릎을 꿂어 기도하고 고백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합니다. 성자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므로,구세주도 되십니다.
주님이란 칭호는 그 분의 발 아래 놓인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상징입니다.우리의 구원은 이 승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주님이시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주'라는 칭호는 소유자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땅의 소유자,어떤 재산의 소유자, 노예를 소유한 사람).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주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철저한 헌신의 고백입니다.
이 헌신의 고백을 네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마음을 다스려 달라는 고백이요 헌신입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주십시요.
주님, 우리의 생각을 다스려 주십시요.
주님, 우리의 지성을 통치하십시요.
주님, 우리 인격의 중심에 자리 잡고 다스려 주십시요.
주님은 우리의 지성의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식에 있어서도 새로와져야 합니다.
(2)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기준을 받아들인다는 고백입니다.
주님, 주님의 계명을 기꺼이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우리는 순종으로 주님의 주되심을 증거합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의 훈련을 받으며 성화의 길을 걷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나의 도덕적 기준으로 삼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순종은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식입니다.
(3)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주님께서 나의 손과 함께 계시옵소서.
가정에서는,주님께서 나의 마음과사랑 안에 계시옵소서.
장사를 할 때는,주님께서 나의 책상과 거래 가운데 계시옵소서.
의료인으로 환자를 치료할 때는,주님께서 나의 기술과 솜씨 안에 계시옵소서.
공부할 때는,주님께서 나의 지성과 성장 가운데 계시옵소서.
문학작품을 쓸 때는,주님께서 나의 상상력과 나의 작품 가운데 계시옵소서.
오락에서는,주님께서 나의 손발과 여가시간 안에 계시옵소서.
주님, 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말라"(골 3:23)
(4) 이웃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고백이요 헌신입니다.
주님, 주님이 세우신 가정에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일터에서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주님, 공무원으로서 국민의 공복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님, 기업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유익한 제품을 만들겠습니다.
주님,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는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 주님이 돌아보시는 소외된 사람,배고픈 사람,병든 사람,갖힌 사람을 돌아
보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관심을 가지신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화란의 수상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자유대학 개교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 중 단 일 센티미터라도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부르짖지 않으시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다스리는 모든 영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 사회 속에서도,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쳐야하고 지켜야 합니다.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인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건강한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억울한 사람,부당하게 억압받는 사람이 없는 살히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사회가 보다 더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단지 우리의 신앙생활, 가정생활, 교회생활의 주님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에게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당연한 권세와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도, 그 고백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 고백의 깊은 의미를 잊고 삽니다. 여전히 내가 삶의 주인입니다.
맺는말
주 예수라는 고백은 삶의 주인을 바꾼 그리스도인의 첫번째 신앙고백입니다.
주 예수라는 고백은 옛사람의 세계관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배우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 대한 철저한 헌신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이 고백은 주님이 삶 전체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키우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들을 지도자로 훈련시키십니다.
로버트 클린턴은 그의 저서 [영적 지도자 만들기] 저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효과적으로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려면 인격형성이 우선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인격을 형성시키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기록된바와 같이,소년 요셉은 장성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대로 그의 생애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인도하셨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들이고 지도자로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가 될 사람은 대개 어떤 형태이든 약간의 훈련을 받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속사람 개발에 초점을 두고 지도자를 키우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먼저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지도자 양육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성숙하고 성령 충만한 일꾼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와 교회는 하나님의 일꾼을 요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선하고 유능한 지도자를 원합니다.
우리는 요셉을 키우신 하나님의 섭리에서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요셉은 생애 전반을 통하여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과정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교육과정 속에서 늘 배울 수 있습니다.
특별한 위기 상황이나 심각한 때에는 매우 중요한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통한 성공]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자신이 읽은 책과, 자기가 만난 사람과, 우연한 사건들로부터 배우려는 습관을 길렀다"(W. 클레멘트 스토운)
요셉은 크게 세 가지 훈련을 받았습니다.
1) 요셉은 섬김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노예의 옷을 입고 땀과 노동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훈련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어려운 환경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규학업을 받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경험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종종 시련은 우리를 훈련하는 조교와 같습니다.
2) 요셉은 절제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은 자기를 통제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10대 소년의 몸으로 종살이를 시작한 요셉입니다.
많은 유혹 앞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한 젊은이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거절할 것을 거절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모든 영적 지도자는 자기훈련을 거친 사람들입니다.
모든 영적 지도자는 실패로부터 배웁니다.
3)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기다리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요셉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때를 기다리는 것은 일종의 순종입니다.
순종은 지도자의 필수과목입니다.
이것은 또한 신뢰와 인내의 훈련입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끝까지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리고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스티븐 코비에 의하면,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세 단계를 거친 사람들입니다.
a. 의존적 단계- 타인중심의 패러다임입니다.
b. 독립적 단계-자기중심적 패러다임입니다.
c. 상호의존적 단계- 가장 수준 높은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애 전반을 통하여 지도자를 키우십니다.
지도자에게는 발달과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체적 성장을 경험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지적으로 성장하고 정서적으로 성숙해집니다.
2. 요셉은 말씀의 단련을 통해 바른 성품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모든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격과 성품의 집을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위한 장기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통찰력이 있을 때, 개인의 생애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육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성품들의 경향이 형성됩니다. 개성적인 성품형성이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장과정 중에서 겪은 여러 경험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급하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지도자를 키움에 있어서 그분의 최대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우리 각 사람을 다듬는데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영적 지도자의 가장 큰 과제와 도전은 경건한 성품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꾼다운 인격을 갖추는 일입니다.
인격이란 무엇입니까? 캠벨 몰간이 대전도자 무디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사람이 어두운 곳에 혼자 있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바로 인격이다"
어떤 사람은 인격의 본질은 '진실성'이라고 말합니다.
이 '진실성'은 인격의 중심부입니다.
다니엘서 1:18-21은 다니엘이 거친 진실성 검증을 잘 보여줍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충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결단입니다. 이때 다니엘은 10대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내면의 진실성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우리의 신념은 가치관에 의해 결정됩니다. 유혹은 그 신념을 시험합니다.
핍박은 견고함을 시험합니다. 우리는 충성심과 정직성의 시험도 통과해야 합니다.
진실성은 효과적인 지도력의 초석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진실성을 잃을 때,그는 영적 권위도 잃게됩니다. 진실성은 초기 단계부터 지도자의 인격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요셉은 진실했습니다. 또한 그는 말씀을 통해 훈련과 양육을 받았습니다.
경건한 지도자는 하나님말씀을 사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부지런히 먹입니다.
로버트 클린터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떠오르는 지도자를 개인적으로 인도할 때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하신다.
이런 경험은 장차 집단을 위한 안내 지침을 받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도하는 자연스런 디딤돌 경험이 된다."
클린턴은 지도가가 거치는 세 가지 검증을 말합니다.
그것은 진실성 검증, 순종 검증, 그리고 말씀 검증입니다.
왜 이런 검증을 거쳐야 합니까?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란 하나님께서 주신 역량과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를 다함으로써 추종자들로 하여금 그 집단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어쨌든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처음에 인성개발, 인격개발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훈련계획에 따라 바른 성품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형들을 용서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를 고백합니다(창 45:4-5,8)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수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8)
[지도자에게서 배우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안목을 갖고 있다. 하나님을 만난 이래로 그 동안 가졌던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을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일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눈을 철저하게 개발한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훌륭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또한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영적 전망을 소유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일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인격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믿는 지도자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 전체를 주장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전에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키우십니다.
우리가 읽는 좋은 책을 통해 영향을 끼치십니다.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우리의 진실성을 시험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일꾼이 되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하나님의 사람다운 성품과 인격을 개발하는데 초점을 맞추십시오.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해낼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맡기시기 전에 우리를 먼저 훈련시키고 키우십니다.
하나님의 훈련계획을 잘 따를 때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이 되려는 비전을 품으십시오.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의 다른 점을 보고 배우십시오.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 작은 것부터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다듬어진 인격을 소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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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 (행 2:43-47)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갖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들어가는 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셨는데 생겨난 것은 교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와 교회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8-19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음부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천국(하늘나라)열쇠를 네게 주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인간 공동체입니다.
1)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2) 하나님나라는 교회를 창조합니다.
3)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증거합니다.
4)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도구입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보여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왔습니다. 그러나 남김없이 온 것은 아닙니다.
그 나라의 완성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현재의 사건으로 간주했고 또 그렇게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한 자>는 무장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늑탈하리라"(마 12:28-29)
이미 하나님나라는 사람들 안에 혹은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나라를 받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미래의 하나님나라도 말씀하십니다. 그 나라는 마지막 날에 가서야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종말을 고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말을 고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해야 했습니다(마 6:10).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우선 과제는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어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씨와 마찬가지로,하나님나라는 이미 세상에 심기워졌습니다. 이제 그것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활동에 의해 자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자라게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려고 죽으셨습니다(갈 1:4).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이미 새시대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옛시대도 계속 존속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옛시대는 끝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새시대는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두 시대가 진행되는 동안,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그러므로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공스러운 해방을 기다립니다. 아직 우리는 악과 고난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와 <아직>을 함께 강조합니다. <이미>만 강조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직>만 강조하는 사람은 우울한 비관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미-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모두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분이 하신 일과 그 분이 하실 일을 똑같은 비중으로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제 하실 일을 기대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균형잡힌 성경적인 신앙'입니다. 이러한 기독교를 죤 스토트는 <균형잡힌 성경적 기독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전쟁터에 있습니다. 우리는 최종적 승리를 확보해 놓고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D-Day를 기뻐하면서 V-day를 고대하는 그리스도의 군병들입니다. 우리는 돌이켜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미래의 재림을 소망하며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전사들입니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승리를 확보한 승자들입니다. 사실상 사탄은 이미 십자가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항복 선언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끝난 싸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사탄의 항복선언을 듣는 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가 결정되는 날을, 그 승리가 완성되는 날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느낍니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전입니다. 교회는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입니다. 교회는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사랑과 평화의 안식처입니다.그런데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체험이 없는 예배(예배를 통한 초월 경험)
오늘날 예배에서 엄위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도 못하고 기대하지도 않는 예배 자세가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져보게 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배는 하나님께 절하는 심정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개신교 예배의 중심은 말씀 선포였습니다.
그러나 본래 예배는 단순히 '설교 듣는 시간'만은 아닙니다.
예배에서 삼위하나님을 만나 뵙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린다면,
우리는 예배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 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한 몸이 된 것을 확인하고 체험합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소망을 소유하고 있음를 거듭 발견합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영적 연대의식, 신령한 유대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의 권속으로서의 특권을 누립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영적 재충전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예배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까?
깨어진 자아가 되어 주님의 은혜에만 의지하고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적 예배의 질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배당 안에 앉자 있고 모든 순서에 따르고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 앞에 서있지 못합니다.
예배 체험이 없습니다. 어느 동화작가인 집사님은 수 십년 동안 그러한 예베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배한다고 말하지만,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그 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예배를 모릅니다. 우리는 때때로 경박하게 예배드립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보는 대신, 우리는 따분한 예배를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보고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라고 외치면서 엎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생길 수 있을 정도로 진지하게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마약과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운동과 공상과학 소설이 줄 수 없는 것을 예배 경험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약이 남용되고 사람들이 동양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것은 모두 그들의 영적 굶주림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던 사람들은 그 어둠을 떠나 교회공동체로 찾아올 것입니다.
(2) 교제(코이노니아)가 없는 교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생겼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거룩한 사귐입니다. 신령한 코이노니아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고 또 합니다.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없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코이노니아를 믿는다는 중요한 고백입니다. 이것은 코이노니아의 삶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는 이 점이 매우 약합니다.
1978년 가이아나 정글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정글의 존스타운에서 한 사교집단의 집단 자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저술가이며 영화 제작자인 메 화이트는 그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그 연구 조사 후 <기만>이라는 책과 영화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는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집단에서 빠져나온 사람들과 집단 자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교회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었다. 교회에 갔지만 아무도 내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18세까지 교회에 다녔다. 그런데 아무도 나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다."
소위 이단에 몸담은 사람들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 집단 안에서 주는 따뜻한 관심과 공동체적 소속감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돌보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우리를 껴안아 주고 우리를 환영했다. 그러고는..우리가 다시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멜 화이트는 8가지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첫번째 해결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의 교회가 교인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을 위해
더 사랑에 찬 공동체가 되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맺는말>
성경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교회에 관해 말할 수 있습니다.
1)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입니다.
2) 교회는 삼위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존재합니다.
3) 교회는 주님의 임재와 사역이 이 세상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4)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보여주는 중생한 신자들이 모인 단체이어야 합니다.
5) 비록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이지만,
교회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을 체험하는 예배공동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서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용납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용서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마땅히 성도의 코이노니아가 존재하는 공동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한 교회공동체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공동체만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설득력 있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