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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산책 스크랩 파블로 카잘스 ( P. Casals ) Vc
Yongseok CHOI 추천 0 조회 48 09.02.11 17: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1876 - 1973  

 

내가 20세기의 연주가 중 10명을 골라야 한다면, 아마 족히 하루는 생각해야 할 것이며 결과에 객관성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명만 고르라면 의외로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역사적인 중요성과 연주력, 오랜 연주 경력과 다른 연주가들에게 미친 영향을 객관적으로 고려한다면, 나는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외의 다른 사람을 말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작곡가 드보르작이 했던 불평인 "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중음역은 훌륭하지만 저음역은 웅웅거리기만 하며 고음역은 코먹은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란 말을 20세기적인 의미에서 처음 극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CASALS, Pablo(29th Dec. 1876~22nd Oct. 1973 ) ◀ 담배 피는 카잘스. 그는 평생 파이프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 첼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이상 이름을 들어보았을 카잘스는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카탈로니아(Catalonia)의 벤드렐 태생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라면 김주은 님의 대단한 카잘스 사이트(http://www.happychron.com/casals/index.shtml)를 참고하는 편이 나으니 생략하기로 하고, 그의 음악을 듣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사건 몇 개만 언급하는 편이 간단할 것이다. 첫째로 중요한 일은 단연 첼로 주법의 개혁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자신의 말을 "앨버트 E.칸에 이야기한 나의 삶(Ma vie racontee Albert E. Kahn)"에서 인용하면(아쉽게도 요즘 한국어 번역판이나 영어판 모두 절판이라고 한다) 바르셀로나의 학교에 있을 무렵, 나는 그때까지 교습 받아온 첼로 주법에 어떤 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겨우 12세에 불과했지만 어떤 사물에 관해서는 어린아이에게도 분명한 통찰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첼리스트들이 뻣뻣해진 팔과 팔꿈치를 옆구리에 꼭 붙이고 연주하는 방법이 왠지 불편하고 부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사실 우리는 첼로 연습을 할 때 활을 쥔 팔 겨드랑이에는 책을 끼고 했던 것이며, 그것이 나에게는 어리석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연습할 때는 팔을 자유롭게 하고, 억지로 만든 꽉 조이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 방법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또한 핑거링과 왼손의 동작에도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느꼈다. 그 당시에는 음을 짚을 때 손을 모으고는 그것을 끊임없이 아래 위로, 손가락으로만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나는 손을 쫙 펴고 멀리까지 늘려 보았다. 그랬더니 그때까지 모든 연주자들이 3도까지밖에 짚지 못하던 것이, 손을 움직이지 않고도 4도를 짚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내가 학교에서 그러한 나의 새로운 연주법들을 적용하기 시작하자 학생들 간에 소요가 일었고 선생님도 처음에는 매우 놀랐다. 그러나 그는 매우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설명하자 이상하게 보이는 나의 연주법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쨌든 오늘날에는 아무도 첼로를 배울 때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배우지는 않는다. 이런 공적 때문에, 그를 '현대 첼로 주법의 완성자'나 '현대 독주 악기로서 첼로가 갖는 높은 위치를 비로소 확립한 인물'로 평가한다. 이 공적을 당대의 사람들도 금방 깨달았다. 위 인용의 첫 문단에서 암시만 되어 있지만, 그는 실제로 첼로의 활 쓰는 방법(운궁법)을 완전히 바꿔 놓았을 뿐 아니라 그 합리적이고 예술적인 사용으로 '활의 왕자'로 불렸다. 첼리스트들 뿐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들까지 그의 운궁법을 참고했다고 한다. 이런 연주력 때문에 그는 곧 후고 베커(Hugo Becker)등 당시의 쟁쟁한 다른 첼리스트들을 가려 버리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역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재발견을 들 수 있다. 사실 이 곡이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으며 당대의 명 첼리스트들이 가끔씩 연주해 왔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처럼 첼로의 스탠다드 레파토리에 넣고 훌륭한 예술성을 대중에게 인식시킨 공로는 오로지 그에게 돌려야 한다. .. 그리고 우리는 부두 근방의 오래된 악보 상점에 들어갔다. 나는 많은 스코어들을 여기저기 훑어보기 시작했다. 불현듯 낡고 색이 바랜 한 묶음의 스코어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첼로를 위한 무반주 모음곡'이었다!. 나는 놀라움으로 스코어를 읽었다. 첼로를 위한 여섯 개의 모음곡. 그 제목 속에는 어떤 마술과 신비가 숨겨져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결코 모음곡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고 아무도, 나의 선생님들조차, 그 곡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모음곡들을 마치 왕관에 달린 보석들처럼 가슴에 꼭 안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서는 내 방에 들어가 그 음악에 빠져 들었다. 나는 그 음악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때 나는 13세였지만, 그후 80년 동안 그것을 처음 대했을 때의 놀라움은 언제나 생생하게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 곡은 전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나는 그 곡을 억누를 수 없이 흥분하여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곡은 이제 나의 가장 귀중한 음악이 되었다. 나는 그 후 12년 간 매일매일 그 곡을 연구하고 공부했다. 정말로 12년이 지나고 내가 25살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 중의 한 곡을 청중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 EMI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 LP. 사진은 Erich Auerbach. 그는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은 한 번만 녹음했지만 베토벤 소나타는 전곡을 두 번 녹음했는데, 이 사진은 HMV 첫 녹음의 Dacapo 재발매 자켓이다. 1,2,4,5번은 호르쇼프스키가, 3번은 슐호프가 피아노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실내악에 대한 공적을 뺄 수 없다. 젊을 때엔 하루에 두 번 연주회를 열었을 정도로 바쁘게 지냈지만, 공식 연주 시즌이 끝나는 여름에 1개월간 당시의 최대의 떠오르는 별들인 피아노의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 바이올린의 자크 티보(Jacque Thibaud)와 일정을 맞춰 트리오 활동을 하기로 1905~06년 합의했을 때, 이들의 명성은 1933년까지 계속한 이 활동으로 결정적으로 높아졌다. 거장 세 명이 오프 시즌에 모여 연주하는 트리오의 매력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대중은 이 트리오 덕에 처음 인식했다는 평도 듣는다. 다행히 레코드가 제법 남아 있지만, 아쉽게도 전기 녹음 초기인 1920년대 말이라 음질은 꽤 낡았다. 이 트리오는 실질적으로 코르토가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하는데, 1930년대 초반이 되자 더 이상 각자의 스케줄을 맞추기가 어려워졌고 조금 후 카잘스가 프랑스 프라드(Prades)로 은거하자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카잘스 트리오 항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EMI에서 트리오 전집을 발매했을 때 장 루비에(Jean Loubier)가 쓴 훌륭한 불어 해설을 내가 직접 번역했다. ◀ EMI의 최근 발매된 바흐 무반주 모음곡 음반. Pearl이나 Naxos 등 전문 복각 회사에서도 많이 내놓았다.  그의 음반은 1915년부터 있다고 하는데, 첼로 연주와 지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총 목록을 보시려면 역시 위에 소개한 김주은 님의 페이지에서 보면 되고, 가장 유명한 음반은 아무래도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 6곡(1936~39년, EMI)을 들어야 할 것이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음반을 '랩소딕한 해석'이라 말했는데, 사실 매우 풍부한 표현으로 가득하다. 이 음반은 아마 고전음악 레코드들 중 유명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지 않나 싶다. 카잘스의 체코 연주회 후 지휘자 조지 셀이  제안해서 성립되었다고 하는 드보르작의 협주곡(EMI, 1938년)도 굴곡이 매우 큰 연주가 인상적이고(아쉽게도 녹음은 연도를 고려해도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트리오 녹음들은 베토벤 '대공'을 포함해 다섯 곡이 있는데(EMI, 1926~29년) 그들의 낭만적인 음악을 잘 알 수 있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 5곡과 브람스 첼로 소나타 2번이 HMV(현 EMI)에 남아 있으며(1930~36), 브람스의 2중 협주곡(1929년)과 보케리니 협주곡(1936년; 아직 EMI 본사에서 CD로는 발매하지 않았다), 브루흐 '콜 니드라이'와 2차 대전 직후의 엘가 협주곡(1945년)을 합하면 전성기였던 78회전 음반 시절의 중요한 음반은 거의 모두 EMI가 CD로 발매해 놓았다. 그 이후는 주로 미국 Columbia에서 녹음했는데, 아마 부다페스트 4중주단의 제 2 바이얼리니스트며 그와 매우 친했던 알렉산더 슈나이더(Alexander Schneider)의 영향일 것이다. 그는 프라드에서 은거하던 카잘스를 1950년의 바흐 200주기를 기념하여 프라드 페스티벌을 열어서 공개 연주회로 다시 불러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녹음은 오히려 지휘가 더 많은데, Sony의 카잘스 에디션으로 CD 약 10여 장 정도로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다. 루돌프 제르킨과 베토벤 소나타 5곡 재녹음, 브람스 6중주곡 1번, 슈만의 첼로 협주곡(지휘는 오먼디), 앙코르집, 여러 실내악곡 등 유명한 예술가들과 같이 한 실황 녹음이 많다. 독특한 연주회로는 케네디가 초청하여 백악관에서 한 연주회(1961년 실황)가 있다. 원반에는 카잘스 자신이 자신의 일생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인터뷰가 들어 있는데, 아쉽게도 국내 라이선스로 나올 때는 빠졌다. 일제 CD에는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동시대인들이 그를 어떻게 보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 충분하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 그에 대해 카잘스는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지휘자다"고 말했다 - 카잘스에 대해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현악기가 어떻게 울릴 수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EMI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의 해설에서 지그루트 쉼프(Sigrud Schimpf)가 쓴 말은 다음과 같다. "...표현을 위한 이런 큰 요구가 그 자신의 기술적 매체를 창조하고, 지금은 카잘스에게 첼로 연주의 역사에서 파가니니와 리스트가 바이올린과 피아노에서 차지한 자리를 주었다 - 사실, 아마도 더 높을 것이다. 왜냐하면, 카잘스는 사실 첼로가 진지한 독주 악기라는 확실한 인식을 처음 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 Photos EMI 1C 147-01 538/9(2LP) ; Electrola Dacapo series release US Amazon(EMI GR series) 다른 사진들 ; 밑에 소개한 김주은 님의 페이지에서 많은 사진을 볼 수 있다. Links A personal fan page ; http://www.happychron.com/casals/index.shtml (Ms. Ju-Eun Kim) - 한국어지만 현재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다.

 

 

카잘스 [Casals, Pablo(Pau), 1876.12.29~1973.10.22]   


 [백과사전]-에스파냐의 첼리스트.  
국적  에스파냐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에스파냐 카탈루냐지방 벤들렐

카탈루냐지방 벤들렐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에게서 음악교육을 받고 11세 때 바르셀로나음악원에 들어가 J.가르시아에게 첼로를 배웠다. 그리고 1889년 바르셀로나에서 데뷔, 실내악 연주자로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파리 오페라극단의 독주자가 되고, 1897년에는 바르셀로나음악원의 교수에 취임하는 한편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였다. 1898년 파리의 라므르관현악단과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에 출연하고, 1901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 무렵 A.코르토, J.티보와 함께 20세기 최고라는 말을 들은 3중주단을 결성하고, 1919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카살스관현악단을 설립하여 지휘자로서도 활약, 이 악단을 이끌고 파리를 비롯한 유럽 및 아메리카 각지를 순회 연주하였다.

1936년 에스파냐내란 이후는 프랑코정권에 항거하여 주로 런던에서 연주활동을 계속하였으며, 프랑코정권을 승인한 나라에서는 연주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에스파냐 국경에 가까운 피레네산록의 프랑스의 소도시 프라드에 살면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50년 바흐의 200년제를 계기로 연주활동을 재개하고, 그 해의 바흐제를 주최한 이후부터 해마다 음악제를 개최, 세계적인 이목을 모았다.그는 ‘현악기의 왕자’라고 일컬어지며, 현대의 첼로 연주법은 그에 의해 이루어지고 현대의 연주계에서 첼로가 차지하는 높은 지위 역시 그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을 비롯하여 고전 및 낭만파의 첼로 명곡은 거의 그에 의하여 부활되고, 이러한 공적은 후세에 길이 남을 것이다.

                                                        ***

                          첼로의 성자(聖子),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카잘스는 187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남쪽에 있는 카탈로니아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고 카잘스는 열한 살까지 오르간과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그 다음으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첼로를 배웠다.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에 간 카잘스는 벌써 뛰어난 연주가였다. 그가 첼로를 최초이자 거의 마지막으로 남에게 배운 것은 그의 나이 열 살 때 호세 가르시아에 의해서였다.

  내가 처음 첼로 소리를 들은 것은 호세 가르시아의 연주를 들은 당시였다. 그 이전에는 그런 악기를 본 적도 없었다. 첫 악장 첫 번째 음이 나오는 순간 나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 그야말로 인간적인 소리였다. 연주회가 끝나자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저거야말로 내가 연주하고 싶은 악기예요」 그때부터 평생 동안 나는 첼로와 같이 살고 말았다.

   이때부터 카잘스는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호세 가르시아에게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카잘스의 연주 실력은 대단했다. 아직 어렸던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카페 토스트>라는 선술집 겸 도박장에서 연주를 했는데 당시 <카페 토스트>의 단골 손님 중 하나는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술집을 콘서트 홀로 바꿔놓았고, 급기야 그 콘서트홀을 사원으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그러던 중 어린 카잘스의 연주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은 스페인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이 그를 왕궁에 초빙하여 연주를 하게 하였고, 그에게 첼로 '갈리아노'를 하사했다. 그는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서 호세 가르시아에게 사사 받았으며 마드리드 음악원을 나왔다. 이 당시 카잘스는 그의 선생에게 배운 주법보다도 자신이 만들어낸 운지법이 훨씬 연주하기 쉽고 좋은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후로는 이 새 주법의 발견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만약 카잘스라는 첼로의 성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첼로는 지금과 같은 화려한 솔로 악기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파블로 카잘스와 첼로의 성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첼리스트 카잘스를 말할 때 그가 첼로의 새로운 운지법을 고안해냈다는 것 말고,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만남이다.

  그날 아버지는 나에게 처음으로 풀사이즈의 첼로를 사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부둣가의 오래된 악보 상점에 들렀다. 많은 스코어(score: 악보)들을 여기저기 훑어보다가 우연히 낡고 색이 바랜 한 묶음의 스코어를 발견했다. 아, 그것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다.…나는 마치 왕관에 달린 보석들처럼 그 악보를 품고서 돌아와 방에 처박혔다. 그리고 몇 번이고 계속 탐독했다. 그때 내 나이 열세 살이었지만 그후 80년 동안 그것을 처음 대했을 때의 놀라움은 항상 생생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다. 나는 말로써는 다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며 이 곡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12년간 매일 밤 그 곡을 연구하고 연습했지만 그 중 한 곡이라도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주해도 되겠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알버트 칸, 『나의 기쁨과 슬픔, 파블로 카잘스』>

  무려 200여 년간이나 먼지 속에 잠들어 있던 바흐의 걸작『무반주 첼로 모음곡』악보를 거리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둘은 항상 붙어 다녔고 이 곡으로 인해 카잘스는 첼로의 마에스트로가 되었지만 카잘스로 인해 이 곡은 첼로의 성서가 되었다. 첼로가 지니고 있는 깊은 표현력을 최대한 활용한 바로크 음악의 정수인 이 곡에 대한 카잘스의 열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카잘스는 이 곡을 발굴한 지 47년, 공개로 연주한 지 35년이 지난 1936년, 그의 나이 60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음을 했다.『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래서 1936년부터 39년까지 3년 동안에 녹음되어 전 3매 전집으로 발매되었다.

  가르시아의 지도로 첼로를 익히기 3년만에 그는 벌써 스승을 능가하는 첼리스트가 되었고, 1898년, 친구이자 작곡가인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첫번째 오페라 「카르멜파의 마리아」의 리허설 지휘를 맡으며 지휘자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당시의 그는 지휘자로서보다는 첼리스트로서의 활동을 많이 했다.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그에게 당시 유럽을 휩쓴 제1차세계대전의 대살육은 그를 자살 직전까지 몰고 갈 정도로 절망하게 했다.

  파리는 많은 뛰어난 작가들, 화가들, 음악가들이 모이는 예술 활동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카잘스는 화가인 드가(Degas),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작곡가 라벨(Ravel)과 생상(Saint-Saens), 그리고 카잘스가 유명한 몇몇 초기 녹음을 함께 했던 음악가 이자이(Ysaye), 티보(Thibaud), 코르토(Cortot) 등과 사귀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음악가이자 위대한 인간이었던 카잘스

  카잘스는 파리에서 연주하랴, 관광하랴, 친구들과 사귀랴 매우 바빴지만, 다른 방면의 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인생 철학도 발전시켰다. 그는 어떻게 웃는가, 행복한가를 알고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진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경력,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릴리안 리틀해일스(Lillian Littlehales)가 자신의 책에서“카잘스는 인류의 정신 생활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졌으며, 종교적, 사회적인 질문들에 대한 그의 감상적인 마음은 거의 위험한 수준이다.”라고 썼을 정도였다.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카잘스 역시 정신의 깊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었던 한 젊은이였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심지어 자살까지도 고려했다. 리틀헤일스는 또한 카잘스가‘계시록’으로 받아들였던 칼 맑스(Karl Marx)의 저작들도 읽었다고 쓰고 있다.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파시즘 또는 다른 어떠한 폭정에 의해 저질러지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억압에 분연히 항거할 것을 결심했다. 마침내 그는 그의 지적이고 정신적인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정신적 방황과 연구는 형성기였으며, 그 자신의 인생에,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미쳤다. 1958년에 국제연합의 총회장에서 카잘스가 그의 첼로를 연주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향인 카탈로니아 지방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그는 1919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사재를 털어 바르셀로나 카잘스 관현악단을 조직한다. 그는 관현악단의 운영비를 자신의 첼로 연주로 나오는 개런티로 메우며, 세계적인 작곡가와 지휘자들(쇤베르크, 프로코피예프, 클렘페러, 앙세르메 등)을 초빙해 연주하여 그의 관현악단은 꾸준히 성장해 간다. 그의 이런 활동들은 애향심의 발로이기도 했으나 음악은 특정인의 것이 아니라 만인의 것이라는 카잘스의 음악관에 따른 것이었다. 바르셀로나 카잘스 관현악단은 약 10년 동안 활약했으나 1936년 7월 파시스트군이 바르셀로나를 습격하는 바람에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카잘스는 이때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카잘스는 단원들에게 조국에 평화가 찾아오면 다시 이 곡을 연주하자고 단원들과 약속하고 남프랑스의 프라데로 망명했지만 이들에게 이 곡을 연주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프랑코 독재정권에 항의하여 10년간 첼로 연주를 멈추다

   스페인 내전이 결국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자 그는 프라데에서 프랑코가 다스리는 스페인에서 망명해 오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온갖 힘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10년 동안은 그의 첼로 연주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1947년 카잘스는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하는 한 절대로 첼로를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또한 프랑코의 스페인을 승인한 나라에서는 일체 연주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시 영국의 상무장관이던 스테포드 크리프스 경이 어째서 영국이 프랑코 정권을 승인했는지를 설명하겠다며 그를 초대하자 카잘스는 "그는 정치를 말할 속셈이지만 나는 도덕을 논하고 있는 거야"라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그의 은둔생활은 1950년 바흐 서거 200주기를 맞이하여 끝난다. 프라데에서 개최하는 바흐 음악제에 참가한 때문이었다. 이 고장에서는 그를 흠모하여 모여든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한 음악제가 탄생했다. 1950년, 바흐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바흐의 대가"인 카잘스를 위한 모임이 발족되어 프라데에서 축전을 열었다. 바이올린의 왕이라고 불리는 크라이슬러를 비롯하여 역시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과 시게티, 그리고 피아니스트 제르킨과 같은 세계 일류 연주가가 그를 위해 불과 5,4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도시를 찾아온 것이다. 이 프라데의 음악제는 카잘스가 어머니의 고향 푸에르토리코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여 옮겨 갈 때까지 매년 베풀어졌다.



파블로 카잘스의 백악관 연주 모습(케네디 대통령 재임 당시)
- 미국과 케네디의 비밀에 대해서 파블로 카잘스가 좀더 많이 알 수 있었다면 백악관 연주도 거부했을 지 모른다. 당시의 기록필름을 보면 케네디 대통령이 카잘스 앞에서 얼마나 예의바르게 굴려고 애썼는지 볼 수 있다.



80세의 나이에 20세의 제자와 결혼하다
  
카잘스가 푸에르토리코로 옮긴 뒤 푸에르토리코 정부에서는 푸에르토리코 대학의 협력으로 카잘스 음악제를 베풀기로 하였다. 수도 산판에서 열리는 음악제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성황을 이룬 것 두말할 것 없다. 그는 독주자로서도 많은 연주회를 갖고 레코드도 녹음했지만 프랑스 사람인 피아니스트 코르토와 바이올리니스트 티보와 함께 트리오를 만들어 활약했다. 이 트리오는 세계에서 으뜸 가는 것이었으나 티보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코르토는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뒤에는 홀로 남아 활동해야 했다(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일설에는 티보가 사고 당하기 이전부터 트리오는 해산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티보가 파시스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까닭에 파블로 카잘스가 그와는 더 이상 연주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나이 80세에 이르렀을 때 그는 갑자기 '심장 관상동맥 혈전증'이란 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푸에르토리코섬의 총독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주치의를 불러 그를 치료하게 한다. 얼마 후 그는 완치되어 건강한 몸을 되찾게 되고 80세의 노인은 방년 20세의 제자 마르티타 몬테스와 결혼한다. 카잘스는 둘 사이의 나이 차에 어색해 하며 "신랑이 장인보다 30세나 위인 경우는 흔치 않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젊은 아내를 맞이하여 100세까지는 문제없이 살겠다고 장담하던 카잘스는 그 약속을 못 채우고 1973년 10월 23일 푸에르토리코의 아우크시료 무토오 병원에서 향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때 카잘스가 임종의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음악 역시 바흐라고 한다. 평소 그가 '내 아들'이라고 귀여워 했던 피아니스트 유진 이스토민이 연주했다. 카잘스의 부인 몬테스가 요청했다고 한다. 카잘스가 죽은 2년 뒤 49세의 노총각 이스토민과 카잘스의 젊은 미망인 마르티타는 결혼했다. 그리고 아들같았던 사람과 아내였던 여인, 두 사람이 '카잘스 페스티벌'을 이어가고 있다.

  한 평생 첼로만을 연구하고 사랑했던 첼로의 성인이었던 파블로 카잘스. 그는 예술가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고 실천했던 한 사람의 훌륭한 인격자이자 양심의 소리에 따르는 강하고 의연한 생활 자체로서 그대로 더없이 훌륭한 예술의 경지와 결부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카잘스는 잔인한 대학살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던 인류의 20세기를 인간이 견뎌낼 수 있도록 신이 내려준 축복이자 선물이었다.

<숨겨진 이야기>

파블로 카잘스와 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란은 1936년 7월 17일, 이태리의 뭇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로부터 물자와 군대를 대량으로 지원받은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에 의해 발발했다. 카잘스는 히틀러와 나찌가 자신의 유태인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행했던 일들을 알게 되자마자 독일에서 첼로 연주하는 것을 중단했다. 내란이 발발했을 때, 카잘스는 자신의 교향악단 연습을 지휘하면서 바르셀로나에 있었다. 그 때가 그가 사랑했던 교향악단과 함께했던 마지막 시즌이었다. 7월 18일, 그들이 바르셀로나 올림피아드와 연계하여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준비하고 있던 중 카잘스는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그 메모는 문화부 장관인 벤츄라 가쏠(Ventura Gassol)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는 반란군들이 곧 바르셀로나에 들이닥친다는 것을 카잘스에게 알려 온 것이다. 그는 다음 날 밤으로 예정된 연주회를 취소하고, 카잘스로 하여금 단원들을 즉시 집으로 보내서 전투가 발발할 때 자신들의 가족들과 함께 있게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카잘스는 그 메모를 교향악단과 합창단에게 읽어줬다. 그리고, 그들이 즉시 떠나려 하는지, 남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마지막 악장을 연주하는 것으로 대신 하려는지 물었다. 모든 단원들은 남는 것을 선택했다. 카잘스의 눈은 비탄과 좌절감으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악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합창단은 쉴러의 시를 카탈로니아어로 불렀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도다, …” 카잘스는 교향악단에게, 언젠가 평화가 그의 사랑하는 고향에 다시 돌아온다면 다시 한 번 함께 모여 연주할 것을 맹세했다. 카잘스와 단원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그들은 거리들이 이미 바리케이드들과 떼를 지어 돌아다니는 폭도들로 채워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은 파시스트에게 점령되었다. 국가는 무자비한 폭도들에 의해 그 후 6주 동안 7만 5천명의 시민들이 학살되는,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피의 욕조로 변해 버렸다. 카잘스도 여러 차례 총살될 뻔했다. 한 번은 그가 파시스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화려한 저택에 살고 있었으므로, 폭도들은 그가 평범한 사람들의 친구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파블로 카잘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자신이 카잘스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은 믿지 않았다. 마침내 카잘스가 첼로를 들고 바흐를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아름다운 음악을 듣게 되었고, 그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이 누구를 죽일 뻔했는지 깨닫고 사과했다. 어느 때는 무장한 남자들이 카잘스의 집에 와서 카잘스의 친구를 체포했다. 카잘스는 벤드렐의 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착한 사람을 체포토록 승인한 그 시장의 처사에 대해 매우 분노하면서, 강경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시장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람들을 철수시켰다. 벤드렐의 사형집행 위원회가 총살 대상자 명단을 작성할 때마다 카잘스의 이름은 대상자 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신의 은총으로, 누군가가 항상 “아냐, 카잘스는 아냐. 지금은 안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카잘스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많은 이웃들, 동료들이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내란은 3년 동안 계속되었고, 스페인 국토는 황폐화했다. H.L. 커크(Kirk)는 자신의 거대한 카잘스 전기에서 이렇게 썼다 “국토는 피로 물들었다. 1936년 7월 18일부터 9월 1일까지의 6주 동안 공화제가 시행되고 있던 지역을 점령한 군대에 의해 대략 7만명의 시민들이 학살되었고, 반란군들이 내륙으로 이동함에 따라 희생자들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1939년, 마침내 프랑코는 피로 물든 전체주의 국가의 총통이 되었다.  < 이 당시의 분위기를 잘 묘사한 영화 중 하나가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이다. 이 영화를 본 날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먹은 기억이 있다. 비디오로도 출시되었으니 한 번씩 구해 보시도록…. >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상식 밖의 예술사』/ 정윤 지음 / 새길/ 1995년
  - 예술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통해 느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읽다보면 상식도 늘고 예술이란 게 복잡한 이론을 늘어논다고 해서 알 게 되는 것이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임을 새삼 일깨워주는 대중적인 예술사 입문서적이다.

『전설 속의 거장 - 20세기를 매혹시킨 클래식의 천재들』/ 조희창 지음 / 황금가지 / 1998년
  - 오랫동안 <객석>의 기자로 일했던 조희창 씨가 자신이 연재했던 글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매혹적이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거장들의 이야기가 대중적인 필치로 잘 그려져 있다. 강력 추천한다.(바람구두 실력 뽀록나게 하는 책이다.)

『 이 한장의 명반』/ 안동림 지음 / 현암사 / 1999년
  - 국내에서 클래식 음악, 음반에 관한한 고전 중 하나가 된 책이다. 클래식 음악 초심자들에게 더 없이 좋은 길잡이다. 애호가들에게도 지휘자와 지휘자의 차이, 가수와 가수의 차이까지 식별하는 심미안을 키우는 데 유익한 길동무다. 음악사에 빛나는 명곡들을 망라하면서, 한편 한편마다 곡해설은 물론 작곡가의 생애, 시대적 배경, 작곡과정에 얽킨 사연, 녹음과정, 다른 음반과의 차이점 등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

Pablo Casals - (추천사이트)

- 문화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대부분은 애호가의 몫이다. 파블로 카잘스와 관련된 국내외의 거의 모든 사이트들을 방문해보았다고 자부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좋은 사이트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경험이 된다. 주은님이 힘들게 가꾸고 꾸려나갈 이 사이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그래야 나도 덩달아 행복해질테니.(한글)

클래식 21닷컴   - 국내 사이트들 중 클래식 음악에 대해 가장 잘 안내하고 있는 사이트들 중 하나이다. 파블로 카잘스의 생애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많은 도움이 되는 사이트이다.)(한글)

호영이의 클래식 이야기  - 호영님의 클래식이야기 홈 페이지이다. 파블로 카잘스 이외에도 많은 자료와 정보가 있다.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은 사이트들 중 하나이다.(한글)

Portrait of Pablo Casals Front Page  - 파블로 카잘스의 생애와 음악활동 전반에 걸친 이미지들과 에세이가 있는 페이지이다.(영문)

The Pablo Casals Festival in Prades  - 파블로 카잘스의 프라데 페스티벌에 대한 페이지(영문)

ESCUELA ESPECIAL DE MUSICA PABLO CASALS  - 파블로 카잘스의 고국인 에스파냐의 카잘스 페이지(영문 지원)


<파블로 카잘스 연보>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카탈로니아에서 출생.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에게서 오르간,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움
1886년 열살 때부터 첼로 시작,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원의 호세 가르시아에게 배움
1889년 바르셀로나의 한 악기점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 발견
1893년 스페인 왕실장학금으로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 작곡과 실내악 배움
1895년 파리 데뷔
1905년 코르토 - 티보와 트리오 결성
1920년 바르셀로나 카잘스 관현악단 조직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로 카잘스 관현악단 해산
1939년 프랑스의 프라데로 이주하여 <프랑코 정권이 존속하는 한 조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
1950년 바흐 사망 200주기를 맞아 프라데 음악제 개최
1956년 어머니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로 이주, 푸에르토리코 카잘스 페스티벌 시작
1957년 방년 20세의 제자 마르티타 몬테스와 결혼
1973년 10월 23일 푸에르토리코 아우크시료 무토오 병원에서 타계

 

◆ <새의 노래>를 연주한 음반


  카잘스의 <새의 노래>는 1950년(74세) 프라데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음반(오케스트라 반주), 1954년(78세) 프라데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음반(오케스트라 반주), 1961년(85세)의 백악관 연주실황 음반(피아노 반주)이 있다.

일반적으로 백악관 연주실황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녹음은 오래됐지만 1950년도의 관현악 반주에 의한 프라데 페스티벌의 연주가 감동적이다.

첼로라는 악기가 갖는 유려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 좋고 이 곡이 갖는 애타는 그리움을 더 잘 표현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관현악 반주는 카잘스 자신에 편곡에 의한 것이다.

☞ 카잘스의 1950년 프라데 페스티벌 연주, CBS SONY CCK 7062(CD)

 

 

 

 

백악관 연주실황은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케네디의 초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프랑꼬 정부를 인정한 국가에서는 일체의 연주를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깬 것이라서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카잘스의 오랜 친구인 호르초프스키(1892-1992)가 피아노 반주로 참여하고 있으며 곡의 중간 중간에 카잘스의 신음소리가 녹음되어 있어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 음반은 스테레오 시대인 1961년도에 녹음되었지만 모노녹음이다.

하지만 실황녹음의 현장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생생한 녹음으로 음질도 비교적 좋다.

 



(백악관 연주에 앞서 케네디 대통령 부처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

☞ 카잘스의 1961년 백악관 연주(피아노 반주 : 호르초프스키), CBS CCK 7751(CD)

 

 

 

로스 앙헬레스의 <새의 노래>는 1970년(47세)에 EMI에서 발매한 로스-마르바가 관현악 반주로 편곡한 음반과 1991년(68세)에 녹음한 음반이 있다.

로스 앙헬레스의 노래는 둘 다 카잘스 못지 않은 절절한 그리움이 베인 훌륭한 연주다.

로스-마르바는 바르셀로나 출신의 지휘자인데 그가 편곡한 이 곡은 소슬한 가을바람이 느껴지는 쓸쓸한 분위기다.

그래서 필자는 이 곡에 <짝 잃은 새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였다.

☞ 로스 앙헬레스의 1970년 연주(지휘 : 로스-마르바), EMI ASD 2517(LP)

 

 

 

1991년의 녹음은 피아노 반주로 노래하는데 68세라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싱싱한 연주다.

로스 앙헬레스 나에게 있어 나이를 먹지 않고 언제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청순한 소녀이며, 언제나 기품을 잃지 않고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목련꽃 같은 여인이며, 누님처럼 친근하고 어머님처럼 포근한 가수이다.

그리고 그녀는 생래적으로 노래하는 즐거움이 뭔지를 아는 가수다.

할머니의 나이임에도 싱싱한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목소리를 혹사하지 않는 그녀의 노래 스타일 때문이다.

로스 앙헬레스는 스페인 민요에 관한 깊은 애정과 이해를 가지고 수많은 녹음을 남기고 있는데 로스 앙헬레스도 카잘스와 마찬가지로 까딸루냐 출신이므로 이 곡이 갖는 민족적인 정서를 잘 표출하고 있다.

로스 앙헬레스는 이 곡을 까딸루냐어로 부르고 있는데 가사의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목동들이 성스러운 밤의 커다란 불빛을 보았을 때
새들은 천사와 같은 목소리로 아기 예수에게 인사하며 노래하고 있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예수가 태어났다고
독수리가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바람을 가르며 날아갑니다.

☞ 로스 앙헬레스의 1991년 연주(피아노 반주 : 제프리 파슨즈), Collins 13182(CD)

 


  

페데리꼬 몸뽀우(1893~1987)는 <새의 노래>를 기타 독주곡으로 편곡하였는데 그는 파야(1876~1946) 이후 스페인을 대표하는 까딸루냐 출신의 작곡가이다.

몸뽀우는 이 곡을 원곡이 가지는 정서를 조금도 해치지 않고 아름다운 기타 독주곡으로 편곡하였는데 원래 기타를 위해 작곡된 것처럼 매우 기타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가 까딸루냐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정서적으로는 로스 앙헬레스가 부른 <짝 잃은 새의 노래>처럼 쓸쓸하기 그지없는데 기타의 울림에서 이 같은 쓸쓸함을 담아낸다는 것은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다.

그론도나는 이 곡을 명장(名匠) 안토니오 토레스(1819~1892)가 제작한 1887년산 기타로 연주하고 있는데 그론도나의 연주도 훌륭하지만 명기 토레스의 아름다운 음색이 각별하다.

이 악기의 깊고 그윽한 저음과 윤기 있는 중고역의 울림을 최신 녹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토레스가 제작한 기타는 울림통을 키우고 현의 장력에 견딜 수 있도록 울림통 내부에 보강목을 붙여 음량의 증대를 가져오게 한 현대 기타의 표준을 만든 명장이다.

기타는 음색이 매우 아름답지만 음량이 작아 주로 독주나 중주의 형태로 소규모 연주회장에서 연주해 왔는데 명장 토레스 이후 기타는 비로소 대규모 연주회장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토레스의 아름다운 음색은 너무도 황홀하며 몸뽀우의 명편곡과 어우러진 <새의 노래>는 이 곡의 카탈로그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빛나는 보석이다.

☞ 그론도나의 기타 연주(편곡 : 페데리꼬 몸뽀우), Stradivarius STR 33589(2CD)

 

 

 
Pablo Casals plays BACH - Suite no 1 for Cello - part 1



Pablo Casals plays BACH - Suite no 1 for Cello -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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