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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으로는 국수봉과 연화산, 무학산을, 남으로는 문수산을 바라보며 태화강 중류에 자리한 울주군 범서읍 망성리 일원. 배와 단감이 특산물로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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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범서 삼거리에서 두동방면으로 태화강을 따라 가다보면 우측편으로 선바위가 있고 조금 더 가면 망성다리가 있다.
현재의 망성다리는 앞의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고 1973년도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그 망성다리를 건너면 커다란 팽나무 군락지가 있는데 그 뒤편이 내가 태어났고 지금도 살고 있는 망성마을이다.
70여 가구가 다복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내가 태어나던 그 때나 지금이나 가구수가 크게 변하지 않을 정도로 편안한 마을이다.
망성(望星)이라 불리게 된 유래로는 이 곳의 지대가 높고 숲이 우거져 별만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과 신라 경순왕이 문수보살을 따라 이 곳까지 왔으나 문수보살은 영축산으로 사라지고 왕은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이때는 망성을 망성(望聖) 또는 망승(望僧)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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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범서 선바위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
지금은 4차선으로 확장된 24번 국도가 태화강변을 따라 경남 밀양까지 곧게 뻗어 있지만 내가 나고 자랄 때만 해도 차선도 없는 비포장도로였다.
그 도로를 따라 시내에서 언양가는 버스를 타고 지금 신축중인 범서읍(2003년 읍으로 승격)사무소앞 정류소에서 내리면 포플러(양버들) 나무 사이로 먼지를 폴폴 날리며 버스는 떠나갔다.
24번 국도가 새로 닦이기 전까지만 해도 당시 면사무소가 있던 송현마을은 5일장이 서는 등 범서지역에서는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우체국과 지서가 있었으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양조장도 그 길가에 있었다.
아직도 그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이발소는 명절 앞이면 인산인해를 이루곤 하던 곳이다.
읍청사가 새로 개청을 준비하고 있으니 7월 이후 그 곳이 옛 영화를 다시 찾을 수 있을 지 두고 볼 일이다.
마을로는 면 정류소에서 버스를 내려 입암들을 따라 30여분을 걸어가야 한다.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입암들에는 큰 못이 있었으나 경지를 정리하면서 매립해 버렸다. 사연다리 밑에서부터 수로를 만들어 입암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는데 연못에는 연이 지천이었다. 오고가는 길에 어른들 눈을 피해 연뿌리와 연밥을 캐먹던 기억이 새롭다.
봄이나 가을, 혹은 겨울에는 이 입암들 길을 이용하고 여름에는 참새가 방앗간을 못지나간다고 선바위가 있는 태화강변 길을 걷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범서초등학교에서 울산시내로 전학을 갔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그리 어렵지 않았던 집안형편과 배움에 대한 욕심이 크셨던 선친의 반권유(?)로 나의 객지생활은 시작되었고 그것은 대학을 마치면서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다. 이 때문에 나는 토요일에 집에 왔다 일요일에 다시 나가는 일을 반복했다. 주말에 오기 힘들었을 때는 방학이면 돌아왔다.
이것은 내가 고향에 대한 생각을 늘 낭만적이게 한 결정적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생활이 어떠했던지 토요일이면 집에 갈 수 있고 그 곳에 놀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참으로 큰 위안이었고 행복한 기억이었다.
이것은 당시 집에서 매일매일 농삿일을 거들며 시간날 때마다 공부해야 했던 친구들에겐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때 고향집을 지키며 농삿일을 거들며 공부했던 친구들은 모두 객지로 나가 살고 있다.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을 객지에서 보내고 대학을 졸업하고 비로소 고향에 정착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살겠다고 하니 당시 선친의 황당해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몇 번의 설득끝에 농사짓는 걸 허락하신 선친의 도움으로 나는 큰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고향집을 지키며 그 고향에서 농사를 지어왔으며 살고 있다.
농사를 거들며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들은 모두 이 곳을 떠나 명절이면 한번씩 찾아오는 고향마을이 되었지만 토요일이나 방학에만 잠시 들러 신나게 놀다갔던 나는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무슨 인연일까.
그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어릴 적 고향의 모습은 여전히 어제 일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범서초등학교에 1반, 2반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2001년까지 범서초등학교는 지금 범서체육공원 자리에 있었다. 단층짜리 목조건물에 면사무소 인근 마을의 아이들은 모두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그 중 1반 2반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천상이나 입암, 송현마을등 태화강 물을 안건너오는 동네에 사는 아이를 1반이라 하고 우리마을과 같이 강을 건너오는 동네에 사는 아이들을 2반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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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종해 범서농협 조합장 |
비가 오는 날이면 2반 아이들은 강에 물이 불기 전에 먼저 하교시켰다. 그러면 우리는 책보따리를 머리에 메고 강물을 헤엄쳐 마을로 넘어가곤 했다.
태화강의 지형이 과거에 비해 많이 변했지만 국수천과 만나 선바위공원을 급하게 끼고 도는 ‘까막때미’는 웬만한 수영실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위험한 곳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안종해 범서농협 조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