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美 공화당 전당대회 맞춰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 정경모 / 2009-8-13
» 1976년 판문점에서 일어난 ‘8·18 도끼만행사건’ 현장 모습. 1년 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선생이 예견한 대로, 이 사건을 생생하게 찍은 동영상은 그해 미국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주한미군 철수 불가’를 내건 포드의 당선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께서 약사봉에서 목숨을 잃은 얘기를 하기 전에 한가지만 더 해야 될 일이 있소이다.
이듬해인 8월 판문점에서 일어난 ‘도끼만행사건’(미루나무 사건)은 이른바 386세대들도 그때는 아직 10대 청소년이었으니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겠나, 더구나 그것이 미국과 우리나라의 뒤틀린 관계를 얼마나 선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었는지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느끼면서 이 글을 쓰고 있소이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1974년 1월 8일)로 체포되어 수감중이던 장준하 선생이 병 보석으로 풀려나와 댁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시는 동안, 가끔씩이나마 선생을 찾아가 뵙고, 또 선생의 의중을 구두로 내게 전해주는 메신저 노릇을 하던 미국인이 있었소이다. 이제는 다 지나간 얘기니까 밝히겠는데, 그 미국인은 린 마일즈라는 이름의 젊은 사람이었소이다.
언젠가, 그러니까 돌아가시기 직전인 75년 초여름께, 장 선생께서 그 미국인 청년을 통해 내게 전해오신 부탁은 미국에서 대통령선거가 있을 만하면 이상스럽게 판문점이 소란스러워지곤 하는데, 내년이 바로 그해가 아닌가, 조심하면서 지켜봐 달라, 그런 말씀이었소이다.
딴은 76년으로 접어들면서 비둘기파인 지미 카터(민주당)와 매파인 당시의 대통령 제럴드 포드(공화당) 사이에 치열한 설전이 벌어지더이다. 전년인 75년은 파자마 바람에 고무샌들을 신은 베트남군에게 미군이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에서 쫓겨났던 굴욕의 해가 아니오이까.
카터는 월남에서 당한 굴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포드는 거꾸로 월남에서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사력을 과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소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수가 있었을까. 이미 저승으로 떠나신 장 선생께서 염려하시던 바로 그대로의 사태가 판문점에서 벌어진 것이었소이다.
76년 8월 18일 아침, 휴전선상의 미루나무를 미군들이 사전협의 없이 도끼로 쳐서 쓰러뜨리려 하자, 그 도끼를 빼앗은 인민군과 미군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진 것이었소이다. 이 난투 속에서 미군이 두 사람인가 도끼를 맞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주한미군은 즉각 경계태세(컨디션 앰버)로 들어갔는가 하면, 항공모함 미드웨이와 엔터프라이즈가 서해로 파견되는 동시에, 오키나와에서 날아온 장거리 폭격기가 판문점 상공을 선회하는 등 한반도 전체가 일촉즉발의 위기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외다.
그리고 다음날 24시간이 채 안 된 시점에, 차기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공화당 당대회가 캔자스시티에서 열렸는데, 그 회장 스크린에는 미군이 판문점에서 도끼를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장면의 영상이 대대적으로 상영되었던 것이외다. 그날 당대회에서 주한미군의 존속을 주장하는 포드가 압승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고 말이외다.
미군 병사가 도끼를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세계적으로 방영되어 김일성 독재하의 북조선이 얼마나 잔인한 체제인가를 거의 완벽하게 증명한 셈인데, 문제는 그 ‘선명한 동영상’이 아니겠소이까. 돌발적으로 일어났을 그 장면이 마치 상업용으로 제작된 영화만치나 선명했던 것은 무슨 까닭이었나?
사건 직후인 9월 1일, 미 하원 국제기구소위원회는 청문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 출석한 국무부 차관보 함멜의 증언을 보면, 사건 발생을 예측이나 한 듯 미군은 그날 1개 소대의 병력을 약 200야드(약 200m) 후방 지점에 집결시켜 놓고, 거기에 카메라를 3대나 설치하고서 사건의 전모를 촬영했다는 것이었소이다.
옛날 일본군이 저희들 손으로 철도를 폭파하고서 그 덤터기를 중국에다 씌우던 수법을 연상시키는 것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의 진상인데, 그 잔인무도한 북한 군인들에게 살해당한 가엾은 미군 ‘희생자’를 위해 조위금 모집에 나섰던 애국적인 한국인들도 있었다는 것을 나는 오늘까지 기억하고 있소이다.
그때의 ‘미루나무 사건’은 이미 내가 내고 있던 잡지 (粒)에 발표되었던 것이며, 여기에 나오는 미 하원 청문회 자료는 캐나다에서 를 내고 있던 전충림씨를 통하여 입수한 것임을 밝혀두고자 하는 바이외다.
»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71050.html
* 한겨레TV 인터뷰 : http://www.hanitv.com/regate.php?movie_idx=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