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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스크랩 미켈란젤로의 건강과 바꾼 시스티나 성당의 두개의 걸작-천지창조,최후의 심판
조규상 추천 0 조회 62 12.02.21 12: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유럽여행기를 시작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계속하지 못하다가 다시 시작해 본다.

 

시스티나성당을 가기 위해 네개의 방을 지나 드뎌 시스티나성당에 들어왔다.

성당을 들어선 순간 성당이라기 보다 미술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양사방에 그림이 걸려있고,

그 유명한 천정화 '천지창조' 와 제단 뒷 벽의 '최후의 심판'이 바로 우리 눈 앞에 있었다.

 

이 시스티나 성당 내에선 '사진촬영금지'였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정숙한 분위기에서 그림을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천정화를 보기 위해선 고개를 젖히고 천정을 바라 보아야 해서 나같이 목디스크가 있는 사람은 힘들었다.

 

미켈란젤로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가 잠시지만 절실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중에도 이 그림들을 담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나는 촬영금지임에도 불구하고

노후레쉬, 노음으로 한컷을 담았다.

그런데 갑자기 정장을 한 남자가 다가 오더니 '겟 아웃' 하란다.

얼마나 얼굴이 붉어지던 순간이든지....

 

일행들에게 먼저 출구에 가 있겠다고 말하고 출구쪽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촬영금지를 하였는데 분별없이 카메라질을 한 나를 얼마나 꾸짖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 문제의 사진이다(최후의 심판). 이 사진을 한장 촬영한 뒤 바로 출구에서 성당내부를 감상할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천장화 '천지창조'의 일부가 담긴 모습이다.

 

실제 성당 내부의 그림은 이렇다. 다른 분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것임

 

 

 

아래의 그림은 '최후의 심판'

 

 

 

아래 그림은 천정화 '천지창조' 중 일부인데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하나님의 손길이 닿으려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떠 하나님의 자애로운 눈을 바라보는 장면인데 천지창조 그림의 가장 중앙에 있는 그림이었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뺀 나머지 좌우의 벽에 있는 그림들은 모세와 예수의 일생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시스티나 성당(capella sistina)

1473~1484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니콜라우스 3세 시대의 성당자리에 다시 지은 성당이다.

사방에 미켈란젤로,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보티첼리등 르네상스시대의 거장들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성당내의 모든 그림은 프레스코화 이기때문에 소음과 진동은 치명적이다.

그래서 그렇게 정숙하라고 권고하고 사진촬영은 엄격히 금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이제서야 나의 잘못을 깨달음 ㅋ)

 

시스티나 성당은 오늘날 전 세계의 추기경이 모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장소로 쓰이고 있다.

 

※교황선거 콘클라베(Conclave) : 교황선거 콘클라베는 원래 '열쇠로 잠근다'는 뜻으로 유폐당한 교황선거장을 말하는데  시스티나성당에서 진행된다. 

                                                콘클라베는 교황이 서거한 후, 15일 안에 열리며 철저한 비밀투표로 진행된다고 한다.

                                                몇년전 교황이 돌아가셨을때 이 콘클라베가 열려 우리나라의 김수환추기경도 다녀 오신걸로 안다.

 

시스티나 성당을 장식할 그림을 제의한 사람은 율리우스 2세로 맨처음 의뢰한 화가는 브라만테 였다고 한다.

그러나 브라만테는 건강상의 이유로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미켈란젤로를 교황에게 추천해다.

이유는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미켈란젤로라 하더라도 이 방 전체를 꾸미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그의 생각대로 미켈란젤로가 실패하면 그의 제자인 라파엘로의 입지가 더욱 단단해 질 것이라고 판단해서라고 한다.

허지만 미켈란젤로는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늘날 까지도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하는 두작품을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 와 '최후의 심판'인 것이다.

 

1508년부터 시작하여 1512년에 완성한 '천지창조'

중앙에 구약성서와 천지창조를 테마로 하여 9개의 주제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장면이 '아담의 창조'이다.(위그림)

교황과 불화로 중단하였다가 다시 시작하여 완성한 이 천장화는 미켈란젤로의 건강을 급격히 나쁘게 하였다고 한다.

천장화가 되다보니 받침대 위에 서서 천정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려니 고개를 계속 젖히고 있어야 해서 목이 안좋아 졌으며,

또한 프레스코화(하얀 회반죽을 발라서 회반죽이 마르기전에 염료를 넣어서 천천히 색이 스며들게 하는 벽화 방법)의 염료가 떨어져

눈으로 들어가 눈이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고...

 

제단 뒤 벽면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은 1541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미켈란젤로가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위임받아 제작한 프레스코화다.

이 작품은 말이 많았으나 당시의 종교 개혁의 사회적인 혼란 속에서 민중의 신앙을 굳건히 하려는 의도에서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처음 이 그림이 공개 되었을 때 많은 비난을 받았던 것은 그림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나체로 그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하나 절묘한 것은 벽화를 등지고 교황의 제단에 서면

그 뒤 보트 위의 악마가 마치 제단 앞에 서 있는 교황을 향해 막대기를 휘두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많은 논쟁과 논란 끝에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수정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미켈란젤로의 제자 볼테라에 의해 그림 속 등장인물의 주요부분을 가리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그 이후  볼테라에게 '기저귀 채우는 사람' 이라는 애칭이 붙기도 하였단다.^^

 

 

 ※미켈란젤로에 대하여 도움이 될까 하여 다른 곳에서 가져온 글이다.

 

미켈란젤로는 1496년 로마 베드로성당의 '피에타상'을 제작하고 피렌체에서는

'다비드'상을1504년에 완성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는다.

 

1512년에는 시스티나 성당 천정에 '천지창조'를 4년여만에 완성했으며그 후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생존 마지막 기간 중에는 '론다니니' '피에타 '등을 조각

는 데 거의 죽어가는 순간까지 이 작품들을 조각하였다.

 

1564년 2월18일 미켈란젤로는 뇌일혈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이틀 전 플로렌스에 묻히기를 원하였기에 로마의 '성 아포스톨리 교회'에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플로렌스로 가서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되었다.

 

미켈란 젤로(Michelangelo. 1475-1564 ) :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 부오노로티

는 1475년 아버지 로도비코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0세때 피렌체 시내 프란체스코 울비노 학교에 들어가나 학교 공부보다  지옷토나

마사치오 그림을 모방해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부친은 그들 가문에서

예술가가 나온다는 것을 가문의 수치라 여겼기 때문에 못마땅해 했다.

 

13살때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 문

하에서 3년간 도제 수업을 받았다.기를란디오는 그 당시의 부유한 피렌체 시민 계급

의 생활을 명쾌하고도 매력적으로 표현해준 화가이다.

 

그의 화실에서 미켈란젤로는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일반적인 교양과 기법을 특히 프

스코 벽화의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이때부터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미켈란젤로

그 당시 피렌체풍의 세련된 미술을 거부하고 기념비적이고 강한 표현을 즐겨하게 된다.

 

 

 

 

시스티나 성당에는 관람하러 온 사람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가이드는 서로 잃어 버리지 않게 잘 붙어 다니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래서 '겟 아웃'당한 나도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출구 앞에 있는 의자에서 우리 식구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간 곳은 성 베드로 성당이었다.

 

 

 

다음에 베드로성당편을 올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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