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물을 심는 때를 맞으면 난리가 쳐들어오는 급박한 시간을 대엿새정도 온몸으로 맞지 않을까요?
그리고는 이내 평온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또 그 간격쯤이었어요.그동안의 농촌살이에서 아주 느리게
느낀 사실이에요.농촌이라 하여 매일이 콩을 볶 듯 바쁘면 사람들은 지치겠지요.
알고보면 농촌은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 오히려 참 많은 편이에요.
오늘부터 우리 집도 그런 시간에 해당된다는 걸 모든 정황으로 쉽게 알겠어요.
이런 때에 손님이 오시면 더없이 좋겠지만요.오늘은 그 어느 곳에서도 기척없었답니다.
대신 우리 부부가 집밖을 나가기로 결정했어요.집을 떠나는 문제만큼은 한치의 이견도 없다는 게
신기해요.100가지중 아흔 아홉은 맞지않는 사람들이 부부라는말 공감하는데요.우리에게도
아흔아홉은 충분히 적용되고 나머지 한 가지는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나 봐요.벗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차를 댈 수 있는 공간 확보가 되는 곳의 길목이면 과일 장수가 진을 쳤어요.요즘은 과일이 때가 없다지만
당도 높은 여름 과일이 그렇게도 많이 나왔네요.다 사먹겠다하여 카메라만 달랑 백에 넣었는데 남편은
칼 생각은 하지도 않고 과일 잘먹는 나를 위해 개구리 참외 한 봉지를 샀습니다.하지만 궁축통!이라~~궁하면
다 통하게 되었다며 칼이 없지만 참외를 먹는 방법이 있노라고 큰소리쳤어요.목적지가 어딘지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대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속리사가 있는 보은을 지나쳤으니까 옥천이나 청원군 일대를
둘러 보겠다는 짐작을 속으로 하고 있었어요.한 번, 혹은 두 세번은 가본적 있는 코스에요.청원에서는
온천을 하고 김기창 화백의 기념관이나 청남대등을 가겠지요.그런데 남편이 향하는 곳은 뜻밖의 대전이었어요.
옳거니, 아들이 문득 보고싶었구나 생각했어요.나는 오히려 일에 치이고 일상에 바빠서 잘있겠다 믿으며
아들을 잊고 사는데 아버지는 그리우면 속전속결로 찾아가 보고 그 마음을 달래더군요.기동성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시켜주는것 같아요. 늘 남편은
운전도 못한다는 핀잔 주었거든요.전화를 걸더니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한다며 바로 학교로 찾아가자 했어요.
아들의 얼굴을 보고 맛있는 점심을 사주면 되겠다 싶어서 기분이 어느새 좋아지고 집나온 걸 정말 잘했다 여겼지요.
먹는 것도 부실할텐데 저멀리서 우리를 보고 달려오는 아들이 몇 주동안에 더 살이 쪘는지 훨씬 뚱뚱해 보여요.
약골인 내가 저렇게 건장한 아들을 낳을 수 있었음을 스스로 대견해하면 그때마다 살찐 게 뭐가 좋냐며
둥둥뜬 나의 기분을 그이는 뭉개고 말지요.학교 근처에는 식당이 밀집해있지만 정작 먹을 건 마땅치 않았어요.
모처럼 가족이 모였고 뭔가 보신이 되는 음식을 아들에게 먹이고 싶은데 분식가게만 즐비했어요.
빙빙 몇 바퀴를 돌다가 마침내 그이가 찾아낸 민물장어구이 집에 세 식구는 들어가 앉았어요.장어는
물론이고 채소,각종 짱아찌도 아들은 가리지 않아요.음식을 달게먹는 싱싱한 표정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긍정적 사고가 순수한 청년기의 정점같았어요.
돈 넉넉치않은 부모를 생각해서 지하의 방을 얻었다 하니 그이는 대견해하며 한 몸 누이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호탕하게 웃었는데요.나는 그 방을 내려가는 계단을 밟을 때마다 가슴이 좀 아려요.
볕이 귀해서 정신이 눅고 웬지 어두워질것 같은 선입견 때문일거란 생각은 하면서요.후식으로 아까
길에서 산 개구리 참외를 먹자했습니다.미니 살림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고 여겼는데 그곳에도 칼은 없네요.
가위로 이리저리 껍데기를 깎았지만 신통치를 않아서 결국 참외 먹기를 포기했습니다 .
방울토마토나 딸기를 샀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라며 나는 상의도 않은 남편을 그제서야 원망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용돈 주는 모습은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
고맙다며 허리 구부려 인사하는 아들을 뒤로하고 대전을 빠져 나왔어요.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꽃 세상이에요.봄이 무르익을대로 익고 꽃도 이 주간이 절정이 아닐까 싶어요.
인위적으로 심고 가꾼꽃들도 화려하지만 먼 산의 분홍빛 꽃들도 앞다투어 피어서 연초록과의 조화가
한폭의 그림같습니다.대개 돌복숭아 꽃이 아니면 야생 벗꼿이 저희 끼리 수정해서 자라고 꽃까지
피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아들을 만난 큰일을 무사히 끝냈으니까 지금부터야 어느 곳엘 들러도 부담없이
즐거울 거리를 쉽게 찾지 않을까요.어찌되었건 나는 그이가 향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돼요.
아마도 옥천의 정지용 문학관일 거예요.예전에 한 번 가 본적은 있지만 생가 복원이라고
막 공사를 끝낸 시점이어서 주위가 어수선했던 기억 뿐이에요.'향수'가 대표적인 정지용의 시이기는 하지만
그밖의 주옥같은 다른 시도 알고 싶었고 인적사항도 궁금하다고 다시한번 들렀으면 하고 남편에게 충분히
설명한적 있거든요. 예술인들의 생가는 천편일률적으로 어떤 지방을 막론하고 구조조차 다르지 않는 초가
삼칸이어서 생가 방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어요.하지만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남편은
그 옆에 문학관이 있다고 하네요.사실이었어요.낭송실이 마련되어 있고 정지용의 입북상황도 이전보다는
구체적으로 알겠어요.한국전쟁은 문화 예술인들에게도 깊은 상처와 시름이었다는 것이 새삼 깨달아져요.
정지용의 북한 아들과 남한의 아들이 눈물로 상봉하는 뉴스 본 기억 나는데요.정지용의 문학관에는 사진이
게재되므로 실감나게 가족들의 비애가 와 닿아요.영상실에서 나혼자 그의 일대기를 영상으로 관람했어요.
낭송실에도 들어가 정지용의 시 '할아버지'를 낭송했죠.남편은 밖에서 그러는 나를 보고 웃었어요.
낭송을 좀 멋있게 하고 싶었어요.따로 배우는 곳에 등록해서 체계적으로 훈련하고 싶어요.한 사람의 시인을
기리는 노력을 옥천군에서는 훌륭히 해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지용 문학관에서 삼사백미터 떨어진 지점에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어요.
조선시대라면 국모의 사저를 나는 겁도 없이 훔쳐본 방자한 백성이었겠지요.
담이 높아 발꿈치를 들고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삐걱대는 대문틈이나 무너진 담벽 사이로
집안을 살필 수밖에 없었는데요. 여전히 몇 년전과 다름없이 공사중이에요.진척도 없는 걸 보면
예산이 없지는 않을까 하는 세속적인 걱정을 잠깐했어요.넓은 마당가를 거니는 목이 긴
육여사를 상상해 봤습니다. 우물같은 둥그런 물체가 멀리 보이길래 두레박으로 퍼올려
육여사도 수없이 그 물로 목을 적셨겠지 라는 생각도 했어요.인걸은 간 데 없는 이라는 싯귀도
떠올라요.부귀도 영화도 구름인 듯 간곳 없는......그 동네 전체는 옛날부터 반촌이었다는 게
모르는 제게도 확신과 함께 밀려왔어요. 찬찬히 살펴보면 수령깊은 나무도 많고 남은 가옥
여기저기의 구조가 심상치 않은 반가의 양식이에요.실제로 훼손되지 않은 기와집에서 전통
찻집을 운영하는 곳에 잠깐 들렀을때 주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있었는데
자부심이 대단하다 느꼈어요.내부를 살펴보니 원채는 우물 정(井)자를 본따 건축했고 부속 건물도
상당한 역사를 가진 듯 보인집 여러채였어요.
옛 사람들은 좋은 터에 목멘 기록 자주 책자에서 발견하는데 그곳 어딘가의 안내판에도 부유하고
안락한 반가를 이루었다는 글귀가 그러고 보니 있었어요.풍수지리는 잘 모르지만 분명 명당은
있으리라는 믿음도 점점생겨요.
이제 우리가 맞아야할 다음 일은 못자리에요.
언제 호사스러운 여유를 부리며 꽃터널을 지나 아들을 만나고 한가롭게 식사를 했는지도 기억 못하는
사람들처럼 그 일에 우리 내외는 매달리겠지요.나와 詩가 정녕 친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일에
몰두하는 냉정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서처럼 들여다 볼 수 있어요.못자리를 끝내고 또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 짐을 꾸릴지도 모릅니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요.
(2009 4월12일에)
첫댓글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여행 떠날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시니 부럽네요~~~
ㅎㅎ겨울나무님!들러주셨네요.부끄러워요.
선배님의 봄여행 멋있어요. 제가 다녀온듯한 기분입니다. 요즘 나랏님의 도덕적 해이를 볼 때마다 목련꽃 닮은 육영수 여사가 간절히 떠오릅니다. 선배님의 하루의 소고가 녹아내린 하루 참 값집니다. 일요일날 만나요. 12일 19일 연타로 집 비우시면 쫓겨나지 않을까요. 조심하세요.
아리랑! 모임 앞두고 신경쓰이지요?걱정하지마세요.인원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우리는 만나면 행복하니까요.그 날을 생각하니 벌써 반가워요.맛있는 것도 먹고 우스운 이야기도 나누고.
문학답사를 다녀 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