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렌 지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누가 묻거든>(1989) -
≪구토≫에서
조금 아까 나는 공원에 있었다. 마로니에 뿌리는 바로 내가 앉은 의자 밑에서 땅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것이 뿌리였다는 것이 이미 기억에서 사라졌다. 어휘가 사라지자 그것과 함께 사물의 의의며, 그것들의 사용법이며, 또 그 사물의 표면에 사람이 그려놓은 가냘픈 기호가 사라졌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는 숙인 채로 나는 혼자서 그 검고 울퉁불퉁하고 마디가 져서 내게 공포심을 주는 나무 더미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그 계시를 받은 것이다.
그것이 나의 숨을 멈추게 했다. 3,4일 전만 해도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결코 예감하지 못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 봄옷을 입고 바닷가에서 거니는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그들처럼 “바다가 푸르‘다’. 저기, 저 높은 곳에 있는 흰 점, 그것은 갈매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점, 갈매기가 ‘존재하는 갈매기’라는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존재는 숨어 있다. 그것은 여기 우리들 주위에, 그리고 우리들 내부에 있다. 그것은 즉 ‘우리’이다. 존재에 관해서 말하지 않고는 무엇 하나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존재에 손을 댈 수는 없다. 내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믿었을 때, 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믿어야 옳다. 나의 머리는 비어 있었다. 혹은 꼭 한마디가 머릿속에 있었다. ‘이다’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뭐라고 말할까? 나는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가 초록색 물건의 계급에 속해 있다고, 또는 초록색이 바다의 성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조차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물은 무슨 장치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들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은 도구로서 쓸모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의 저항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표면을 스쳐갔다. 만약 존재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물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외부에서 와서 사물의 성질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 채로 부가되는 공허한 형체일 뿐이다,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젠 달라져버린 것이다. 갑자기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대낮처럼 분명했다. 존재가 갑자기 탈을 벗은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 범주에 속하는 무해한 자기의 모습을 잃었다. 그것은 사물의 반죽 그 자체이며, 그 나무의 뿌리는 존재 안에서 반죽된 것이다.
[......]
무릇 물체들, 그것들이 사람들을 ‘만져’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을 정리하고, 그 틈에서 살고 있다. 그것들은 유용하다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를 만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마치 그것들이 살아있는 짐승들인 것처럼 그 물체들과 접촉을 갖는 게 나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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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집은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고 이 시를 지었음에 틀림없다.
'나'라는 주체와 '오렌지'라는 대상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대등하다. 내가 주체라면 오렌지라는 대상을 '음식'으로 삼아 포들한 껍질을 벗겨 찹잘한 속살을 먹어댈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그것을 음식으로 삼으라 허락했는가? 혹시 그것은 미술 시험장의 데생거리는 아닌가? 음식 삼아 먹었다가는 날 낙방시키는 두려운 존재일 수도 있다. 오렌지의 맹폭에 내가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황과 맥락의 변화에 따라 이처럼 관계는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내가 '존재'라는 근원에서 만나면 더이상 그것은 대상일 수 없다. 감히 손댈 수 없는 것이다. 더이상 '이름'지어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존재, 그래서 그것은 두려운 존재다. 이제 거꾸로 그것이 나를 만진다. 나와 그것은 뒤엉킨다. '반죽'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물의 이름을 잃는 순간, 도구 또는 무대장치이었던 대상은 졸지에 무너진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엄습한다. 그가 나를 노려본다. 포들한 껍질과 찹잘한 속살이던 것이 '시선'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시선'은 '눈'이 아니다. 대상화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잡히지 않으면서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대상 삼아 함부로 대하던 모든 것의 근원은 '존재함'이다. 오직 상황과 맥락에 어울리는 만남, 구체적인 체험만이 있을 뿐이다. 온갖 존재자의 시선을 느낄 일이다. 그때, 그것은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내가 지금-여기서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한다. 겸허히, 조심스레 다가갈 일이다. 그럴 때에만 '어진 그림자'와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