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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성 손씨 종가집의 향나무. 종가집 며느리는 이른 아침부터 마당의 풀을 뽑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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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 전통가옥이 잘 보존된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는 월성 손씨, 여강 이씨 종가집이 평지가 아닌 언덕에 우뚝 선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을의 큰 기와집은 '거꾸로 勿자형'으로 뻗은 구릉의 능선이나 중허리에 듬성듬성 배치되어 있다. 숲이 우거진 언덕위의 기와집들을 언뜻 봐도, 이 마을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금방 짐작케 한다.
양동마을 중간에서 왼쪽 비포장 길을 조금 오르면, 산허리에 우뚝 선 월성 손씨 종가집(서백당)이 눈에 띈다. 마을 어르신에 따르면 조선 세조 때 이시애 난을 평정한 '손소'란 분이 이 마을에 들어와 월성 손씨 종가를 이뤘다고 한다. 서백당은 지금으로부터 약 550년 전에 지은 것이란 안내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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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백당은 월성 손씨 종가집이며 회재 이언적 선생이 태어난 외가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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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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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가집 장독대. 언덕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물 머슴'이 아랫 샘에서 물을 길어올렸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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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 서백당 바깥마당에는 종가집 며느리가 잡초를 뽑고 계셨다. "사진 찍어도 되냐?"고 조심스레 질문을 했으나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안채와 사당을 보여주긴 부담이란 답을 하신다. 대신 집의 구조와 종가집 이야기를 전했다.
조선 성종 때 영남 관찰사를 지낸 이언적 선생도 이 집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서백당은 이언적 선생의 외가집인 셈이다. 외삼촌인 손중돈 선생(중종 때 이조판서 역임)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는 것.
"언덕에 있는 종가집은 식수를 어떻게 해결했나?"는 물음에 며느리는 "저 아래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사람이 둘 있었다"고 하면서 "예전에는 그 사람들을 '물 머슴'이라 불렀다"고 설명했다. 종가집을 둘러싼 조선시대 생활상과 신분구조가 언뜻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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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백당 안에 지은 사당. 숲과 어우러져 은유적인 분위기가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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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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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강 이씨 종가인 무첨당의 사당은 집안 제일 높은 곳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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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 서백당에는 550년을 넘긴 향나무가 마당 동쪽에 서 있다. 높이가 약 9m, 둘레가 3m에 이르며 나뭇가지는 사방 6m나 되는 큰 나무다. 향나무는 마치 분재나무처럼 잘 다듬어진 모양이다. 동, 남. 북, 3방향으로 뻗은 밑가지 위로 또다시 세 가지가 꾸불꾸불 자라고 있으며 잔가지들은 서쪽방향으로 왕성한 성장을 하고 있다.
'양동의 향나무'(경북기념물 8호)는 세조 2년(1456년)에 손소 선생이 종가집을 지은 기념으로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러 나무 가운데 왜 향나무를 심었을까? 향나무 뒤에는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한 사당이 보인다. 종가집은 집안에 사당을 짓고 조상을 모신 모셨다. "하루 건너 제사가 있다"는 말처럼 대종가는 1년에 수 십 날은 향을 피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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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적 선생이 거처한 무첨당(보물 지정)은 화려한 건축양식이 돋보인다. 지금 이 곳에 사는 부부가 마주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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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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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에 피는 '바위솔'이 종가(무첨당) 기와에도 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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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 월성 손씨 종가집은 집안의 사당을 나무숲에 살짝 숨겨둔 듯, 은은한 분위기가 풍겨 더욱 끌린다. 같은 마을의 여강 이씨 사당 배치와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씨 대종가의 사당은 집안 높은 곳에 세워져, 손씨 사당보다는 더 직설적인 분위기다. 집안의 성향에 따라 사당의 위치도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두 집안의 건축양식도 다른 특성이 엿보인다. 여강 이씨들이 지은 기와집은 대체적으로 크고 화려하다. 양동마을의 큰 건축물 가운데 손씨의 종택(서백당)과 정자(관가정)를 제외한 대부분의 큰 기와집은 여강 이씨가 소유한 집이다. 이씨 집은 손씨에 비해 튄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도 두 집안은 과거급제를 누가 많이 했느냐와 더불어 건축에도 선의의 경쟁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시각에서 양동마을 건축물을 비교하면 재미있는 볼거리가 더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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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 감찰사 시절 이언적 선생이 왕으로부터 받았다는 향단(보물 지정). 99칸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50여 칸이 남았고 건물 오른쪽에 있던 오래된 향나무는 지난 태풍 '나비'로 넘어져 베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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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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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조판서를 지낸 손중돈 선생이 지은 정자 '관가정'(보물 지정)의 향나무. 건물 뒤쪽에 사당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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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출처 오마이뉴스 | |