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마침표이자 쉼표. 정들고 익숙한 것과의 헤어짐. 새로운 세계로 나서는 발걸음. 이럴 때는 축하하면서도 왠지 진한 아쉬움이 뒤섞이는 것이 인지상정. 예전에 썼던 시에 나는 이렇게 썼다. “사랑은 낯설음에 대한 가슴 설렌 동경과 낯익음에 대한 기쁜 확인”. 사랑이었으리. 이젠 세월 저 너머로 보내는 기억들이지만, 소중한 인연과 만남의 뜻을 새긴다. 내가 존경하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그리고 길고 긴 시이지만, ‘누님’의 자리에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번 읽어 보라고 시 한 편을 건넨다. 김용택의 섬진강4, 누님의 초상.
아마도 많이 그리울 것 같구나.
해봄의 창
최명주
섬진강 4
ㅡ 누님의 초상
김용택
누님.
누님들 중에서 유난히 얼굴이 희고 자태가 곱던 누님.
앞산에 달이 떠오르면 말수가 적어 근심 낀 것 같던 얼굴로 달 그늘진 강 건너 산속의 창호지 불빛을 마루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던 누님.
이따금 수그린 얼굴 가만히 들어 달을 바라보면 달빛이 얼굴 가득 담겨지고, 누님의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그 그렁그렁 한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누님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왠지 나는 늘 그랬어요.
나는 누님의 어둔 등에 기대고 싶은 슬픔으로 이만치 떨어져 언제나 서 있곤 했지요.
그런 나를 어쩌다 누님이, 누님의 가슴에 꼭 껴안아주면 나는 누님의 그 끝없이 포근한 가슴 깊은 곳이 얼마나 아늑했는지 모릅니다.
나를 안은 누님은 먼 달빛을 바라보며 내 등을 또닥거려 잠재워 주곤 했지요.
선명한 가르맛길을 내려와 넓은 이마의 다소곳한 그늘, 그 그늘을 잡을 듯 잡을 듯 나는 잠들곤 했지요.
징검다리에서 자욱하게 죽고 사는 달빛, 이따금 누님은 그 징검다리께로 눈을 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듯했지요.
강 건너 그늘진 산속에서 산자락을 들추며 걸어 나와 달빛 속에 징검다리를 하나둘 건너올 누군가를 누님은 기다리듯 바라보곤 했지요.
그러나 누님.
누님이 그 잔잔한 이마로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누님 스스로 징검다리를 건너 산자락을 들추고 산그늘 속으로 사라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을 세월이 흐른 후, 나도 누님처럼 마루 기둥에 기대어 얼굴에 달빛을 가득 받으며 불빛이 하나둘 살아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누님이 그렇게나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며 그냥 흘러가는 세월과 흘러오는 세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나도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헤어져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이며 아픔과 괴로움을 겪었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고 또 무엇인가를 기다렸는지요.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아픔과 슬픔인지요, 누님.
누님, 누님의 세월, 그 세월을, 아름답고 슬픈 세월을 지금 나도 보는 듯합니다.
누님, 오늘도 그렇게 달이 느지막이 떠오릅니다.
달 그늘진 어둔 산자락이 누님의 치마폭같이 기다림의 세월인 양 펄럭이는 듯합니다.
강변의 하얀 갈대들이 누님의 손짓인 양 그래그래 하며 무엇인가를 부르고 보내는 듯합니다.
하나둘 불빛이 살아났다 사라지면서 달이 이만큼 와 앞산 얼굴이 조금씩 들춰집니다.
아, 앞산, 앞산이 훤하게 이마 가까이 다가옵니다.
누님, 오늘밤 처음으로 불빛 하나 다정하게 강을 건너와 내 시린 가슴 속에 자리 잡아 따사롭게 타오릅니다.
비로소 나는 누님의 따뜻한 세월이 되고, 누님이 가르쳐준 그 그리움과 기다림과 아름다운 바라봄이 사랑의 완성을 향함이었고 그 사랑은 세월의 따뜻한 깊이를 눈치 챘을 때 비로소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님, 오늘밤 불빛 하나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아 있는 뜻을 알겠습니다.
누님, 누님은 차가운 강 건너온 사랑입니다.
많은 것들과 헤어지고 더 많은 것들과 만나기 위하여, 오늘밤 나는 사랑 하나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 불빛을 따뜻이 품고 자려 합니다.
누님이 만나고 헤어진 사람을 사랑하며 기다렸듯 그런 세월, 그 정겨운 세월…….
누님의 초상을 닦아 달빛을 받아 강 건너 한 자락 어둔 산속을 비춰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