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난간이다
고양이들 난간 위로 기어 나온다
어둠 속에서 발광하는 야광 안구를 끼고
나의 뒤꿈치를 살핀다
나의 뒷덜미를 핥아본다
문닫은 상점이 셔터를 올렸다 내린다
죽은 가로등이 매번 마지막으로 발광한다
어두운 건물의 외벽마다 질척질척
고양이의 타액이 흘러내린다
난간을 타고 있는 수백마리 고양이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밤 속으로
모퉁이의 모퉁이를 돌며 벼랑 아래로
발톱을 숨긴 밤이 난간 위를 기어오른다
안개가 가장 값비싼 외투였어
안개가 가장 까다로운 외투였어
안개를 껴입은 고양이가 난간이다
난간 위의 고양이들은
까다로운 길이다
길을 가로지르는 것은 금물!
길의 심장을 가로지른 생쥐 한 마리가
내 발톱을 꺼낸다
/화분들
조말선
빨간 입은 분노였네 노란 입은 빈혈이었네 파란 잎은 두려움이었네 분노를 빈혈을 피워야 하는 파란 잎은 세차게 멍들었네 아버지가 비닐하우스로 들어오셨네 이런, 신발이 작구나 얘야 걱정스런 아버지는 신발을 벗기고 내 발가락을 잘랐네 발가락이 잘릴 때마다 나는 열매를 맺었네 나는 미혼모였네 아버지는 매일매일 미혼모를 재배했네 아버지 제발 제 신발을 돌려주세요 한번도 신지 못한 새 신발들이 쓰레기통에 버려졌네 빨간 입은 분노였네 노란 입은 빈혈이었네 파란 잎은 두려움이었네 분노를 빈혈을 말해놓고 파란 잎은 시들어갔네 아버지가 비닐하우스로 들어오셨네 이런, 모자가 작구나 얘야 자상한 아버지는 모자를 벗기고 내 목을 잘랐네
/가변차선
조말선
오전 여덟시에 나는 길이었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아우성이었고, 법이었고, 꽃이었고,
정오 열두시에 나는 사막이었고, 상영 금지된 영화였고, 부러진 꽃이었고, 겨울이었고, 실연이었고, 그래도 법이었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길이었고,
/잠자는 기호
조말선
1
전신주에 붙은 지 오래 된
잠만 자는 방이
몸을 오그리고 잠 속으로 들어간다
2
검은 담장이 길을 막는다
성장을 멈추는 산책
성장을 멈추는 시계
성장을 멈추는 그늘
잠은 풍족한 어둠을 덮고 자란다
뜰의 등나무가 꼭 다문 방문을 칭칭 묶는다
성장을 멈춘 방문
성장을 멈춘 구두
꼬불꼬불 자라나는 잠의 머리카락
멈춘 산책이 잠을 먹는다
멈춘 시계가 잠을 먹는다
멈춘 그늘이 잠을 먹는다
/만리포 모텔
조말선
살갗이 벗겨진 회벽이 썬텐을 하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 이층 창문은 종일 열리지 않았다 그 방은 빈털터리 바다를 한 번도 받아주지 않았다 만리 밖에서 달려온 바다는 그 눈동자의 삼분의 이쯤 차오르다가 스러졌다 서쪽으로 난 창문은 절망할 때만 불타올랐다 저녁 여섯시 근처 임종 직전의 해가 그 창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생살 한 토막을 잘라놓고 나와 건배하였다
/부작용
조말선
투병중인 친구가 전화를 했다 주사 한 대에 부작용이 한바닥이다 곧 입안이 다 헐어버린대 친구의 느린 말들이 끊어질 듯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창밖 벚나무 가지마다 꽃반점들이 번지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저 환한 입 속도 헐겠지 헐어지고 문드러지겠지 그것도 모르고 나는 얼마나 많은 무통의 웃음을 흘렸던가 친구는 늦기 전에 술을 사달란다 저기 봐, 누가 지나가는지 땅바닥이 어질어질 간질을 앓는다 못 견디겠다고 아아아 민들레가 개불을풀이 점점 멀리 발악을 한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 예쁜 목젖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부작용은 작용을 안하는 거다 저기 저 독 오른 꽃반점들 좀 봐 곧 네 입 안이 다 헌다고? 헐린 자리마다 들어서는 새 집을 보게 된다고? 너 봄 타는구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1
조말선
삼월에는 정원을 내버려두세요 텅 빈 나뭇가지에 음모가 득실거려요 사방에 눈인지 입인지 숨어 있어요 욕설인지 칭찬인지 듣게 될 거예요 누군가의 막 벌어질 입을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의 막 벌어진 눈을 생각해 보세요 정원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나는 멀어졌거든요 내가 가지 않은 길에서, 정원이 깊어질수록 내 발목은 쇠뭉치를 달았어요 두 개 세 개 늘어났어요 받아낼 욕설과 비웃음이 늘어났어요 나무는 갈라지는 것이 숙명이에요 나무는 반어법이 유일한 화법이에요 보세요 허공 깊숙이 높아지려고 땅 속 깊숙이 낮아지잖아요 실수가 꽃을 피워요 꽃잎의 의견이 일치한다면 꽃이 어떻게 활짝 피겠어요 삼월에는 정원을 내버려두세요 내가 마음먹은 것을 모조리 부정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어제의 꽃은 그제의 꽃의 부정이고 올해의 꽃은 작년의 꽃의 부정이에요 내가 당신을 거절한다고 화내지 마세요 우리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를 보세요 나와 당신은 하나의 꽃잎이에요 더욱더 멀어져야 할 원수지간이에요
시인은 1949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197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견인차는 멀리 있다』외, 현재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과 교수. 『시와 반시』주간
/고요의 남쪽
강현국
떡갈나무 그늘을 빠져나온 길은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차돌처럼 희고 단단한 고요
오직 고요의 남쪽만 방석만큼 비어 있다
길은 또 한번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온몸에 고추장을 뒤집어쓴 어떤 애잔함이, 출렁
섬진강 옆구리를 스치는 듯도 하였다
/세한도·11
강현국
감나무 가지 끝에 걸린 구름은
철새들이 벗어놓은 신발,,,
남으로 창을 넓게 내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겨울 나무 가지들이 쭉-쭉- 허공 높이 뒷굽을 드는 동안 까치들이 깍, 깍, 깍, 운다 어쩔까 하다가 철새들이 벗어놓은 신발 곁에 쉼표 세 개를 찍었다 이건 순전히 까치가 한 짓이다 갓 구운 빵처럼 모락모락 김이 난다 남으로 창을 멀리 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올 것이었다 어쩌다가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어제는 하루종일 눈이 내렸다 어차피 폭설이었다
/악어와 악어 사이
강현국
TV 속 사막을 빠져 나온 전갈 한 마리가 두 마리가 세 마리가 중공군 병사처럼 무수히 밥 상 위로 기어오릅니다 바닷게를 집으려던 스테인레스 젓가락이 덜덜덜 떨립니다 사막의 왕국인 내 노래의 집게발도 고압선에 감전된 듯 덜덜덜덜 떨립니다
먼바다로 열린 길은 어디 있는지, 덜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비밀번호를 눌러봅니다 나는 오늘도 세끼 분의 공복과 하루 분의 권태를 자동지급 받습니다 당신 때문입니다
/어떤 개인 날
강현국
자동응답기를 꺼버렸다
이제 나는
캄캄하게 죽었다
한갓 남루는
行廊 끝 돌아서는 바람의 것이고
젖은 구두는
칭얼대는 구름에게 던져주었다
자동응답기를 꺼버렸다
이승에서 잠시 우리가 만난 눈부신
푸른 푸른 날들의 사타구니를
연어 떼 탕, 탕,
들이받다 가겠지
주머니가 텅, 비어버린
어떤 개인 날
자동응답기를 꺼버렸다
/통화권이탈지역
강현국
육군 강병장을 만나러 간다 완주군 구이면 중인리 정자나무 근처에서 출발한 그 길은 논둑 밭둑을 지나 돌배나무 그늘을 가로지른다 초록에 막힌 산길은 물론 통화권이탈지역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는 것은 돌배나무 이파리나 날다람쥐만은 아니다 무르팍 깨지도록 그의 이름 부르며 물봉숭아 군단 곁을 지나거나 첨벙 첨벙 개울물 건널 때 깜짝 놀라 흩어지는 모래바람 같은 길들
모악산 어디에도 육군 강병장은 보이지 않는다 날다람쥐가, 계곡 물소리가, 낡은 군화 한 짝이 아주 오래된 문지방을 넘나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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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주노초파남보
강현국
1 2 3 4 5가 보이지 않는다
자작나무숲 밖에는
자작나무숲이 벗어놓은 신발들이
어떤 은밀함을 머리에 이고 있다
내가 사물과 연애중일 때
5 6 7 8 9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온통 자작나무숲
6 7 8 9 10이 보이지 않는다
보름달 뜨려는지
그야말로 당신 맨발에
자작나무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
/쇠똥구리
강현국
저녁 종소리가 벗긴 모자
우리라는 말의 연초록 지붕 밑
비 오는 정거장이 벗긴 구두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이 흘러든 풀밭
어느 날
그래 그래 어느 날
어느 날
쇠똥구리가 다 갉아먹었네
허공을 기어오르는 산길이
털모자를 쓰고 있네
까치발 세우고 문득 멈춘 날벼랑이
어느 날 문득
구두를 신고 있네
정처없는 이 발길
꽁꽁 서산에 얼어붙었네
어느 날 쇠똥구리가
아아, 어느 날을 다 갉아먹었다네
/천사·3
강현국
저무는 서산이 잠시 환한 것은/새들이 데리고 온 하늘/노동의 푸른 쇠스랑 때문입니다//당신은 어디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