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강좌 ‘아버지학교’ 등 교육프로그램 봇물 경기도 75개교, 1박2일 아버지교실 운영도
모 정부 출연 연구소에 근무하는 한지웅(38)씨는 2년 전 아빠가 됐다. 직장은 대전에 있고 집은 서울에 있어 주말부부로 지내던 그는 아내가 임신 6개월에 접어들자 대전 숙소를 처분했다. 아내 곁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아들이 태어난 후에도 서울과 대전을 오가는 생활은 계속됐다. 일찍 집을 나서 밤 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보니 평일엔 잠든 아들의 모습밖엔 볼 수가 없었다. 어쩌다 새벽에 깨 울음을 터뜨리는 아들 앞에선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고민 끝에 그는 자신과 같은 ‘초보 아빠’ 대상 교육 프로그램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큐이디부모학교(서울 강남구 신사동)였다. 한씨는 이곳에서 아빠교실 2회, 육아교실 1회 등 세 차례에 걸쳐 수업을 들었다. 결혼 전부터 ‘일보다 가족’이란 믿음을 갖고 있던 그였지만 수업에 참여하며 적잖이 놀랐다. “가족에게 헌신적인 아버지들이 참 많더라고요. 저도 나름대로 신경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앞으로도 아버지 대상 교육 프로그램이 있으면 빠짐없이 참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 일러스트 한규하
김진락(48) 한국체인스토어협회 팀장은 지난 4월 5일부터 5월 2일까지 ‘열공(열심히 공부하는) 모드’로 지냈다. ‘휴넷 행복한 아버지학교’<38쪽 인터뷰 참조>란 온라인 교육과정에 등록했기 때문이다. 초등생 딸만 셋을 둔 그는 최근 부쩍 ‘떼쟁이’가 된 초등 1년생 막내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눈에 띄는 게 있으면 무조건 사달라고 조르는 통에 곤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얼마 전엔 가족끼리 밤에 벚꽃 구경 나섰다가 야광봉 안 사준다고 떼쓰는 막내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죠.”
‘듣기 좋은 말로 타일러야겠다’고 다짐하다가도 번번이 감정이 앞서 화부터 내는 아빠였던 그는 1개월간의 ‘아버지 공부’ 이후 확 달라졌다. “떼쓰는 아이를 윽박지르기보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쿠폰으로 만들어 활용해보라는 등의 구체적 요령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실제로 효과를 보기도 했어요. 이번 어린이날에 임진각으로 놀러 갔는데 여느때완 달리 별 갈등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거든요.” 그는 “수업을 들으며 ‘한 달에 한 번씩은 가족여행 떠나기’ 같은 가정 내 규칙도 정했다”고 말했다.
교내 아버지회 결성 활발
‘어쩌다 보니 돼 있더라’가 통용되던 아버지 노릇에 ‘자격’과 ‘교육’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경기도교육청 제2청은 지난 5월 4일 “올해 관내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45개교, 고등학교 10개교 등 총 75개 학교에서 심심(心心) 아버지교실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칭찬형 대화법·고난 극복 체험학습·서바이벌 게임 등 자녀와 아버지가 함께하는 1박2일(2박3일) 일정의 이 프로그램을 위해 교육청은 학교당 200만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김태석 경기도교육청 제2청 중등교육과장은 “어머니에 비해 자녀의 학교생활을 잘 모르는 아버지들을 위해 마련한 행사”라고 밝혔다.
1995년 개설, 올해로 16년째를 맞는 국내 최장수 아버지 교육 프로그램 ‘두란노 아버지학교’는 2009년 12월 31일 현재 17만2627명(해외 수료자 포함)이 다녀갔다. 매주 토요일 5시간씩 5회에 걸쳐 진행되는 교육의 ‘강도’를 감안하면 놀라운 숫자다. 특히 2000년 시작한 해외 아버지학교는 매년 수료자가 급증해 지난해 5042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아버지학교의 프로그램을 부부용으로 손질해 2006년부터 선보이고 있는 부부학교도 지난해 1146명이 수료해 신기록을 달성했다.
교내 아버지회(會) 결성 바람도 활발하다. 강원 평창 미탄초교는 전교생이 94명에 불과하지만 10년 역사의 도내 유일 아버지회를 보유하고 있다. 폐광기에 접어들며 본격화된 학생 수 급감을 막기 위해 2000년 20명으로 출발한 미탄초교 아버지회의 2010년 현재 회원수는 27명. 특히 올 2월엔 아버지회 회원들이 직접 기초공사 등에 참여해 교내 골프연습장을 준공하기도 했다. 교육열 높은 서울의 경우 아버지회는 더 이상 ‘특이단체’가 아니다. 서울 영본초교(동작구 본동) 아버지회의 경우 올 식목일에 아버지와 자녀가 함께 교정에 개나리와 진달래를 심는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기업서도 ‘아버지’ 교육
‘어머니’에 가려져 있던 ‘아버지’가 주목받기 시작한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멀게는 1996년 출간돼 250만부 이상 팔린 김정현 소설 ‘아버지’가 촉발시킨 ‘아버지 신드롬’이 있었고, 가깝게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본격화되던 2006년을 전후해 정부기관과 기업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던 ‘가족 친화 경영’의 중심에 아버지가 존재했다. 실제로 배우자 출산휴가제·남성 육아휴직제 등 가정 속 아버지 역할이 한층 강조된 ‘가족친화 사회환경의 조성촉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건 2007년 12월이었다.
그러나 최근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아버지 교육’ 붐은 예전과 그 양상이 사뭇 다르다. 이제까지의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굳이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 노력 없이도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적당한 권위와 존경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결정적 원인은 경제력이었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엇비슷해진 남녀의 경제력은 부부의 가정 내 위상을 바꿔놨다. 가정에서의 소외감을 일로 보상받던 시절도 지나갔다. 지난해 한국생산성본부가 발표한 ‘2008 가족친화지수 측정 및 분석’ 결과에 따르면 322개 상장법인 중 생산성이 높은 상위 20% 기업의 가족친화지수는 45.9점이었다. 하위 20% 기업의 가족친화지수(40.2점)를 크게 웃돈다. 조직이 구성원의 ‘행복한 가정 만들기’에 주목하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 있다.
코오롱제약 팀장급 이상 임원 38명은 지난 4월 한 달간 ‘휴넷 행복한 아버지학교’를 수강했다. 1인당 5만5000원의 수강료 전액은 회사가 부담했다. 수강생 중엔 이우석 사장도 포함돼 있었다. 단체 수강 아이디어를 낸 건 이 사장 본인. 신승윤 코오롱제약 인사팀 과장은 “전사 차원에서 이런 교육이 진행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반응이 굉장히 뜨거웠다”며 “추후 평사원급으로까지 수강 기회를 확대할 계획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가족친화경영을 통해 직원들에게 ‘좋은 아버지’ 되기를 종용하는 기업과 CEO(최고경영자)는 이외에도 많다. △올 초 시무식 때 일명 ‘사랑 경영론’을 제시하며 전 직원에게 일과 가정의 균형을 강조한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 △지난 3월 임직원 자녀 중 올해 새로 학교에 들어가는 590여명에게 학용품과 가방을 선물한 이상철 통합LG텔레콤 부회장 △매년 어린이날 LIG아트홀(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열리는 어린이 공연에 임직원 자녀를 초청하는 구자준 LIG손해보험 회장 △사내 동호회 모임을 가족 동반 모임으로 운영하고 소요 비용 일체를 지원하는 한미파슨스 김종훈 회장이 대표적 예다.
정부 차원의 지원도 활발하다. 보건복지부는 이들 기업의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2008년부터 ‘가족친화기업인증제도’를 도입해 우수 기업이나 기관을 선정하고 있다. 경기도청은 이와 별도로 지난해 10월 전국 최초로 ‘가족친화 사회환경조성 및 지원조례’를 제정, 도내 기업의 가족친화경영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新아버지상의 출현
정승아 조선대 상담심리학부 교수는 ‘공부하는 아버지’가 늘어나는 현상을 ‘여성적 권력 증대’로 설명한다. “현 시점의 세계를 우주의 리듬이란 큰 흐름에서 본다면 음(陰)적 기운 상승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남성적 덕목으로 여겨져온 것들이 여성화되고 그 반대 현상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 역시 그 때문이지요. 당연히 아이 앞에서 예전 아버지상(像)을 고집하는 아버지는 소외 당하고 외로워질 수밖에 없어요. 점차 부드러워지며 여성성을 갖춰나가는 신(新)아버지상의 출현은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작가이자 번역가 이경식씨의 책 ‘나는 아버지다’(휴먼앤북스·2006)의 머리말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 반기를 들자. 아버지가 되자. 아버지의 당당하던 위엄을 되찾을 때, 우리의 시간은 더 이상 자조나 고통이 되지 않을 것이다.” 교육칼럼니스트 최효찬씨가 지난해 11월 펴낸 책 ‘내 아이의 영웅이 되어라’(살림)에 등장하는 표현은 사뭇 다르다. “이제 새로운 권위로 무장한 ‘아버지의 귀환’이 요구되고 있다. 이제 아버지는 지난 시대의 엄숙한 권위를 가진 모습이 아닌 어머니와 같은 모성을 갖춘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귀환해야 한다.” 2010년 5월, ‘당당한 위엄을 되찾으려는 아버지의 귀환’은 이미 시작됐다.
‘행복한 아버지학교’ 만든 조영탁 휴넷 대표
“개설 두 달 만에 2000명 다녀가… 배워서라도 잃어버린 자리 찾아야죠”
▲ photo 허재성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조영탁(45) 휴넷 대표는 요즘 ‘가정 경영’이란 말에 푹 빠져 있다. 휴넷은 경영직무·리더십 관련 이러닝(e-learning) 프로그램으로 10년 이상 잔뼈가 굵은 기업. 그는 올 3월 ‘행복한 가정경영의 플랫폼’을 모토로 휴넷 가정행복발전소(thehappyhome. co.kr)를 설립했다. ‘가정의 행복이 기업의 성과로 이어지고, 그 성과들이 모여 대한민국을 행복한 지식강국으로 만든다’는 신념에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혹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향한 ‘2010년형 실전 매뉴얼’인 셈이다.
‘행복한 아버지학교’는 휴넷 가정행복발전소가 내놓은 첫 번째 야심작이다. 지난해 6월부터 개발에 착수, 올 3월 4주 12시간짜리 과정으로 문을 열었다. 원하는 시간에 PC로 접속해 정해진 커리큘럼을 이수하고 주어진 과제를 마치면 수료증이 발급되는 온라인 과정이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개설 2개월 만에 누적 수강생은 2000명을 넘어섰다. 기업 단위의 참여 문의도 이어지고 있다. 2010년 5월 6일 현재 SC제일은행·코오롱제약·PPG코리아·아이디룩 등의 임직원이 ‘행복한 아버지학교’를 거쳐갔다.
“오래전부터 가정이야말로 국가의 심장이란 생각을 해왔습니다. 다양한 구상이 있었지만 아버지 교육 분야는 두란노아버지학교 등을 통해 충분히 검증된 프로그램이어서 (가정행복발전소의) 1탄으로 준비했지요. 커리큘럼 개발을 총괄한 김지영 이사는 150권 이상 되는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5주간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는 두란노아버지학교를 참관하기도 했어요. 김성묵 두란노아버지학교 국제운동본부장·문용린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송수식 신경정신과 전문의 등으로 구성된 자문진의 도움도 큰 힘이 됐습니다.”
어느 정도의 수요는 예상했지만 막상 뚜껑을 연 운영진은 깜짝 놀랐다. 김지영 이사는 “수강생이 각자 닉네임을 정해 온라인상에서 과제를 올리도록 했는데 1기 개강 첫날부터 수백 개의 콘텐츠가 쏟아졌다”며 “과제를 관리해주는 직원이 수강생이 가족에게 쓴 편지를 읽다가 감동 받아 훌쩍이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귀띔했다. 수강생 만족도는 NPS(Net Promoter Score·순고객추천지수) 집계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NPS란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추천하겠다”는 고객 수에서 “적극적으로 추천하지 않겠다”는 고객 수를 뺀 후 이를 전체 응답자 수로 나눈 것. 기업이 충성도(loyalty) 높은 고객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나타내는 지표로 활용된다. 휴넷 측이 밝힌 ‘행복한 아버지학교’의 NPS는 76이다.
조영탁 대표는 ‘아버지 공부 삼매경’에 빠진 남성이 급증한 원인을 달라진 사회 패러다임에서 찾았다. “모 기업 간부는 어느 주말 아내와 아이들이 ‘우리끼리 나가자’고 얘기하는 걸 들으며 ‘우리’에 자신은 빠져 있다는 걸 깨닫곤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더군요. 경제권이 남성에게 집중된 사회에선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아버지’도 허용됐지만 이젠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아버지도 가정 운영과 자녀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인정받을 수 있어요. 아버지들이 이제야 자신의 처지 변화를 인식하기 시작한 거지요.”
휴넷 가정행복발전소의 차기 프로젝트는 ‘예비부부학교’가 될 공산이 크다. “준비 없이 아버지가 되는 남성이 많다지만 준비 없이 부부가 되는 사람도 너무 많아요. 연간 30만쌍이 부부의 연(緣)을 맺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결혼 후 달라지는 각자의 역할과 책임, 갈등 조절법에 대한 사전지식만 있었어도 그렇게 쉽게 헤어지진 않을 거예요. 두고 보세요, 휴넷 예비부부학교가 문을 열면 우리나라 이혼율이 현저히 떨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